<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사색의 심연에 오래 즐겁게 잠기게 해 주는 책. 역시 고전은 싸구려 향수처럼 단번에 자극적이지 않지만, 오래도록 은근히 코끝만이 아닌 온몸을 감싸게 해 주는 향취를 풍긴다.
불교의 석가모니를 다룬 책이니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읽는 독자가 많을 것 같다. 사실 난 별생각 없이 아니 약간은 기독교적 선입견을 품고 읽었다. 예수와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아명)를 비교하지 않으면서 읽을 수는 없었으니까.
소설을 읽고 종교를 논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개종의 위협이 느껴졌다고 말한다면 너무 소설적인 발언일까?
싯다르타의 매력은 좀 더 인간적이었다. 헤세의 계획된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것은 상식적이고 평범해 모든 인간의 마음에 쉽게 다가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 지각의 제한 구역과도 같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잘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누군가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기에 그런 막연함을 믿는 것보다는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인생 이야기 속에서 풀어낸 진리가 그래서 심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이유이다.
비록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이 땅에 왔지만, 신적 존재이며 신 그 자체인 예수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똑같은 실수와 똑같은 인생의 고행길을 걸은 싯다르타는 그래서 시작부터 다르다. 하나는 완성된 신과 다른 하나는 완성되어가는 신이라는 관점에서 그렇다.
자, 그러면 어떤 존재를 당신은 신봉하고 믿고 싶은가 하는 질문의 유혹을 받는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믿는 방식과 이끌림은 다르겠지만, 단순화해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훌륭한 성인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신의 목소리를 따르겠습니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뭔가 절대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의 목소리를 과감하게 선택할 것이고, 그 절대적이란 것이 인간의 인지로 증명될 수 없기에 그 모호함에 주저하는 사람은 차라리 훌륭한 성인의 목소리를 따름이 훨씬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둘 다 매력적이긴 하다. 예수와 싯다르타를 놓고 의미 없는 경쟁을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개개인의 믿음이란 믿겠다고 작정하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고, 믿기 힘들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믿지 못하며, 믿기 싫으면 믿을 필요 없기에, 믿음은 결국 각자의 선택이다. 믿음에는 증명도 조사도 다 부질없고 필요 없다. 이 책을 통해 잘 몰랐던 싯다르타의 생이 나에게 어떤 개인적 사유를 갖게 했는지 나눠보고 싶을 뿐이다.
먼저 이 책은 작가 헤르만 헤세의 놀랍도록 통찰력 깊은 불교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돋보였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깨달음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해서 만든 책이 <싯다르타>라는데, 가르칠 수 없다는 진리를 그는 누구보다도 잘 전달하고 있어 (적어도 나에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진리는 앞서 얘기했던 믿음과 비슷한 의미로 헤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싯다르타의 삶의 궤적과 함께 그가 어떻게 깨달음의 열반에 다다르게 되는지 작가는 마치 싯다르타의 정신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생생하고 실감 나게 그려준다. 동양사상과 불교에 영향을 받은 헤세 자신도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 건 아니었나 궁금하다. 그의 문학적 고찰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확신이 들긴 하지만.
싯다르타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냄새에 있다. 깨달음의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평범함은 읽는 이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유인한다. 그는 평범한 우리처럼 온갖 인간적 유혹과 유희에 차례대로 낚이게(?!) 되는데, 그 낚임은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하나씩 선사해 준다. 그 과정이 많은 인간이 인생을 경험해 가는 길과 유사하다. 그런 면에서, 예수가 그 어떤 시험에도 굴하지 않고 꺾이지 않았던 초인적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첫 번째 겪게 되는 싯다르타의 인생길은 사문(沙門)이 되고자 고행길을 선택한 자기 운명과 싸움이다. 비록 평범한 사람들이 걷는 길이 아닌 고귀한 사문의 길이긴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보겠다고 집을 떠나는 인간의 욕망이라 할 수 있겠다. 꿈을 찾아, 목적을 찾아, 이 땅에서의 의미를 찾아보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싯다르타의 첫 여정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가 사문에서 경험하고 배웠던 사색과 단식과 기다림의 삶은 싯다르타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쳐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사문을 박차고 고타마라는 성스러운 부처를 만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난다.
싯다르타에게 두 번째로 겪게 되는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면 세존이라 불리는 고타마와의 만남이다. 누구보다도 그의 설법에 감복 감동하지만, 생각이 깊은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설법에도 틈을 발견하고 질문을 던진다. 온전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동행했던 친구와 달리 고타마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물음을 찾아 홀로 외로운 길을 떠난다.
싯다르타의 앎과 삶에 대한 지식욕이 정점을 이루는 시기이다. 우리 인간들도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찾아, 새로운 것을 찾아, 더 신기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갈망하는 존재인지 싯다르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평범한 우리는 좀 더 저 차원적인 것을 찾아 갈망하고 있긴 하겠지만.
세 번째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자신을 아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다 얻었지만, 나 자신은 정작 모르고 있었다는 그런 뜨악한 깨달음이 갑자기 그를 또다시 번뇌하게 한다. 그는 자아를 찾기 위해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새로 시작된 여정에서 싯다르타는 기생 여인 카말라와 운명적 만남을 가진다. 그는 그녀를 통해 육체적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그녀를 얻기 위해 돈을 벌고자 걸어 보지 않았던 상인의 길을 걷는다. 사문 시절에 억눌렸던 관능이 터져 나왔고, 세상의 부유함을 맛보았고, 환락을 맛보았으며, 권력도 차례로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속세와 쾌락의 삶을 맘껏 누리고 즐겼지만, 이러한 유희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싯다르타는 망고나무 아래서 서서히 깨닫게 된다.
아마도 싯다르타와 평범한 인간과의 차이점이라면 인생의 골목골목마다 엄청난 깨달음과 놓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조우한다는 점이다. 무엇에도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반추하고 사유하면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쓴 학습과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깨달음은 그를 새로운 경지와 새로운 길로 친절히 인도해 주는 계기가 된다.
이런 싯다르타에게도 삶은 여전히 고되고 그를 지치고 절망하게 한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강물 위로 자신을 던져버릴까 생각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강물 소리에 그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이것도 단순하지 않은 하나의 깊은 사유의 과정이겠지만), 이제껏 들었던 강물 소리가 그토록 아름답게 들렸던 적이 없었음을 발견하고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어 그곳에 좀 더 머물기로 한다.
여기서 지혜로운 현인이자 뱃사공인 바주데바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통해 강과 함께 더 많은 인생 공부를 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삼라만상의 이치를 모두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싯다르타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인생도 한 줄기 강물과 같고, 강에는 현재만 있을 뿐 과거도 미래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는 단일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다.
싯다르타의 인생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고비가 더 남았다. 자식을 통한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과거 사랑했던 여인 카말라가 싯다르타의 아들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싯다르타의 집착과 애정이 그를 그 어떨 때보다도 힘들게 한다. 아들은 부모 곁을 떠나 마침내 싯다르타를 떠나가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아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싯다르타는 부모가 갖는 자식과의 박탈감과 안타까운 심정을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부모는 아들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자신만 그렇지 못한 것 같은 마음으로 상심하기도 하면서. 그 순간 강물 소리마저 싯다르타 자신에게는 비웃는 소리처럼 들려 그의 고통을 더한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우주의 소리라는 ‘옴’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강물의 온갖 소리가 어우러짐 속에서 인생의 삼라만상을 경험하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서로 밀착하여 결합해 있음을 체험한다. 선과 악, 번뇌와 쾌락, 서로 상반되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함께 생명의 음악을 완성한다. 그 후 깨달음으로 가득 찬 미소를 머금고 싯다르타는 이제 더 이상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거칠게 요약한 책 <싯다르타>에 그려진 삶의 여정들이다. 싯다르타가 겪은 삶이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구나 하고 희망하게 한다. 아니, 그런 깨달음의 종착역을 향해 지금 우리는 하루하루 인생의 날들을 지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헛되지 않고,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기쁨이 영원하지 않으며, 지금 꿈꾸고 있는 모든 욕망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의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그래서 우리를 우리로 살게 한다는 그 너무도 당연한 진리가 마음에 큰 울림을 주며 다가온다.
강물의 물소리에서 과거를 듣고 현재를 읽으며 미래를 상상할 수 있듯이 지금 흘러가고 있는 일들이 하나씩 쌓이고 모여 언젠가 우리도 지혜로운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목적이란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긴 여정이 아닐까 싶다. 비록 80 평생이라는 길면 길 수도 있는 시간을 완납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시간만 때운다고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의 반열에 착실하게 오르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모두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인생 전체를 허비하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인생도 있을 것이고, 거친 인생이 힘들어 시작부터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중엔 싯다르타의 품 가까이 근접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완성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얼마나 더 많이 깨달았고, 인생의 순간마다 무언가를 배웠는가, 그래서 깨달음 이전과 이후의 삶이 변화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싯다르타가 한 단계 한 단계 완성의 삶을 향해 살아갔다면, 예수는 처음부터 완벽했고 끝까지 흠 없는 삶을 살다 갔다고 볼 수 있겠다. 싯다르타를 인생의 친구로 삼고 사는 것과 예수를 표본으로 쫓아 사는 것 중에 누구를 꼭 집어 선택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소리가 모여 하나가 되듯, 그렇게 인생의 아름다움을 하나로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