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책 제목이 의외로 많다. <지知와 사랑>이라는 책도 그중의 하나다. 이 책이 헤세의 작품인 줄은 책을 다 읽기까지 몰랐었다. 원제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것도.
책 서두부터 나르치스라는 인물이 주는 예리한 지성과 카리스마에 끌려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끝까지 그 느낌 그대로 나를 끌고 간 책이었다. 물론 이야기는 나르치스보다는 골드문트의 생애가 소설 대부분을 차지한다.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골드문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과 별의별 여성 편력을 말로 다 나열할 필요는 없겠다. 간단히 한 줄로 책을 요약하자면 ‘지성과 감성을 대표하는 두 친구가 삶을 살아가며 배우게 되는 서로 다른 인생론’ 정도로 말하고 싶다.
나르치스가 성직자의 삶을 선택해 세상 유혹에서 분리된 비교적 안정된 인생길을 걸었다면, 골드문트는 예술가의 삶을 택해 온갖 방황과 모험을 자초하게 된다. 둘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똑똑한 나르치스는 첫눈에 골드문트가 성직자로 사는 삶에 맞지 않음을 그보다도 더 먼저 간파했고, 골드문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자신조차 미처 모르고 있었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의 길을 걷도록 충고한다.
수도원 문 밖을 도망쳐 나오면서 골드문트의 삶은 그때부터 온갖 고통과 방황 그리고 갈등으로 점철된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여자와 나누는 육체적 쾌락과 욕정의 분출은 그에게 일시적이나 삶의 달콤함을 선사한다. 여성과의 사랑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느끼게 될 인간애의 순수성을 키우고, 모든 사물을 대함에 있어 깊은 영혼의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해 주고, 종국에는 예술을 향한 긍정적인 토대로 발전한다.
그의 여성 편력은 어린 소녀에서부터 젊은 처녀는 물론 떠도는 집시와 유부녀, 마침내 백작의 아내를 손대기까지 그야말로 너무 화려해서 상대 여인을 일일이 기억하기조차 쉽지 않다. 지칠 줄 모르는 젊음과 정력은 그의 자랑이자 유일한 삶의 밑천이다. 비록 나이가 들어 젊어서 탕진한 정력 때문에 더 빨리 삭고 늙는 단점이 생기긴 하지만.
사족이지만 책을 읽으며, 세상 많은 남자가 골드문트처럼 모두 뜨거운 피를 가지고 태어나도 참 문제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금발 곱슬머리에 잘 생긴 외모 때문에 속수무책 빠져드는 여자들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지만. 골드문트의 여성 편력이 세기의 난봉꾼을 장식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 책은 세계 고전문학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대중 로맨스 소설에 그쳤을 것이다.
탕자의 생활이야말로 진정한 성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골드문트 자신도 어느 정도 예측했을까? 성자의 길은 아니지만, 골드문트는 여성 편력을 거쳐 예술가로서의 삶으로 인도된다. 살인과 처형 직전까지 몰리는 험하고 고된 생활을 겪으면서 길러진 내면의 탄탄한 감수성은 순수한 창조의 열정으로 옮겨 붙는다.
오래전부터 골드문트의 예술가적 기질을 예측했던 나르치스는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한 친구를 만나 감동하게 된다. 비록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나르치스는 친구의 삶에서도 공통된 합일점을 발견한다.
“우리 같은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세속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 그런데 자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다가간다는 말일세.”
나르치스의 말은 구도자적 삶에 후한 점수를 주는 우리 자신에게 반추해 볼 만하다. 계율을 따르며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일까? 계율이란 나르치스도 책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계율을 준수하면서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고, 계율을 준수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다. 골드문트가 예술 세계와 인간을 통한 희로애락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머리로 차갑게 지키는 냉정한 계율이 있다면, 온몸으로 전율하며 배우게 되는 뜨거운 계율도 있는 것이다. 둘의 차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에 골드문트는 죽음을 맞이하며 이런 말을 나르치스에게 남겼다.
“자네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작정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여기서 ‘어머니’란 무엇을 상징할까? 자연인 골드문트가 살을 부대끼며 지나온 대지와 자연 같은 그 근원적인 무엇을 뜻하는 것 같긴 하다. 정확히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분명한 건 골드문트는 죽음 앞에서 초연해졌다. ‘어머니’라고 상징되는 그 무엇을 소유했기에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다.
성직자 나르치스보다 더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담대함은 골드문트만이 가진 귀한 인생 자산이다. 한바탕 연회와도 같은 일생을 마치면서 후회할 것 없는 인생을 살고 난 현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일까? 그렇다면 원 없이 자기의 기질과 천성을 살려,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대로 맘껏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자만이 삶을 후회 없이 담담히 마감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려나? 거친 인생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얻기 힘들기에 그 가치가 무엇보다 빛난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어가는 친구를 보며 나르치스는 당혹감에 빠진다. 소설은 여기서 막을 내리고 그 후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데, 소설이 끝나자 헤세가 생각을 강요해온다. 당신이 나르치스라면 골드문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고.
그의 먼저 읽었던 작품 <싯다르타>를 떠올려 본다. 낯선 인생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성장한다는 면에서 골드문트와 싯다르타의 삶이 많이 닮았다. 헤세의 인생관은 골드문트의 자연인 같은 삶의 과정이 죽음의 두려움과 모든 인생사의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는 해탈의 상태에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나르치스의 정돈되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귀한 삶 자체를 한 수 아래로 놓는 것 같아 마음이 살짝 편치 않지만.
이 소설은 헤세의 성장기 체험과도 같은 소설이라고 한다. 완전하지 않은 한 인간이 삶에서 어떻게 방황해가며 그 과정을 통해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 가고 자기 자신을 구현해 나가는가를 작가 헤세는 자기 삶의 체험으로 보여줬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소설 중에 마음에 들어서 메모했던 구절을 다시 옮겨 본다. 나르치스의 말이었는지 골드문트의 대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생의 지향점으로 찾아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어 옮긴다.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지와 사랑>의 팽팽했던 긴장의 줄을 이제 살짝 놓아도 될 것 같다. 지와 사랑은 병행해 가는 것이지 서로 우위를 따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골드문트처럼 인생을 산 헤세에게 나르치스의 차가운 지성이 겸비되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이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