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김훈 작가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한국 유명 작가의 작품을 처음 대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첫 작품에서 유명세에 걸맞은 작품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다. 그렇게 되면, 작가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생겨 정작 높게 평가받은 작품마저 읽지 않을 불상사가 생길 수 있고, 그건 내게 불필요한 손해이기 때문이다. 이면엔 나만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없지 않다. 이미 검증된 작가의 대표작을 먼저 읽지 못한 미안함도 불편함 마음을 거든다.
이 책도 그랬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같은 작품을 읽지 않고 최근작 <공터에서>를 대하는 마음에 약간의 주저함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의 첫 작품을 대할 때는 기존의 비평이나 견해의 편견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내가 제일 먼저 걷는 흥분과 감동처럼.
서두가 길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 책을 대했다.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어느 인터뷰에서 들었을 때, 머리가 하얗게 센 김훈 작가의 털털함과 수수함이 친근하게 느껴져 호감이 갔던 작품이었다.
책에 나온 주인공 마차세에게 작가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이라 하기엔 그의 생각이나 행동, 외모나 가정환경 및 소위 요새 관심사인 스펙이 매우 평범하다.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웅적인 것과는 매우 거리가 먼 남루한 사람’이다. (오해는 금물! 김훈 작가는 절대로 남루하지 않을뿐더러 영웅이기조차 하다)
그의 식구들도 내세울 게 하나 없는 인생이라는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삶의 터전을 옮겨 괌과 해외에서 보내고 있는 형 마장세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를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 이도순으로 구성된 이 한 식구의 인생이 모두 다 별 볼 일 없고 허접하다면 허접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불행한 가정을 대표하는 초상화 같다.
관심 밖일 수도 있는 이들의 삶이 궁금했던 건, 어느 가족이든 나름의 숙명적인 가족의 사슬로 매여 있다는 데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서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부대끼며 살아가는지 엿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때로는 마지못해, 때로는 할 수 없고 해야만 하기에, 가족이기에 떠맡아야 하는 삶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를 항상 짓누르고 있음을 어느 정도 미리 상상할 수는 있었지만.
이 책은 나에게 여러 면에서 가족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보게 했는데,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자들에게 가족의 사슬이란 그들의 삶에 더 짙고 깊은 그림자를 남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마동수의 가족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식민지와 한국전쟁의 어려운 시기를 버티고 힘들게 살아온 아버지 마동수가 쓸쓸히 골방에서 혼자 고독사로 죽어가는 모습에서 가족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어머니 이도순은 평생 원한이었던 남편이 죽고 나자 치매와 관절염으로 요양원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이란 상상 속의 그림으로만 우리 가슴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큰아들 마장세는 한국과 연결된 무역 일에 마약밀매 조직이 연루되어 검찰에 송치되어 감방에 홀로 남는다. 괌에서 같이 살던 부인은 부하 직원과 눈이 맞아 이미 남편을 떠나고 없다. 차남 마차세의 삶도 남루하기 짝이 없다.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잃고 오토바이 배송으로 거리에 내몰린다. 그러다 형 마장세의 비즈니스와 연결된 사업에 간신히 일자리를 얻게 되지만, 마약에 연루되는 바람에 회사가 문을 닫고 다시 오토바이 배송 일을 나간다. 서로 무거운 짐을 덜어 주기에 구성원 각자의 삶에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만이 너절한 게 아니다. 내면의 상태는 더 열악하다. 아버지 마동수는 일찍부터 딴살림을 차렸고, 본부인과 두 아들이 있는 집에 찾아오는 일은 겨우 몇 달에 한 번뿐이다.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만 남았다. 이런 아버지를 원망하며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문드러진 속을 알아줄 식구는 불행하게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녀의 생은 전쟁 통에서 전 남편과 어린 딸아이와 생이별한 아픈 과거를 가진 기구한 운명이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그녀의 운명에 대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차남 마차세를 낳지 않으려고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낳게 되었다는 옛이야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장남 마장세는 또 어떤가? 베트남 전쟁에서의 공으로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지만,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사살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가 제대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유이다. 불가피했던 살인의 기억과 가정에 불성실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한국을 떠나 해외로 맴돌 수밖에 없는 인생을 선택한다. 차남 마차세도 형과 같이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상황은 더욱 안 좋다. 그런 가족을 가차 없이 떠나 버린 형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혼자서 힘겹게 치르게 된다. 형 마장세로부터 받은 위로라곤 그저 “네가 힘들겠구나”라는 공허한 말의 반복뿐이다.
가족이라는 끄나풀이 아니었다면 서로 관여하지 않고 살 수도 있을 법한 사이, 그 이상도 이 그 이하도 아닌 가족을 보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족이기 때문에 “네가 힘들겠구나”라고 말하지만, 사실 말 이상 그 어떤 행동이나 직접적인 개입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간여하지 않겠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고,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가족이 서로에게 별 도움이 못 되는 존재가 되었다. 식구라고 하지만 끊지 못해 이어가고 있는 악연인 경우가 다반사이고, 지워버리지 못해 할 수없이 달고 다니는 치부나 골칫덩어리인 경우도 적지 않다. 가까운 이웃만도 못한 게 가족이 되었다. 원수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남편은 아내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아내는 인생의 끝자락까지 쌓인 원한만 붙들고 불행하게 살아간다. 그런 부부간의 사이는 어려서부터 불화한 가정에서 자란 두 아이에게 알게 모르게 정서에 직격탄을 날렸을 것이 틀림없다. 부모의 죽음조차 이미 잘못 나간 화살의 방향을 되돌릴 수 없듯이 불행의 방향을 향해 이미 날아오르기 시작한 자식의 발걸음을 돌리지 못한다. 부모의 죽음이 자식들을 자유롭게 할 것 같지만, 부모가 죽어도 남은 자식들 간에는 가족이라는 끈이 묶여 있어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마차세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사람이 죽어도 그의 한 생애가 끌고 온 사슬이 여전히 길게 이어지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옥죄이게 될 수도 있다”라고 예감한 것처럼 말이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가족이 왜 늘 우리의 발목을 잡는 걸까? 부대끼며 사는 사이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너무 예쁘게만 상상해 온 그 자체가 우리의 잘못된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가장 완벽한 사랑을 기대해 왔다. 내 자식이기에, 내 부모니까, 내 남편이고, 내 아내이니까 하면서 우리는 사랑이 무한정 쏟아져 나올 줄로 착각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기대를 하기에 가족이란 테두리는 사실 시작부터 어그러지기 쉬운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온갖 관계의 시험과 시련이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 같이 붙어서 가깝게 지내다 보면 인간 대 인간으로 부딪치며 생기는 근본적 문제들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함께 생활하면 생기는 인간관계와 갈등의 문제는 지역과 인종을 떠나서 두 발로 걷는 인간이라면 언제든지 발생하는 당연한 일이다. 단지 그것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구성원들 속에서 제일 먼저 제일 빈번히 일어난다는 맹점이 있을 뿐.
가족을 원망하지 말고 인간관계에 어리숙한 우리 자신을 탓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가족과 원만하지 못한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관계에 미숙한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은가? 관계의 불화는 개개인의 인격과 성숙함의 문제이지 그가 속한 가족의 문제로 보지 않는 노력을 의도적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사람은 모두 상대적인지라 온순한 사람 앞에서는 자신도 온순해지기 마련이고, 포악한 사람에게는 똑같이 공격적으로 대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가족에게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특별히 부모가 더 나빠서 자식이 더 못돼서 그래서 관계가 일그러진다고 착각하고 너무 슬퍼하지는 말자. 그냥 그 사람은 누구랑도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바른 판단이기 쉽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불행을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묶어 더 아파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고, 인간이 워낙 이기적이라서 가족조차도 내 몸같이 사랑하기 힘든 존재라고 상상하자. 어쩌면 그것만이 가장 진실된 진실일지 모른다. 그래서 신은 그렇게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며, 아내를 네 몸같이, 남편을 예수에게 대하듯 그렇게 사랑하라고 계명까지 주었는지 모른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사랑이 부족한 존재로 생겨 먹은 게 맞다. 그래서 사랑이 많은 신을 갈구한다. 신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원래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다. 신을 쫓아 흉내를 낼 뿐.
나에게도 부족하고 너에게도 부족한 것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며 심하게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이기에 더 실망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저 인간이기에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실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적듯이 인간은 (가족의 구성원이든 남이든) 사랑할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안전하다. 사랑받을 것을 기대하는 순간 이미 불행이 코앞에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불완전한 개개인들이 모여 그래도 가족이라고 사랑이라는 힘겨운 주제를 몸으로 부대끼며 배워보려고 애쓰는 인간들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본다. 내 가족의 일원을 그리고 이 소설의 남루한 캐릭터들을 여전히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