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낯익은 제목이지만 내용엔 막연했다. 하지만 약간은 야할 것 같다는 추측이 있었다. 영화를 봤던 (주로 내 부모님 세대의 연세가 지긋하신) 사람들에게 얼핏 받았던 통속적 느낌이 어딘가 내 안에 잠재해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삼류극장 간판에 썩 잘 어울릴 것 같다.
생각해보면, 성실한 포스트맨의 이미지에 저속하고 야한 것을 연관 짓는 것이 무척이나 생뚱맞다. 보통 포스트맨은 벨을 누르지 않고 우편물만 넣고 가는 것이 일반인데, 예사롭지 않게 그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 벨을 누른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을. 그런 설정이 왠지 야한 것을 상상하게 했나 보다. 내가 워낙 통속적이다 보니 나의 상상은 늘 그 수준에 머물지만.
참고로 소설에 포스트맨은 그림자조차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두 번 벨을 울리는 것의 상징성을 이해할 어떤 암시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제목 따로 내용 따로인 책을 짓는 작가는 독자를 쓸데없이 심드렁하게 만든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읽는 동안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작가와 한마음이 되고 싶어 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작가가 고민하면서 지었을 책 제목을 다시 접하면서, 내용과 제목 간의 관계 등 작가와 교감하는 클릭이 독자로서는 누리기에 썩 괜찮은 독서의 즐거움이다. 그와 반대로 전혀 관련 없는 제목을 지으면 작가는 비정하게 잘 읽고 난 독자를 내동댕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친절한 작가, 내가 심드렁한 이유다.
내용에서도 작가는 친절하게 독자를 이끌지 않는다. 사건의 전개가 도발적이고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내 글의 독자를 생각해서 나라도 작가를 대신해 조금의 친절을 베풀어 보자. 급진적이라는 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의 사건(!)들을 요약해 보자.
방랑을 즐기던 프랭크는 우연히 들른 주유소 겸 간이식당에서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고, 가게 주인의 젊고 예쁜 아내와 눈이 맞게 된다. 프랭크와 코라는 남편 눈을 피해 육체적 관계를 갖고 급기야 이 둘은 저들 만의 삶을 위해 코라의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첫 번째 계획이 수포가 되고, 프랭크는 자신의 방랑기를 따라 그곳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타지로 떠난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코라의 남편과 프랭크.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프랭크에게 함께 일하길 다시 권유하고, 마지못해 돌아온 프랭크는 안 주인 코라와 두 번째로 남편 살해를 시도한다.
급기야 셋은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데 코라와 프랭크는 진짜로 살인을 감행한다. 음주 운전 사고로 위장해 보나, 보험금을 노린 치정 관계의 두 용의자로 보이는 이 둘은 즉시 검거된다. 법정 공방이 한동안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코라와 프랭크는 살해자로 각기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프랭크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자 코라를 끝까지 변호해주지 못해 원망과 실망을 사기도 한다. 변호인의 뛰어난 지략으로 다행히 이 둘은 과실치사로 살해의 혐의를 벗게 된다.
사망한 남편의 보험금까지 손에 쥐고 석방된 프랭크와 코라는 마침내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둘 사이가 전과 같지 않고 불안하다. 프랭크의 방랑기는 코라 외의 다른 여자와 여행을 떠난다. 미래를 설계하며 안주해서 함께 살기를 원하는 코라는 프랭크의 부랑자 같은 삶에 회의를 느낀다.
범행 이후 서로에게 갖는 불신의 골도 깊다. 코라의 임신을 알게 되자 프랭크와 그녀는 행복한 미래를 시작하길 다짐하며 결혼을 한다. 결혼 후 해변에서 함께 수영하다가 코라가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는데 병원을 향해 급히 차를 몰던 프랭크는 충돌사고를 내고, 현장에서 코라는 목숨을 잃는다. 프랭크는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소설은 끝이 난다.
1934년도 소설인 것에 비해 치정에 얽힌 두 남녀가 살해를 계획하는 스토리가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살인을 계획하고 현실에 옮기는 두 남녀. 처음에는 목욕하러 들어간 남편의 머리를 몽둥이로 힘껏 내려쳐서 욕실에서 쓰러진 것처럼 계획하는데, 이것이 갑자기 일어난 정전과 경찰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한다. 두 번째 계획에서는 남편에게 잔뜩 술을 먹이고 차 안에서 술병으로 머리를 심하게 내리쳐서 음주로 차 사고가 난 것으로 위장해 마침내 살인에 성공하게 된다.
변호사와 검사 간 법정 공방도 매우 치열하고 치밀하다. 여기까지 읽으면 법정 드라마의 재미도 상당하다. 미국 변호사의 위대한 계략이 돋보이는 소설로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꼽히지 않을까 생각도 들게 하면서.
혐의에서 풀려나 긴장감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을 때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급히 전환한다. 법정 공방에서 배신감을 느꼈던 코라가 혐의를 벗고 나왔지만, 프랭크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이다. 남편을 죽이고 다른 남자를 얻었으나 결과는 또 다른 문제와의 봉착이다. 바람을 피우는 프랭크의 행동거지도 사이코 드라마 수준으로 평범하지 않다. 둘이 죽고 못 살아 남편까지 살해해 얻어 낸 둘만의 세상에서, 남자는 난데없이 다른 여자와 여행을 떠난다. 여자는 그런 떠돌이 남자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는 현실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 둘은 이미 건너서는 안 될 강을 함께 건넌 셈이다.
처음 만나 서로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정신을 못 차렸을 때와 비교해 보면, 매우 극단적인 방향의 전환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약간은 가학적이다 싶었던 서로를 향한 지나친 성적 집착이 뒤에 이어진 폭력과 살인과 불행의 도래를 어느 정도 예고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섹스와 폭력 그리고 살인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며 남녀 간의 성적 욕망의 에너지란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적 에너지가 있다. 슬픔, 기쁨, 분노, 애환, 고독 등 대부분 혼자서 감정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내야 하는 것이라면, 섹스를 통해 느끼는 감정은 두 인간이 함께 나눈다는 데에 그 차이가 있다. 감정은 증폭되고 극대화된 채로 공유된다. 이 보다 더 끈끈하고 밀착해서 두 사람을 함께 전율시키는 감정의 스포츠도 없다.
정상적 인간이라면 작든 크든 성적 욕망의 그릇 하나는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그릇은 최소한의 채워져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이유가 인간을 성적으로 취약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기 이 소설에서 프랭크와 코라의 만남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나이 든 남편과 사는 젊고 매력적인 아내가 젊은 남자 프랭크를 보자 단박에 성적 욕구를 느낀다. 쇳가루가 지남철을 쫓아가듯 너무도 자연적인 욕구이다. 사랑해서 섹스했다기보다는 섹스하고 나니 집착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 셈이다. 충족되지 않았던 욕구의 물줄기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지극히 생리적인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식욕처럼 채워지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게 육체라는 몸을 가진 인간의 한계다.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필요 이상으로 뒤틀리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소 가학적이긴 하나 서로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던 이 둘이 전에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아내는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사는 것에 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인을 감행하고서라도 이 꿈을 이루고자 한다. 본능을 억제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되는지 보여준다.
굶주린 사자가 허기진 배를 채워 먹잇감을 찾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듯 허기진 성적 욕구를 채우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기도 하나 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 대부분은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지만, 섹스는 상대가 동반되어야 하기에 졸지에 폭력적으로 둔갑하게 되기 쉽고, 둘의 욕구가 증폭해 어디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에 도달하는 위험이 있다.
게다가 섹스란 한 번의 포식으로 배가 쉽게 부르지 않는다. 한 번 달게 잔 잠처럼 피곤이 금방 해소되어 정상의 상태로 돌아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섹스의 욕구는 우물을 깊게 파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만족한 섹스는 더 큰 만족을 기대하고 갈구하게 한다. 자극적인 음식이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그것을 얻기 위한 어떤 위험이나 충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코라가 남편으로부터 채워지지 않았던 성적 욕구를 프랭크로 인해 해소하게 된 것이 과연 그녀의 삶에서 환영할 일이었던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차라리 그녀가 프랭크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남편과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하고 살았더라면 살인이라는 흉측한 폭력의 길과 삶의 나락으로 질주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그녀에게 더 나은 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만 삶을 이해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매일 같이 살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음식물을 먹고 배설하고, 매슬로의 5단계 욕구의 이론을 꼭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알아서 욕구를 찾아 해결하도록 태어났다. 섹스도 먹고 마시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생리적 기본 욕구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가장 바닥에서 먼저 채워졌어야 할 욕구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그다음 단계를 코라나 프랭크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게 당연하다.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결핍된 욕구로 힘들어하던 코라에게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본적 욕구를 확보하기 위해 폭력까지 불사해야 했던 코라와 프랭크를 두둔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섹스를 통해 살인의 한 팀이 되기까지 서로 자처하게 된 그들을 이해해 보고 싶다. 욕구에 무슨 죄가 있나? 문제는 너무 빤하지만 과욕이라는 놈이다. 먹는 것도 지나치면 건강을 해치고, 자아실현의 욕구도 지나치면 자신을 망칠 수 있다. 섹스도 그중의 하나라고 본다. 함께 하고자 했던 코라와 프랭크의 욕구가 도를 넘어 지나쳤다. 그들이 추구한 선택도 극단적이고 비윤리적이다. 그만큼 그들이 극단적 상황에 부닥쳐 있었음을 설명해 주는 거겠지만.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어야 하듯, 욕구도 그래야 하지 않나 싶다. 섹스라는 기본적 생리 욕구가 충족되고 나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던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잘 증명해 준다.
이 둘에겐 기본 욕구가 해결된 후 다음 단계인 안전을 향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온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끔찍한 살인을 공모했던 이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 안전하게 공존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모습을 서로에게 이미 너무 많이 보여주고 보아 왔다. 프랭크가 자신을 언제 죽일지 늘 두려워했던 코라, 코라가 자신을 언제 검사에게 고발할지 불안해했던 프랭크의 모습이 잘 시사해 준다. 섹스의 욕구는 채울 수 있었지만, 안전의 욕구는 서로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욕구를 어느 정도 길들이는 데에 익숙하다. 때로는 높은 단계의 자아실현 욕구나 권력과 존경의 욕구를 얻기 위해 좀 더 낮은 단계의 욕구는 참고 억누르며 산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우리는 자신 속의 기본 욕구를 천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적용해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위해 함께 사는 타인의 욕구를 무시하고 희생시키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욕구에도 도덕성이 요구된다.
연인이든 부부든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서로에게 어느 단계까지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있는지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