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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Aug 18. 2017

#3.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밥솥이 작아졌어요


새 밥통을 샀습니다. 밥통이 말썽을 부린지가 꽤 지났는데도 자주 밥을 하지 않기에 차일피일 미뤄 두었죠.


마침 캐나다 밴쿠버에 갈 일이 있어서, 밥통 쇼핑을 했습니다. 강세인 달러때문에 밥솥을 시애틀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었거든요. 사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최근들어 3번에 한 번꼴로 설익은 밥을 지어내는 밥통을 보면서도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믿으며 밥통을 사지 않고 버텼거든요. 아이들이 떠나면서 새 밥통을 사는 게 아무래도 양심에 좀 찔리네요.

 

살림이란 걸 시작한 이후 난생처음 4인용 밥솥을 구입했네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기분이 묘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이제껏 밥솥은 늘 10인분 이상의 집채만 한 것만 집 안에 들여놓았어요. 신혼이었을 때도 밥솥은 10인용이었지요. 아이들이 생기고 나봤자 달랑 4인 식구인데 무슨 밥을 그렇게 많이 지을 요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늘 10인용 이상의 밥통을 고집했습니다.


4인용 밥솥을 고르면서 내 생에 큰 변화의 꼭짓점을 찍는 순간을 느꼈습니다. 밥솥의 작아진 부피만큼 인생이 한없이 단출해진 느낌? 고무풍선에 바람이 쑥 빠지면서 뭔가 상당히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졌습니다. 그 기분이 아직은 무척 생소합니다. 밥통의 사이즈처럼 뭔가 풍요에서 갑자기 가난해진 느낌도 없지 않고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느낌도 밀려오고, 아 벌써 이런 시간이 내 인생의 막에 올려졌구나 하는 불안감이 낯설게 찾아옵니다.


한 번도 걸어 본 길이 아녀서 이제부터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살짝 난감하기도 합니다. 이런 느낌 아실지 모르겠어요. 저처럼 밥통을 바꿔 보시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줄어든 밥솥에 맞는 인생 매뉴얼이 있나 싶어 두리번거려 보는데, 아무도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려 놓지 않아 보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들은 무성하게 많지만, 그 이후는 다들 오래달리기를 끝내고 지쳐서 모두 바닥에 주저앉았기 때문인지 장 안에 조용한 적막감밖에 감돌지 않습니다. 아직도 숨을 헉헉대며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는 엄마들이 내 뒤로 한 무더기가 저 멀리 보이고, 나처럼 막 피니시 라인을 밟고 바닥에 털썩 앉아 격하게 숨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뿐.

 

근데 저보다 앞서 달려갔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그들만의 경주는 이미 다른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어딘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막 지나온 운동장을 떠나 밖으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봅니다. 이 문을 나서면, 다른 장내에서 무슨 경기가 주어질지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가지고서요. 아마도 오래달리기처럼 강한 심장과 인내와 지구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종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껏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긴장되었던 근육을 스트레칭하며 잠시 쉬어 가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희망하면서요.




다시 밥솥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밥솥을 보니,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지난 세월 수없이 퍼 온 밥그릇의 숫자만큼 몰려드네요. 사실 저는 아이들에게 찰지고 따뜻한 밥을 많이 해주지 못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반찬이 없다는 이유로 잦은 외식에 배달 음식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시켜 먹었으니까요. 밥을 지어도 반찬은 주로 냉동식품을 데워서 낸 적인 대부분이었죠. 반찬 딜리버리를 한 적도 많았고, 가사 도우미의 밥을 얻어먹은 적도 많았죠. 퇴근 후에 부랴부랴 집에 와서 밥을 짓고 어설픈 반찬을 내놓으면서 밥 짓는 일에 대한 부담이 늘 제 마음을 저녁 식탁 내내 불편하게 했습니다. 남들 엄마처럼 화려한 식탁을 차려주지 못하는 미안함. 먹는 즐거움을 엄마로부터 공급받지 못하고 자란 저들의 불행한 유년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 제 가슴을 늘 압박했거든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티를 내지 않고, 일하는 엄마로서 더 당당하게 보이려고 속으로 많이 노력했지만요.


이제는 저들을 위해 밥을 지을 일도 없게 되네요. 밥 짓는 스트레스는 줄어들겠지만, 엄마의 따뜻한 밥을 한 솥 가득 먹여서 보내지 못하는 마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해도 그냥 제 마음을 한동안 쓰리게 할 것 같습니다.


인생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아이들을 떠나 보내고 나서야 밥을 잘 지을 것만 같으니 말입니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시간과 여유가 많아져 퇴근 후 신선한 재료를 찾아 시장을 보고 천천히 음식을 준비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빈 둥지에서 밥을 열심히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4인용 작은 밥솥에 남편과 단둘이 먹을 밥을 짓는 것이겠지만,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이 엄마는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아들의 수학을 기원하며 (떡을 써는 대신) 밥 짓기 연마에 힘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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