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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Aug 26. 2017

#5.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다이닝 테이블이 깨끗해졌어요

아이들이 책상으로 쓰던 다이닝 테이블을 정리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방에 책상이 없는 것도 아닌데 킨더가튼부터 쭈욱 거실에 있는 다이닝 테이블만 고집해서 써 왔습니다. 지난 13년간 숙제와 컴퓨터 게임과 온갖 work & play를 이 공간에서 했죠. 다른 아이들은 머리가 좀 커지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꼭 닫아 두고 지낸다더니, 우리 집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방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더라고요. 지들 방에 책상을 일찌감치 하나씩 마련해 주었는데도, 세 살 버릇 그대로인지 아니면 쌍둥이만의 책상을 통한 유대감의 형성인지 이 탁자를 고집해 여기서만 내내 지냈습니다.


거실에 있는 테이블이다 보니, 애들이 뭘 하는지도 컴퓨터 화면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한테 컴퓨터 게임 그만하라고 혼나고, 공부하라고 잔소리 듣고, 자세 똑바로 하고 의자에 앉아라 등등 온갖 잔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더군요.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소리, 남편과 제가 대화하는 소리, 바이올린 연습 소리 등 모든 소음에도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아이들을 감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굳이 방으로 들어가라고 일부러 등을 떠밀지는 않았습니다. 어려서는 키가 작아서 무릎을 엉덩이 밑에 깔고 앉더니, 작았던 체구가 테이블 위로 나무가 자라듯 조금씩 커지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없지 않았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 테이블은 아이들의 성장이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공간입니다. 튼튼한 나무가 저들의 무게를 지난 13년간 잘 지켜 줬습니다. 


이 테이블은 결혼 후 집을 처음으로 장만했을 때 큰맘 먹고 샀던 건데, 이렇게 요긴하게 오랫동안 잘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미국에서 보통 다이닝 테이블은 손님이 여럿 모일 때 사용하는 공간이라 쓸모가 없는 경우도 많거든요. 아이들은 여기서 색칠공부를 시작하고, 여기서 덧셈 뺄셈을 배우고, 여기서 처음으로 한글과 영어 알파벳을 떼고, 제2 외국어 스페인 어를 연습하고, 어려운 미분 적분에 미국 역사와 세계 역사를 배우고, 화학 물리 생물에 SAT I, II 시험과 대학 원서에 에세이까지 온갖 학교생활에 필요한 과제와 숙제를 이곳에서 모두 치러냈습니다. K-12 교육의 장렬한 전쟁이 휩쓸고 간 현장을 보는 느낌이 드는군요. 


틈틈이 여기서 유튜브를 통해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K-POP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K-Drama에 심취해 밥 먹는 것을 귀찮아하며, 친구와 페북과 인스타그램에 화상 통화도 했죠. 물론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에 가장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와 남편이 먼저 잠자리에 올라간 후에도 올빼미처럼 밤늦게까지 딴짓을 하던 아이들은 일층 거실에 남아 이 탁자를 지키고 있는 적이 많았습니다. 한 명씩 테이블의 대각선 코너에 각자의 둥지를 틀고서요. 


이 탁자 위에는 정말 없는 게 없이 다 있었습니다. 책과 학용품은 피라미드처럼 높게 쌓여갔고요, 거기에 질세라 온갖 쓰레기도 테이블을 무섭게 잠식해 갔죠. 껌 종이에서부터 코 풀고 난 크리넥스, 하굣길에 사 온 사우어 거미베어와 정크 푸드가 공존했고, 손톱 깎기와 그 엽기적인 잔여물이 늘 이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연필을 쓰던 시절엔 지우개 가루가 엄청 날렸고, 샤프펜슬로 옮겨타고는 고장 난 싸구려 샤프와 부러진 샤프심이 테이블 곳곳에서 지저분하게 나뒹굴었죠. 가끔 손님이 오셔서 이 테이블이 필요할 때면 임시로 아이들 물품을 방으로 이동시키느라 아래층에서 위층으로의 이사가 대대적 행사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돌아와서 제일 먼저 이 공간을 치웠습니다. 큰 탁자만 보면 가슴이 설레는 이상한 가구 욕심이 있는지라 아이들이 떠나면 여기를 내 글 쓰는 탁자로 해야겠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거든요. 산더미처럼 쌓였던 책과 아이들의 소지품으로 정신없게 늘어져 있는 탁자를 말끔히 치웠습니다. 훤하게 트인 원목을 보면서 잘생긴 탁자의 얼굴을 가두어 두었던 것 같아 그간 미안했던 마음도 듭니다. 탁자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주고 반질반질하게 기름칠해 주고 나니 마치 내 얼굴인 양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입니다. 


의자에도 앉아 봅니다. 의자의 쿠션이 다 닳아 딱딱한 나무 느낌만 앙상하게 남았네요. 아이들이 엉덩이를 수십 년 간 받쳐 들고 있느라 축 처진 어깨처럼 가라앉았네요. 의자 시트를 새 쿠션으로 갈던가 푹신한 방석이라도 깔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반듯하게 정돈된 테이블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참고로 저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정돈된 집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아니 정돈되지 않은 공간은 절 매우 짜증나게 합니다. 남자아이들의 물건이란 워낙 크고 지저분한 것들이 많아서 이 집 안에서 홍일점인 제가 설 자리가 아주 좁게 느껴졌거든요. 커다란 선적만 한 신발, 집 안 어디든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의 양말과 옷가지, 치우기에는 너무 어지럽혀진 테이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숨이 점층적으로 막혀오는 걸 지난 수년간 느껴왔습니다. 그간 밀려왔던 모든 것이 이제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가고 나니, 우리 집의 안정되고 쾌적한 공간을 다시 차지할 시간이 마침내 제게 다시 돌아왔네요. 


탁자에 테이블 장식 보를 꺼내 깔았습니다. 그 위에는 책장 뒤에 처박아 두었던 화려한 장식 초도 테이블 중앙에 놓았고요. 전에 없던 우리 집 거실의 모습입니다. 


쓸데없이 자꾸 거실에 가 앉아 보고 싶고, 깨끗하게 정돈된 탁자를 보면서 손님을 불러 저 자리에 앉아 차라도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가구에 대한 욕심이었는지 공간에 대한 욕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버지나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여럿 가지고 싶어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쓰던 공간을 차지하고 나니 정복자 나폴레옹의 기쁨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무척 흐뭇합니다.  




아이들을 놓고 온 지 나흘째입니다. 애들이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가 제일 궁금합니다. 지금 기숙사에 있을까? 기숙사 방에 있으면 뭘 하고 있을까? 낮잠을 자나? 컴퓨터 게임에 시간 가는 줄 모를까? 친구들과 밥 먹으러 식당에 갔을까? 오리엔테이션 세션을 잘 챙겨가면서 수업 시작 준비는 잘 하고 있을까? 


텍스트를 쳐도 바로바로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최소한 반나절 또는 하루가 훨씬 지나서야 늦게 연락이 오니, 답답한 마음에 자꾸 저들의 행동반경이 궁금해집니다. 애들 몰래 핸드폰으로 위치 추적할 방법이 있다면 하고 싶을 정도로요. 어디에 있는 것만 알아도 궁금증이 훨씬 줄어들 텐데. 


이 집안을 가득 채우던 두 녀석이 쏙 빠져나가고 나니 집이 그야말로 터~엉 비었습니다. 온종일 거의 저 혼자 (지금 휴가 중)이 큰 집의 모든 공간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래 봤자 거실과 부엌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가 전부지만요. 깨끗하게 치워 놓은 테이블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바라만 볼뿐, 당분간은 그 자리에 가서 아무 작업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슈퍼에 잠깐 다녀오기 위해 문을 잠급니다. 전에도 수없이 문을 잠궜던 내 집인데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제는 집 안에 사람이 정말로 하나도 없는 문을 잠그는 거예요. 아이들을 집에 놔두고 잠깐 나가면서 집 문을 닫던 마음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문을 닫고도 아이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곤 했는데 그런 일이 이제는 없으니까요. 어딜 나갔다 들어와도, 항상 저 테이블에 앉아서 아이들 얼굴을 확인했죠. 테이블 위에 컴퓨터도 사라졌고 컴퓨터 화면 뒤 아이들의 얼굴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저녁이 되어 어둑해지니, 집 안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섭기도 합니다. 지난 18년간 집에는 늘 아이들이 있어서 겁 많은 엄마가 무서울 새가 없었지요. 갑자기 아이들이 빠지고 난 집이 남의 집처럼 생소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서 우리 부부 둘이서만 단둘이 살아 본 게 지금 처음이네요. 아이들 출생 전 저희 둘만의 신혼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그때는 집에 둘이 달랑 있던 느낌이 어땠지? 하면서요. 근데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니까, 갑자기 내가 젊어진 것 같기는 합니다. 저녁을 만들면서 신혼 때 남편만을 위해 짓던 밥과 반찬이 생각나네요. 시장에 가도 이제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사지 않습니다. 전에는 장을 봐도 항상 아이들 위주로 봤죠. 고기 위주의 반찬을 아이들이 좋아했으니까요. 오늘 장을 보면서 고기 없이 장바구니를 채웠습니다. 그 대신 전에 사지 않았던 채소 위주의 식재료를 바구니에 담았고요. 이제 식단도 달라지고 양도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계산대를 나오면서 지갑의 부담도 한결 가벼워졌고요. 


이렇게 새살림을 사는 것에 적응이 곧 되겠죠? 사실 저는 빨리 적응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넓은 공간의 확보, 되찾은 나만의 시간과 한결 가벼워진 살림살이가 나쁘지 않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라 밥 먹어라, 공부했니 등등 무엇보다 잔소리도 안 해서 좋고요. 컴퓨터에 달라붙어서 플레이하는 모습을 한숨을 쉬며 바라보지 않아서도 좋습니다.  


이제는 오롯이 저와 남편을 위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정말 제2의 신혼이 있긴 있는 거였나 봐요. 신혼 초에 아이를 언제 낳아야 할지 고민할 때, 어느 선배 부부가 낳을 거면 빨리 낳아서 빨리 키우는 게 좋다고 했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한참은 젊어진 느낌이 나쁘지 않네요. 제2의 신혼도 신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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