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The Hole> 편혜영
책 표지에 그려진 이층 집의 어두운 분위기가 가장 먼저 핼러윈을 상상하게 했다. 10월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였을까? 구멍이라는 뜻의 제목, 홀 (The Hole)에 빠져들지 않도록 신중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암울한 한 남자의 인생이 핼러윈에 등장하는 그 어떤 기괴한 캐릭터나 죽은 영혼의 유령보다도 무섭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주인공 오기는 사고 난 뒤 온몸이 마비되어 인간 구실을 못하는 자신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그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미안하지만 “그렇다”이다. 오기 자신도 자신이 뭘 준비하고 있었는지 몰랐겠지만, 인생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책임에 당사자인 그를 제외하기는 힘들 것 같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건 오기 자신이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열심히 산다는 이유로 뭔가를 하나씩 성취해 가는 삶을 사느라 분주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것을 깨닫기에 너무 무딘 촉수를 가진 사람이었다. 평범한 우리 인간들의 촉수가 점점 더 퇴화하여 쓸모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주인공 오기를 대표하는 한 단어를 찾자면 역시 ‘오기’이다. 그런 그와는 달리 아내는 ‘포기’라는 단어로 가장 많이 묘사된다. 얼핏 보면 불협화음을 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오기’와 ‘포기’가 만났으니 궁합이 썩 좋은 편은 시작부터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살다 보면 사람이 변하고 사랑이 변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백하건대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오기의 삶에서 별 문제점을 발견하지는 못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보통 사람이었으니까. 적당히 노력해 적당히 자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적당히 진로를 정하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안락한 삶을 영위해 가는 사람. 대단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삶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오기는 사실 평범한 사람들보다 가산점을 받을 자격도 갖췄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잃고 좋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비뚤어지지 않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그래도 꾸준히 찾아 밟아 나갔다. 장모의 표현을 빌자면 오기의 돌아가신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만큼 반듯하게 잘 컸다. 자격지심도 없이.
되려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캐릭터는 오기의 아내였다. 뭐든 끈질기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 처음부터 눈에 거슬렸다. 시작하는 것마다 6개월이나 1년 내 중도 포기한다. 학위를 포기하고 처음 취직한 신문사 직장을 너무 쉽게 그만둔다. 일을 바꿔 잡지사에 취직하지만 1년쯤 하다가 집어치운다. 책을 쓰기로 계약한 출판사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그러자 집필을 아예 포기하고 계약 파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도 부족한 이 시대에, 아내의 모습은 많이 걱정스럽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너무 자주 뜻을 접는 것도 성실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그런 상황을 불만스러워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상황에 기가 죽거나 우울해하지 않는 것도 의외였다. 되려 당당하고 그녀에겐 아무 일도 아닌 듯싶다.
매번 포기만 하고 사는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그려지지 않아, 읽는 독자인 나도 그녀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출판사 사장의 사내 성희롱 사례를 모아 보고서로 사내에 폭로하는 행동을 보고 어느 정도 힌트를 얻는다. 불의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과 자신이 가진 기득권조차 집착하지 않고 버릴 수 있는 단호하고 자신만만한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행동이다. 조용해 보이나 속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강한 패기와 자신만의 신념을 지닌 강인한 여성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남편 오기는 그런 자신의 아내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고 심지어 아내가 자신의 삶을 이루지 못하고 매번 포기하며 사는 모습을 보며 미안하고 안쓰럽다고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삶을 그렇게 걱정할 것이 아니었는데. 자신만의 신념과 확고부동한 의지로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단단했으니 말이다. 이것을 실패한 삶이라고 오판한 남편의 착오가 이 부부 사이의 균열을 가져오게 된 결정적 계기라 생각한다.
아내가 정원을 가꾸는 일에 열심을 냈다가 한 번의 사건으로 정원의 용도를 바꾸고 흙을 뒤엎은 사례만 봐도 아내의 강한 성격을 간파했어야 했다. 수년에 걸쳐 정성껏 가꾼 정원도 맘이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갈아엎을 준비가 되어있는 아내. 특히 그것이 윤리나 도덕이나 정의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더 타협하지 않을 올곧은 성격. 불행하게도 남편 오기는 아내를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남편 오기는 삶에 애착이 강했다. 애착만큼 세상에 잘 적응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산다.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남편 오기는 점점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노골적으로 술수를 부리고, 그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점점 세상에 타협하는 인간이 되어간다. 그것이 혼탁한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는 삶이자 성공이라고 자부하면서. 그렇지 못한 아내의 삶은 이해하기 힘든, 비난받을 삶으로 간과하며 아내와의 간극을 점점 넓혀갔다.
아내도 그런 남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을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다가 남편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학교 여자 후배와 가까이 지내며 급기야는 외도하기까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출판사 사장의 성희롱을 사내에 고발했던 아내와 살고 있다는 것을 남편은 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의 무지가 한심스럽다.
속물 남편에 신물이 난 아내는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다. 그녀의 강직한 성격은 남편에 대한 속물 인간 고발서를 쓰는 것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여행길 차 안에서 벌인 말다툼과 몸싸움이 결국 차 사고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아내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남편은 홀로 살아남게 된다. 삶에 집착이 강했던 오기는 남고, 포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아내는 삶의 모든 미련을 버리듯 떠났다. 생의 마지막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편의 팔을 거세게 움켜잡은 아내가 질주하던 오기를 살리려던 것인지 오기의 질주를 도우려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남기긴 했지만.
아내가 죽고 난 후, 식물인간이 되어 홀로 남게 된 남편 오기에게 장모는 유일한 가족원이 된다. 딸을 잃은 장모 또한 가족이 없기는 마찬가지, 하나 남은 사위를 정성껏 돌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장모는 딸이 남긴 메모를 보면서 서서히 딸과 사위 사이에 그간 어떤 일들이 오갔는지 알게 된다. 딸밖에 몰랐던 장모에게 딸을 잃게 된 이유가 사위였다는 것을 알고는 사위를 간호하는 일에 점점 소홀해지며 급기야는 식물인간인 그를 학대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분노로 정원의 한구석에 커다란 웅덩이를 깊이 파면서. 점점 히스테리 해져 가는 장모의 모습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장모라는 캐릭터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인물이라 비중이 좀 더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받은 책의 느낌에는 등장 횟수나 그녀의 여러 가지 행동에도 불구하고 장모의 역할이 이 책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또 한 명의 소통에 서툰 인간일 뿐.
이 소설은 미스터리나 스릴러가 절대 아니지만, 독자를 충분히 섬뜩하게 하고 공포에 질리게 한다. 인간관계가 이리도 무서운 것인지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저녁을 먹은 후 동네를 같이 산책하고,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고, 서로 읽은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시를 읽으며 그렇게 소박하고 평범하고 안녕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긴 세월을 산 것도 아닌데 어떡하다가 서로의 큰 웅덩이만을 파게 되었는지 그것이 미스터리이다.
가깝다고 잘 안다고 서로를 믿었던 그들의 눈과 마음이 처음부터 고장이라도 났던 것일까? 인생의 반려자로 삼을 만큼 가졌던 저들의 판단이 그렇게 불량품 수준이었나? 분명 사랑하는 연인이자 평범한 부부처럼 보였는데 (심지어 괜찮은 부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연인이기에 부부이기에 서로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우리 자신을 착각이라는 웅덩이 속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을 읽는 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건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고 있는 게 아닌지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온다.
남편 오기가 아내가 중요시하는 삶의 문제들을 간과했던 것처럼. 작은 우연 같은 일 하나가 엄청난 파문을 가져온 것일지도 모르겠고,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모여 어느새 산과 같은 벽이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많은 경우 이 둘의 조합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상대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이것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못한다면 소통할 줄이라도 알아야 할 텐데 그것마저도 터득하는데 별 재간이 없다. 각각 우리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깊고 커다란 하나의 웅덩이를 만들었을 뿐, 다른 사람의 웅덩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좀처럼 알려고도 들어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깊은 홀 안에 몸을 뉘고 자신만의 안락을 누리는 것으로 안위한다. 설령 자신이 판 홀 안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롭고 힘들어 발버둥 치고 나가려 한다해도, 그 아우성이 좀처럼 홀 밖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이 판 웅덩이가 문제다. 각자의 웅덩이 밖으로 얼굴을 자주 내밀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의 이해의 차원이 많이 달라질 것 같은데 말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극히 평범한 삶의 지혜를 찾는다. 어차피 한 사람의 깊은 웅덩이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소통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는 것. 소통에 조금 더 노력해 보자.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자주 웅덩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말자. 때론 손해 보는 용서도 해 가면서. 주인공의 이름처럼 오기를 부려서라도 관계는 살려야 한다. 왜?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다 깊은 홀 속에 빠진 외로운 섬 같은 존재이니까. 또 각자 다른 이유로 완벽하지 못하고 부족한 존재이니까. 그렇다고 모두에게 그런 자비 같은 사랑을 베풀 필요는 없겠다.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에너지도 부족하니까. 적어도 사랑이라 불렀던 사람,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아내가 너무 쉽게 남편 오기를 포기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에게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포기와 오기 사이에서 오기라는 단어를 무조건 선호하는 이유로.
작가도 오기라는 단어를 좋아했을까? 참고로, 작가는 아내에겐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는데 오직 남편의 이름 오기, 오기, 오기만으로 지면을 도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