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북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효경 Oct 19. 2017

책 속의 책, 인생 속의 인생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누군가 내게 당신은 300권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책을 어떤 식으로 골라 읽으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아무도 내게 물어본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습니다.


이에 대답하기 전에 한 말씀 먼저 드립니다. 책을 고르는 순간만큼은 새로운 작가와 새로운 책과의 운명 같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무척이나 흥분되는 시간이라고요. 마치 젊은 시절 소개팅에 나가 어떤 상대가 나올지 가슴 떨리며 기다리던 순간처럼 말이죠. 책과의 사랑에 빠져들기 직전 애무와 전희의 시간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하… 낯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저 만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1권부터 차례로 300권까지 책 등을 훑는 의식을 치릅니다. 전에 읽었던 책들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듯, 조심조심 떨리는 마음을 안고서요. 마치 오늘은 어떤 물고기를 낚을 것인가 낚싯대의 찌를 숨죽이고 바라보는 그런 눈빛으로 예리하게 책등의 제목을 살피죠. 때로는 익히 들었던 책 제목을 한참 만지작거리며, 미뤄왔던 시도를 오늘 실행에 옮길까 꿈꿔 보기도 하고, 때로는 책등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그 얼굴에서 나오는 분위기에 이끌려 고르기도 합니다. 작가의 출생지도 눈여겨보죠. 출생지에서 풍기는 나름의 향기가 느껴지니까요. 간혹 가다는 어느 시대의 소설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런던에 놀러 가야 한다면 영국 작가의 책을 읽거나 런던이 배경 책을 읽는 뭐 그런 식으로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상상만으로 나 자신을 궁금하게 할 뿐, 절대로 책 뒷커버에 있는 줄거리나 책 소개는 가능하면 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제 철칙입니다. 편견을 갖고 책을 대하고 싶지 않은 의지의 발현이죠. 책이 아무리 마음에 들었어도 그 날의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책 두께가 가장 중요한 선택의 요소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상당히 지쳐 있을 때는 긴 이야기의 소설은 읽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마음이 좀 비어 있어야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줄 내 안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을 고른 이유는 제 마음이 많이 비어 있었던 걸까요? 첫째 두꺼운 장편을 찾고 있었습니다. 워낙 최근에 짧은 단편소설을 많이 읽었던지라 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열망이 한창 올라와 있는 상태였거든요. 둘째는 많이 들어본 현대 작가의 이름인데 한 권의 책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교양의 의무감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작가의 탄생지, 터키가 결정적으로 이 책을 집어 게 한 이유가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죠. 터키, 그곳을 이리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자각이 소설을 통해 터키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책을 통한 터키 여행은 관광지를 다녀온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니까요.


첫 페이지부터 좋은 여행이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첫 문장이 예상치 않았거든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첫 문장을 읽고 이 책을 끝까지 붙들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이다.”


첫 문장뿐이 아니었습니다. 어? 이 작가도 책에 빠졌구나. 책 때문에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이긴 하죠. 작가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책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늘 그렇듯 자동으로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근데 이 작가의 책에 대한 감동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몇 페이지에 걸쳐 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감동과 흥분으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그 격렬한 감정을 쏟아 놓는데, 첫 챕터를 읽고 한참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작가 아주 맘에 드는데!라는 강한 호감이 일었죠. 역시 노벨상 받을 만한 작가라는 지당한 찬사와 함께요. 동시에 이 작가가 말하는 책이 도대체 어떤 책일지 이 두꺼운 소설을 다 읽어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아련한 생각이 밀려들면서 그렇게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뭔가 대단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흥분에 젖어.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장의 시작도 하트 겁탈 수준입니다.


“다음 날, 나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책에서 내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던 빛만큼이나 충격적이었고, 내 인생이 이미 궤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증명해주었다”


이 정도면 한 권의 책에 충분히 매료될 준비는 모두 마친 셈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 속 주인공이 그토록 강렬하게 읽었다는 그 책이 혹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 오르한 파묵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나만의 상상을 하면서요. 작가는 독자를 소설 속 책으로 분명 유인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책에 대한 내용은 소설 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그 책이 아닐까 상상했는지 모르겠어요. 분명,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도 ‘책장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 바로 그 빛이었음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새로운 인생’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시달리게 되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감방 답을 하기 어렵겠지만,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영감을 흠뻑 적셔준 책임은 틀림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나의 톱 10 리스트에 이 책을 주저함 없이 채워 넣을 수 있었거든요.


‘새로운 인생’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자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책이 이어준 한 여인(자난)과의 만남을 통해 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을 찾아 버스 여행을 떠나게 되거든요. 자난의 연인이었던 메호메트도 책에 매료되어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나버렸었고요. 전염병처럼 퍼지는 책의 위력이 새로운 인생이라는 거창한 주제와 함께 계속 꼬리를 물며 독자들의 마음을 빨아들입니다. 그 과정에 버스 여행이 펼쳐지고요.


터키의 버스 여행은 사고와 사건의 연속이고 죽음을 목격해야만 하는 여행이 됩니다. 인생에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버스 여행의 곳곳에 필수코스처럼 일부러 작가가 장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자난과 주인공의 버스 여행 속에는 수많은 주검이 등장하고 수많은 버스 사고가 터지며 수많은 사람의 불행한 삶들이 이어집니다. 오직 버스 안에 있는 TV 화면 속에만 사랑과 로맨스, 그리고 인생의 행복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여지고 있죠. 이 소설에는 유난히 터키 사람들이 TV를 보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TV에 영혼을 뺏기며 스러져가는 영혼들을 마주하는 느낌이 분명 들었습니다. TV를 보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과연 책을 통해 소설 속 주인공이 ‘새로운 인생’을 찾았을까요? 명확하게 찾았다 못 찾았다 결론짓기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제 생각엔 찾았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고자 합니다. 어차피 책은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책의 장점이기도 하죠. 덧보태자면 주인공이 읽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했던 그 책이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 소설 속 이야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메호메트의 아버지 나린 박사는 책에 빠져 전혀 현재의 삶을 떠나버린 아들을 추적해 죽이고자 합니다. 금서가 되어 책의 유통이 막히기도 하고요. 책의 저자였던 철도원 르프크 아저씨도 누군가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데 아마도 같은 이유서겠죠. 누구에게는 인생을 살리는 책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죽이는 책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주인공의 ‘새로운 인생’이란 과연 무엇이었을지 좀 더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엔, 오랜 세월에 걸쳐 새로운 인생을 찾아 방황하고 떠돌고 사랑하고 아파했던 그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질투심과 시기심에 메호메트에게 총을 겨눈 그 시간까지 포함해서요. 새로운 인생이란 도달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주인공은 착실한 건축공학도가 되어 평온한 가정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을지 모르죠. 자난을 만나 버스 여행을 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합니다. 책을 만나고 자난을 사랑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나게 된 그것 자체가 주인공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분명 새로운 인생을 찾는 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자난을 잊지 못해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버스 여행을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버스 사고를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될지언정 말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찾느라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던 주인공의 모습이죠.


도대체 주인공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게 한 그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실망스럽게도 책의 존재에 대해 작가는 많은 것을 밝혀주지 않습니다. 메흐메트의 아버지 나린 박사가 자기 아들을 추적하고 조사하게 만든 것으로 볼 때, 책에는 뭔가 위협적이어서 저항을 일으키게 하고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힘든 그 무엇이었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본분인 학업을 포기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나게 할 만큼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책이었음에도 틀림이 없겠죠.


소설을 읽으면서는 도대체 이 책이 어떤 책이었을까 작은 단서라도 하나 찾기를 바랐었습니다. 도움이 될까 싶어 터키의 사회 역사적 배경을 구글에서 검색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슬람교도가 인구의 98% 이상을 차지하는 워낙 종교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뭔가 삶의 근원을 흔들 만한 새로운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 보기도 했고요. 미국의 자본주의와 코카콜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적 성향의 책은 아니었을까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고요.


책에 대해 얻은 한 가지 힌트 중의 하나는, 책의 저자 르프크 아저씨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화책을 주로 쓴 작가라는 것입니다. 주인공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 동료 철도원이었던 아저씨의 만화책을 보고 자랍니다. 아저씨가 쓴 책의 주인공은 바로 이소설의 화자인 주인공임을 독자인 우리는 책의 후반부에야 가서 알게 됩니다만.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쓴 그 가상의 책이 실제의 주인공 나를 변화시키는 엄청나게 재미난 플롯인 거죠. 그럼, 결국 그 책은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가 되는 셈인데, 자신의 이야기에 빠진 소설 주인공의 이야기? 이해가 되나요? 그렇게 이해해도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르한 파묵의 매우 치밀하고 체계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인 것 같긴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메시지의 암시가 보입니다. 메호메트가 다른 이름이 아닌 주인공 이름인 오스만으로 자신을 숨기고 잠적해 살아간다는 것이 우연 같지만, 매우 의도적이죠. 주인공의 이름도 오스만입니다. 주인공 오스만이 자난의 옛 연인이자 또 다른 오스만(메호메트)을 죽이는거죠. 자기 자신을 죽인 것과 다름없는 상징이 아닐까요? 그래서 독자인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그 소설 속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파묵 작가님, 너무 많이 트위스트 하신 것 아니신지…


이야기의 흐름을 설사 놓쳤다 해도, 또는 이야기를 어느 부분 잘못 이해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무궁무진했습니다. 특히 어떤 점이 그랬냐면, 작가의 시적인 문장이 그랬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시와 같다고 느껴졌으니까요. 무슨 장면 하나에도 사람의 심리 묘사에도 작가의 글은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행간 가득 느끼게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주 느리게 읽으려고 노력하기도 했죠. 한 줄을 다 읽어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차라리 시라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을 수도 있을 텐데 앞으로 읽어가야 할 장편 소설이라는 글의 분량 때문에 귀한 글을 아쉽지만, 빨리빨리 목구멍으로 넘겼어야 했으니까요. 저에게는 맛있는 문장들로 배가 금세 채워지는 책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산해진미가 너무 많아서 다 흡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 그래서 여러 번 읽어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맛보기를 위해 샘플로 몇 가지 구절들을 옮겨 드립니다. 아랫부분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 자난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눈썹을 찡그리게 만드는 고통이 보였다. 때때로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를 궁금하게 만드는 물음표를 이마에 그려 보이기도 했다. 나는 창백한 그녀의 뺨에서 빛을 보곤 했다. 턱뼈와 긴 목이 만나는 멋진 나라에서, 머리를 앞으로 숙일 때 목덜미로 흘러내린 머리칼 밑의 피부에서, 장미가 피고, 해가 지고, 즐겁게 뛰노는 다람쥐들이 이 만질 수 없는 벨벳의 천국으로 나를 부르며 공중제비를 돌고 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오르한 파묵 작가님의 은유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표현의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길게 쓴 리뷰이니 한마디만 더 하고 끝을 맺고자 합니다. 제 리뷰를 읽으면서 또는 이 책을 읽으신 분 중에는 인생이 한 권의 책으로 바뀔 수 있으랴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책 한 권 때문에 생각의 바늘이 엄청나게 다른 방향으로 이미 전환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말이에요.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서 결국엔 사고를 바꾸고 신념을 바꾸고 인생의 궤도를 이탈하게 될 수도 있고요. 작은 책 한 권이 커다란 인생을 바꾸는 힘으로 어마어마하게 작용하는 거죠.


이렇듯 책은 적어도 우리를 꿈꾸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갈망하죠. 결국,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갈지도 모를 위험에 빠질 수도 있겠고요.


나이가 들수록 또 남은 생이 점점 줄어들수록 안정적이고 안전한 삶에 안주할 줄로만 알았는데, 자꾸 모험적인 삶에 자석처럼 끌리는 것은 제가 이제껏 읽었던 책들 때문일까요?


책 이야기는 역시, 언제나, 즐겁습니다. 새로운 인생요? 이미 책 읽는 당신은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기하지 않는 오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