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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Oct 27. 2017

남아 있는 나날에는 사랑을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매년 이맘때가 되면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많은 작가가 거론되는데 올해는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작품에 부여되는 여느 문학상과 달리 노벨문학상은 ‘작가’에게 부여되는 상이다. 그만큼 작가의 전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총체적 평가라고 볼 수 있겠다. 작가는 다섯 살에 영국으로 이주해서 살았다고 하니 철저히 영국 작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책 주인공의 직업 또한 지극히 영국적이다. 대저택을 관리하는 버틀러, 집사다.


달링턴 경의 집사로 35 년간 일한 스티븐스가 이소설의 주인공이다. 한때는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리기도 했는데 달링턴 경 사후에 미국 신사가 이 저택을 새로 인수하게 된다. 집사인 스티븐스는 새 주인의 권유로 엿새 동안 영국 서부지방을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는다. 짧은 여행 중 일어나는 이야기와 함께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 시절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들로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작품은 주인공의 직업을 닮았다. 소설은 집안을 똑 부러지게 관리하는 집사를 닮아 흐트러짐이 없이 매우 단정하다. 집사다운 꼼꼼한 면모로 처음 이야기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일관된 분위기가 이어져 드라이한 느낌도 없지 않다. 거기에 꼬장꼬장하고 때론 살짝 엄격할 수도 있는 집사의 성품이 어떤 생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나 논리를 펼칠 때는 물론 설득력이 있지만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을 모시고 지냈던 자신의 집사 시절, 함께 일했던 여자 총무인 켄턴 양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인공의 여행은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집사와 총무 간의 썸 타는 이야기, 즉 로맨스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 않다. 로맨스라고 말할 만한 사건나장면이 딱히 나오지 않으니까. 집사 스티븐스가 읽고 있던 로맨스 책을 켄턴 양이 그의 손에서 살며시 끄집어내던 그 부분만 빼고.  


집사에게 사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전달해 주려는 듯, 소설의 상당 부분은 당시 시대 상황에 따른 영국과 주변 국가 간의 정치적 움직임이 달링턴 홀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이야기가 주로 흐른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달링턴 홀에 모여서 나라의 중대한 거사를 논의한다. 특히 그가 모시고 있던 달링턴 경이 어떻게 독일의 히틀러를 돕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큰 오점과 명예의 실추를 가져오게 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그 속에서 주인공 스티븐스가 맛본 좌절감도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난 이 소설을 읽고 두 가지를 생각해 봤다. 첫째는 집사라는 직업이 보여주는 영국이라는 나라와 영국인에 대한 이해, 두 번째는 서로 사랑했지만, 시기적으로 엇갈려 두 번이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다.       


집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 무엇보다도 최근에 영국을 다녀와서인지 영국이 배경이 된 책을 읽고 영국 사람이 작가인 소설을 읽는 것은 지난 여행의 추억을 새롭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말해 두고 싶다. 특히 여행 중에 자주 부딪혔던 상념, 그러나 딱히 이유를 짚으라면 짚지 못했던 영국의 그 ‘신사 다움’이라는 것의 정체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한결 개운한 마음이다. 앞으로 영국 신사 하면 이 책의 집사 스티븐스가 떠오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알고 있던 소위 버틀러 (Butler)라 부르는 집사는 영화에서 본 것이 고작이었다. 문 앞에서 깍듯이 인사를 하며 주인을 접대하는 모습이나,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정중히 시중을 드는 모습, 또는 서재에 다과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 내지는 집무실에서 꼼꼼히 사무를 보는 모습 등이 대부분이다. 말수는 적고 허리는 늘 꼿꼿하게 펴져 있고 준수한 외모에 까만 양복을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집 안의 공기처럼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나타나 주인을 돕는 사람. 이미지만 있었을 뿐, 집사의 마음속엔 어떤 일들과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지 알 턱이 없었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끌리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집사의 이미지에 맞게 지나치게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자기 생각에 이유를 달고 정리를 하려 들어서 갑갑한 기분을 들게 했으니까. 자기주장도 강해서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위해 치밀하게 분석해 내려갈 때 이 책이 소설책이 아니라 무슨 집사를 위한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혼동이 들기도 했다. 아주 한순간, <언어의 온도>의 이기주 작가에게서 받았던 편안하지 못한 느낌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너무 깍듯하고 반듯한 집사 앞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불편한 손님 같은 처지로.


하지만, 점점 소설 속 이야기로 깊어져 갈수록 스티븐스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이상적 모델로 삼았던 집사의 ‘품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집사라는 직업과 주인공 스티븐스에 대한 호감과 존경심이 깊어졌던 것 같다. 위대한 집사와 단순히 유능한 집사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은 그 ‘품위’란 것이 얼마나 갖추기 어려운 것인지 그와 그 부친 집사의 경험을 들으며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이 바로 품위 있는 집사를 만들고, 그런 능력이 모자라는 집사는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라고 작가는 꼬집었다. 어느 직업에도 적용할 수 있는 품위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프로정신이 강한 집사였다. 자신도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이 가게 설명해 주고 있고 본인도 그렇게 믿는다. 가장 적절한 예로, 집 안에 중요한 행사가 며칠간 계속될 때 함께 집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져 결국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스티븐스는 밖에서 일어나는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 나갔고 그 덕분에 집 안의 중요한 행사를 별 탈 없이 잘 치러 낸다. 그것이 아버지가 기뻐하셨을 집사로서의 본분이었다고 스티븐스는 믿으며 스스로 위로 삼는다.  


이처럼 집주인을 향한 집사의 충성은 그 어떤 직업 정신을 뛰어넘는다. 집에서 일하는 일반 하인과는 다르다. 집사는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주인을 진정으로 섬기고 모실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달링턴 경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었던 주인공 스티븐스의 집사로서 살았던 삶을 통해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설교 같은 말투로 주인공 스티븐스의 입을 빌려 진정한 의미의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다고 전하는데, 그 이유로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이라는 점을 든다. 그래서 오직 영국 민족만이 ‘품위’를 지킨 집사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영국 땅을 말하면서 ‘그레이트’ 브리튼의 ‘위대함’이란 화려함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이 결핍된 바로 그 점이 영국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고, 차분한 아름다움은 절제의 미라는 표현과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마치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영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영국에 가서 받았던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하지 않은데 절도가 있어 안정감을 주는 아름다움이 분명 거리에서도, 건물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속에서도, 사람들의 말투와 제스처에서도, 심지어 음식 속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유치한 예를 들면 이렇다. 레스토랑에 갔는데 미국과 비교하면 서버가 지나치게 들뜨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들 만의 차분하고 격조 있는 방식으로 손님을 모시는데 그것이 손님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뭔가 가식은 걷히고 진정성만 남아 있는 느낌. 꾸밈과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단아한 느낌.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분명 이런 분위기가 느껴졌었다. 이게 무엇일까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설명할 길이 없어 묘한 매력에만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그 궁금증을 해결 받았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집사라는 직업에서 읽히는 신사의 품위에서, 그런 집사가 말해주는 자신의 땅 영국에 대한 칭송에서, 영국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이덴티티를 어느 정도 읽는다. 물론 이 책의 내용과 성격상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기도 하겠지만.


달링턴 경이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을 도와 영국과 대륙의 운명을 노하고 있을 때, 집사인 스티븐스도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고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직무를 최대한으로 수행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그로 인해 성취감과 승리감을 함께 맛본 것도 사실이다. 집사의 삶은 곧 그가 모시는 주인의 삶의 한 부분이었으며, 더 나아가 주인이 섬기는 나라를 위한 일에 도모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섬기던 주인이 너무 신사적이었기 때문에 자비와 온정을 베풀다가 히틀러의 추악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가는 줄 모르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긴 하지마는.


그랬기 때문에 주인공 집사가 말년에 가서 자신의 믿어왔던 삶에 허무함을 맛보게 되었을 때 그 공허함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상실감 때문에 그것을 달랠 길이 없어 젊어서 찾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것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의미가 많이 퇴색할 것 같다. 위대한 집사로 품위를 갖고 살아온 삶에 금이 가고 나서 뒤돌아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 일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아무튼, 이쯤에서 사랑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35년간 달링턴 홀의 집사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사적인 유익이나 사념 없이 살아온 스티븐스가 뒤늦게 켄턴 양을 떠올리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직접 드러내진 않았지만, 충분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녀가 오랜만에 달링턴 홀로 보내온 편지를 수없이 읽고 또 읽으며 혹시 그녀가 달링턴 홀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혼자 기대 속에 잠긴다. 마치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려온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공들여 모시던 주인님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잊혔던 사랑이 다시 떠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에게는 주인을 향한 사랑 외에 비집고 들어 올 사랑의 공간이 그 전에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할 여유가 없었다. 켄턴 양에 대한 호감이 있긴 했지만, 달링턴 주인이 집사 스티븐스의 삶에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켄턴 양이 치고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집사의 프로정신은 냉정한 길이며 한 주인만을 섬기는 충직한 직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선 사적인 감정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있을 수 없었으니까.


주인이 죽고 나니 가능해진다. 3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나서. 단지 세월만이 프로정신을 흔들어 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섬겼던 주인의 삶이 무너짐과 동시에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 것에 대한 낙심이 가져온 변화일 수는 있겠다. 어찌 되었든 주인공 스티븐스는 과거에는 깨닫지 못했던 사랑에 지금은 훨씬 더 깊이 동요되고 있다. 설레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일을 꿈꾸기도 한다. 마치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로운 충성을 다짐하려는 참신한 마음가짐처럼.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나가 버린 세월이 늦게 찾아온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제는 켄턴 양이 과거 집사 스티븐스처럼 점잖고 사리를 분별하며 품위를 지키는 방향을 택한다. 긴 세월을 보내고 나서 너무 늦게 사랑을 찾아와서였을까? 켄턴 양도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자신의 인생에서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며, 스티븐스와 함께 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현재의 남편 곁이라고 마음먹는다.


직접 켄턴 양을 통해 지난 과거의 사랑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스티븐스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진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오랜 세월 집사로서 다져진 품위를 자신의 사라진 사랑 앞에서도 잃지 않고 지킨다. 아무 군더더기 없이 어떠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이 둘은 버스를 사이에 두고 헤어지게 된다. 이게 품위 있는 헤어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함에도 집사는 집사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하는가? 영국 사람들은 사랑을 이렇게 하나? 이것이 신사적인 것일까? 울고불고 가지 말라고 붙들고 사랑한다고 네가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냐고 한마디 말도 해 보지 않고 이렇게 상대를 생각해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죽이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다.


그런데 이 생소하고 사랑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랑이 그런대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절제된 사랑이 위대한 집사의 품위만큼이나 존경할 만한 것으로 내 눈에 비친다. 사랑이란 감정은 타인 앞에서 절제했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집사 스티븐스의 마음에도 켄턴 양의 마음에도 서로를 향한 사랑은 비록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가슴속에 묻어 두며 두고두고 오래 그 향기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누구는 이 사랑이 슬프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위대하게 보이고 어쩌면 가장 변질되지 않고 오래갈 사랑으로까지 보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한평생 자신의 삶을 통틀어 모든 것을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 한 주인을 섬겼던 집사 스티븐스라면 분명 그에게 간직된 사랑도 그렇게 오래오래 충직하게 남을 것이라 믿는다. 그는 품위있는 집사이니까... 켄턴 양도 그래서 스티븐스를 기꺼이 돌려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 줄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충성과 어떤 깊이로 그녀를 가슴에 품고 사랑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할 것인지 듬직한 집사 스티븐스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책 결말에 이르러 스티븐스는 선착장에서 황혼의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을 달링턴 경에게 주고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고 줄 것이 없다고 느끼는 스티븐스에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때며, 황혼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이기에 과거를 잊고 남은 날을 즐겁게 살 것을 충고한다. 아마 노인의 충고가 주인공 스티븐스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 정말 남은 게 없구나. 하루 중 가장 즐거울 때에 주인도 잃었고, 이제 사랑마저 잃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털터리 자신을 보며 얼마나 허망했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그렇게 주저앉지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달링턴 홀로 향한다. 위대하고 품위 있는 집사만이 걸어올 수 있었던 그 길을 다시 걷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을 끝내며 그런 스티븐스를 보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양가감정에 빠진다. 집사로서의 100% 온전한 삶을 산 그를 존경해 마음속 깊은 위로의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의 삶에 20-30% 의 로맨스라도 존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치던 손뼉에 힘이 빠진다. 이와는 정반대로 일과 사랑의 무게가 전도된 경우에도 나는 똑같이 아쉬움을 느꼈을까?


다행인 것은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나날’이 조금 더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스의 남은 나날이 가장 품위 있게 빛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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