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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Nov 07. 2017

체를 빠져 나온 책

<조서> 르 클레지오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쓰려고 하니 참 막막하다. 뭘 써야 하나? 어떤 책이든 읽고 난 뒤 활자와 디테일한 모든 스토리가 사라져도, 뭔가 가슴과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이 한두 가지 정도는 짙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남겨 준 것이 없었다. 아니 내가 뭔가를 잡아내지도 붙들 수도 없는 책이었다.



아무리 고운 밀가루를 체로 다시 걸러도 체의 치밀한 틈새를 빠져나갈 수 없는 크기의 조그만 알갱이 몇 알 정도는 체 위에 남는다. 이 책의 활자는 마치 내 몸과 정신에 아무것 하나 걸러낼 게 없다는 듯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체 아래로 숭숭 빠져나갔다. 구멍만 가득한 체를 바라보니 나의 텅 빈 정신과 만난 듯 황망하다. 뭔가 읽기에 실패한 느낌이다. 작가와 전혀 교감할 수 없었다는 비애. 나의 체가 촘촘하지 못하고 너무 엉성했구나 하는 마치 자신의 타고난 이해력을 실감해야 하는 씁쓸한 자조만 남았다.


아직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어야 나는 저런 소설 속 인물을 체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걸러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절망만 체 밑으로 술술 걸러져 나온다. 이런 책이 나와 맞지 않는 책일까? 어떤 이는 잘 읽히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싫다고 느낀 책은 미련 없이 덮어 버리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뭐 이딴 작가가 다 있어? 하고 덮어 버리려면 늘 나 자신을 덮어 버리고 포기하는 것 같아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물론 작가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덮는 책이 전혀 없지는 않다. 가치관이 너무 다르다거나 재미는 없고 일절 설교만 하려 든다거나, 아니면 인식과 통찰은 없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기만 한 책도 나는 서슴지 않고 덮어 왔다. 그것마저도 나의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편협한 태도인 줄 알지만.


그러나 이 책은 그것과는 분명 또 다르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식의 흐름 내지는 그의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내 의식이 버거웠다. 짧은 단상 하나하나를 이해하기도 힘이 들었고 전체적인 흐름의 감은 더더욱 모르겠다. 마치 같이 산을 오르는데 나만 숨을 헐떡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느낌? 자꾸 주저앉고 정상에 오르기를 그만 포기하고 내려갈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힘든 여정의 책이었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올랐지만, 정상에 도착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도 헉헉 숨만 고르고 있다. 남들은 산길을 오르면서 주변에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 산 옆의 흐르는 강물도 바라보며 온갖 상념에 젖어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두툼해지는 것을 경험했을 텐데 나는 내 앞의 신코만 보고 걸은 느낌이다. 정상에서 바라봐도 그저 산은 산일 뿐 아무것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다. 책을 다 읽었다고 그래서 정상에 올라왔다고 말하기조차 창피하다. 아마 난 내가 의식하지 못했지만, 산 중턱에서 호흡곤란으로 누군가의 들것에 실려 정상에 올라온지도 모른다. 책 제목이 ‘조서(調書)’인데, 부제로 달린 한 줄만나의 독후감을 대변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 부제가 마음에 들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탈출한 남자를 이해하기엔 내 평범한 머리로는 역부족을 느낀다. 이럴 때 들춰보게 되는 책 뒷장의 작품 해설을 의지해보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이야기도 쓸 수 없는 책이 되고 말았지만, 이 책과 씨름한 시간이 아까워 쓸 수 없노라 내지는 쓰지 못한다는 리뷰라도 적어두려고 펜을 들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나도 이 소설의 주인공 아담처럼 정신병원의 환자나 어딘 가서 탈출해 소설 속 세상이 낯설고 익숙하지 못한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남겨야 할 것 같은 동변상련의 엉뚱한 의무감으로.

 

딱 한 장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긴 하다. 아담이 방 안의 쥐와 대결하는 장면이다. 아담은 쥐를 죽이려고 당구공을 던지고 대나무로 쑤시고 다시 당구공으로 쥐를 찍어 누른다. 정신병자 같은 살육의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아담은 자기 자신이 흰 쥐로 변모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뭔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인간의 의식이 쥐라는 동물을 통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는, 살아 있음과 죽음의 거리를 점점 좁혀간다. “죽음의 두려움마저 몸에서 이미 떠나버린 상태”를 주인공은 리얼하게 묘사해 준다. 마치 쥐라는 동물을 통해 인간의 살고 죽음의 의미를 보듯이.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다.   


아담에게는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의 의식과 죽음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담이 자신의 상태를 ‘다면체 거울’이 되어 버렸다고 표현했는데, “수백만 개의 논, 코, 귀, 혀, 피부로 수백만 번이나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다시 느끼고 해서 다면체 거울이 되어버렸던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주인공 아담은 남들이 보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감지했고, 그러다 보니 삶이 무게 그 자체로 다가온 것도 같다. 너무도 많이 세상을 보다 보니 세상이 그의 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버린 것처럼.


잘은 모르겠지만, 아담이란 주인공의 지적 능력과 인식의 깊이 또는 형이상학적 논리 등등 비범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평범한 내가 비범한 그가 이해하고 바라보고 전달하는 이야기들을 온전히 소화할 수 없었다. 정신병자나 탈영병으로 취급하기엔 아담의 내러티브가 매우 진중해 다각도로 나를 압도했다. 그의 생각도, 그의 관찰도, 그의 대화도 뭐라고 대꾸를 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냥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되었으니까.


작가도 서두에서 독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소설은 너무 진지하고 또 지나친 매너리즘 그리고 장황함으로 인해 실패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이루고 있는 언어가 유사 사실주의적 대화에서 현학적으로 쓰인 연감류의 과장으로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작가는 또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의 머릿속에 어떤 반향이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것을 바랐는데, 그것이 과연 나에게는 어떤 것일까 (있기나 한 것일까?) 끝까지 궁금하게 한다. 아담을 통해 아니면 작가의 글을 통해, 그 무엇을 통해 내가 받은 반향은 무엇일까?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그것이 뭔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그냥 뭔가가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는데, 그것의 정체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은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정독을 해보고 싶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이 다양한 것을 걸러낼 수 있도록 나라는 인간이 가진 정신의 체를 다소 촘촘한 구멍들로 좁힌 후에.  


아! 잊을뻔 했는데,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는 최근 한국에서 1년간 초빙교수로 지내면서 서울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집필 중에 있다고 들었다. 결단코 이 작품을 읽어야 겠다. 내가 가진 체로 걸러낼 수 있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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