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루키의 최신작이라고 해서 읽었다.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도 않았고, 작품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는 생소한 충격만 남아있다. 하루키 작품이 왜 좋은지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져 지금은 그저 먼 북소리 (작품 <먼 북소리>는 나름 매력적이었다)로 밖에 추억되지 않는다. 그의 최근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를 한 해 전쯤 읽고 소설가 하루키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들었다. 그의 소설가로서의 삶보다도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달리기를 (하루키는 조깅을 소설의 업만큼이나 매일같이 한다)하며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에 대한 근거 있는 믿음이다. 자유분방하고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의 천재적인 사람보단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자신과 싸움에 도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서두가 길었다. 뭐라고 쓸까 정리가 안 되었을 때 나오는 버릇 이리라. 이 책을 읽고 난 애매한 감상을 설명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금 막막하다. 그냥 붓 가는 대로 써 볼까 한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보여준 소설적 아귀와 치밀함, 그리고 구성의 탄탄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촘촘한 짜임새가 내게 반감을 주었나? 전에는 이런 류의 소설을 쓰는 작가를 대단히도 경외했는데 내 취향이 나를 앞질러 간다.
아무튼, 약간 더 헐렁하게 독자가 마음껏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엔딩을 남겨두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 보다 읽고 나서 느낌이 좋은 책, 즉 말하자면 끊임없이 책의 내용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지금 현재의 나에게는. 이 소설은 그런 긴장감이 읽고 나서 급격히 떨어진 책이었다. 기대한 것에 못 미치는 결말이었다고 할까? 딱히 결말이 중요해야 할 이유도 없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루키가 내린 결말이 기대에 못 미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이데아와 메타포의 세계가 독자로 하여금 책을 끝까지 붙잡도록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결말에 가서 딱히 놀라울 것도 충격적인 것도 새로울 것도 없이 끝난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자극적인 독자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던 내 모습을 누군가(이 책의 주인공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다) 그림으로 스케치했다면, 일 단계에서는 우와~이 책 너무 재밌다 하면서 책을 가슴에 문지르며 잘 고른 책을 마주 대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겠다. 이 단계에서는 (책의 1권이 거의 끝나갈 즈음), 흥미롭게 읽던 남녀 간 성적 묘사에 갑자기 내가 너무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고 뾰로통해진 모습을 그려야 하리라. 통속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에 또는 작가가 쳐 놓은 그물망에 빠진 게 살짝 자존심 상하는 얼굴도 넣어서. 하루키가 소설 속에서 그린 섹스신에는 뭔가 마음을 뺏기게 되는 구석이 있다. 관음증을 유발한다고 할까?
그러다가 책 중반인 2권에 들어가서는 살짝 재미가 덜해져 심드렁해진 내 모습을 그리면 된다. 추리 탐정 소설같이 뭔가 현실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특이한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인해 소설 그 이상의 환상의 세계로 빠져버린 느낌이다. 너무 앞뒤를 짜 맞춘 탓에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을 보는 떨떠름한 기분도 없지 않다. 소설에 홀려 그런 의식을 하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데 작가의 노골적인 복선이 자주 내 눈을 거슬렸다. 주인공의 친구 마사히코가 하루는 생선회를 뜨기 위한 칼을 가져왔다가 그것이 사라진 것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에이~ 씨, 이거 너무 적나라한 암시 아니야 하는 생각에 하루키가 아마추어 작가 같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칼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 주인공이 기사단장을 죽이는 일에 사용된다.
이렇게 하루키에 대한 전체적인 실망이 먹구름처럼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끝을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직도 궁금한 점이 많이 남아있었으므로, 예를 들면 13세 소녀 아키카와 마리에의 행방불명 같은) 결말이 궁금해서 계속 읽었다. 사실 읽는 동안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하루키의 소설은 무지하게 잘 읽힌다. 다른 소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은 너무 빨리 책장이 넘어가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너무 잘 읽혀도 나같이 까다로운 독자는 만족보단 실망하기 쉽다. 메모하고 싶은 문장 없이 스토리만 줄줄 이어지는 소설은 소설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는 착각을 주어서 DVD가 아닌 책을 집어 든 독자에게 배신감 같은 걸 느끼게 해 준다.
정말이지 이 소설을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구글에 들어가서 이미 영화 계약이 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니까. 소설 전체에 흐르는 그림 이야기와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들 또 엄청난 값을 지급한 멘시키의 초상화와 마리에의 미완성 초상화를 영상으로 보여주면 단연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멘시키 같은 여러 색으로 표현되는 인물을 묘사하는 데에 (특히 옷차림과 그 하얀 백발의 아름다움과 멋진 고급 자동차들) 영화가 더 적절한 매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예측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꼭 영화화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특히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등장인물 즉 그림에서 뛰쳐나온 듯한 ‘기사단장’이나 ‘긴 얼굴’도 이미지로 보면 훨씬 더 제격이겠다. 나는 60cm 남짓한 기사단장을 상상하며 스타워즈의 요다가 자꾸 생각났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소설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너무 평범한 작가의 결말 (내가 내린 결말일지 모르겠지만)에 이 많은 그림과 이 많은 판타지와 이 많은 이데아와 (그것도 현현하는 이데아, 1권의 부제이기도 하며 정말 소설 속에서 그 존재가 현현하다 못해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전이하는 메타포(2권 부제)가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이 돌고 돌아 너무 심플한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으니까. 그 방울 소리 울리던 구덩이가 그렇게 중요했던가 싶다. 차라리 그 속에 뭔가 난징대학살을 상징하는 사람 시신 수십 구가 들어있었던 장소였다면 수긍이 더 쉽게 가지 않았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결국 이 소설을 통틀어 ‘믿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본다. 어쩌면 종교와도 같은 그 믿음의 세계가 주인공을 어떻게 인도하고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했는지 그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고 본다. 관념 (이데아)의 세계가 곧 자신이 믿는 바이자 자신의 믿는 힘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궁금하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믿음 속 관념의 세계를 찾아 나서게 한다. 믿음은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는 아마다 도모히코라는 유명한 일본 화가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이 주된 스토리이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은 삶의 방향을 세우고 자신의 잃은 부분도 되찾게 한다. 그것이 우연처럼 다가오든 필연처럼 주어지든 간에 말이다. 자신이 믿고 자신이 믿는 그것에 힘을 싣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주 간단하고 거칠게 이 책을 그런 관점에서 요약하면 ‘삶은 자신이 믿는 대로 살아진다’ 내지는 ‘삶은 믿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뭐 그런 철학적인 메시지를 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하루키가 의도한 바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난 하루키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 작가는 상당히 눈에 보이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잠재적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꿈의 세계나 몽환적이고 신비한 환상적 세계 내지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지배하는 무언가의 힘에 상당히 지배를 받거나 중요시한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의 사당이나 신토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인이라면 믿음에 대해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거부감만 없는 게 아니라 사실 믿음이란 참으로 신령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믿을 수 있는 자와 믿지 못하는 자가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가르는 아마도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될 테니까.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과 13세 소녀에게만 그런 믿음의 눈과 힘이 가능했다. 모든 이가 믿는 힘을 가지기는 쉽지 않고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일단 믿음이란 것이 마음에 생기면, 삶에 힘이 돋고 살아갈 방향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이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결말을 제외하면, 이 책에 흥미로운 부분도 많다. 일단 잘 읽힌다. 추리소설처럼 재밌게 진도가 나간다는 가독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두 권 합해 거의 천 이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순식간에 해치우게 하니 말이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부분은 주인공이 그리는 초상화에 대한 매력이었다. 그리고 화가로서 그림을 대하는 예술가적 입장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도 책을 통해 얻은 큰 수확이다. 뭔가 생동감이 있고 주인공인 화가만이 포착할 수 있는 인물의 특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멋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이 실제 인물이었다면 초상화를 의뢰하러 이미 전화예약을 마쳤을지 모른다. 남의 눈에 비치는 나만의 특징(특히 내면의 그 무언가)은 꼭 초상화가 아니라도 항상 궁금해하는 주제이니까. 화가에게 얼굴을 내밀고 빨리 그것을 그려달라고 떼를 쓰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어디 그런 화가 없나요? 하긴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의 관심은 자신의 특징을 찾아서 생생하게 그려 줄 그런 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꼭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말과 사귐을 통해서 그런 자신의 깊은 내면을 알아봐 줄 어떤 누구를 우리는 모두 열심히 지금도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림 이야기도 좋았고, 소설 중 중요한 캐릭터 중의 하나인 멘시키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면할 면, 색 색의 색을 면한다는 의미), 인물을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무척 하루키다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랄까. 하루키를 잘 모르면서 (아는 건 그저 정해진 시간에 꼭 글을 쓰고 달리기를 종교처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전부다) 하루키를 닮았다고 하는 말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꼼꼼하면서도 치밀한 성격에 깔끔하고 세련된 복장을 한다. 누구에게든 예의를 깍듯이 지키며 자신감이 넘치지만 절대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쉽게 다가가기는 어려운 사람 중의 하나이긴 하다.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를 즐기고 은색 재규어(남편이 왜 이 차에 열광하는지 이 책을 읽고서야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는)를 타며 엄청나게 큰 집에서 혼자 사는 돈 많은 독신 남자. 어두운 과거도 있지만 뭔가 자신이 뜻하는 바를 손에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그 치밀하고 투철함으로 생을 대한다.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에겐 숨 막히고 질릴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루키를 닮은 인물로는 이 소설의 주인공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남녀 관계는 몰라도(하루키는 와이프와 매우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진다. <먼 북소리>에서 보면), 적어도 인생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의식에 있어서는. 어차피 소설 속 인물들은 어느 정도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어 나온 인물들이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공과는 아마도 하루키의 성적 경험이 가장 많이 녹아내린 경우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여자관계 및 성적인 체험들이 상당한 읽는 재미를 주는 건 사실이다. 지극히 노골적인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천하게 들리지는 않는 뭔가 깔끔한 하루키다운(이렇게 표현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다)그런 성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욕정만으로 가득하지 않은 성적 결합, 뭔가 성적인 모습에서 인간의 가장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까. 여성이나 남성이나 섹스는 마치 같이 앉아 밥을 먹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남녀의 관계든 친밀하게 발전하기 위해선 필수적 요소가 되기 쉽고 결국엔 그것에 연연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아무런 일도 아닌 듯 섹스를 끊고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이 식사를 하는 것보다도 더 우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섹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소설의 또 다른 재미라면 물론 소름이 오싹 돋게 하는 이데아의 현실 출몰에 있을 것이다. 밤 1-2시가 되면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어디선가 울려오는 방울 소리. 그림의 모습을 한 이데아.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혼합 등등 다소 기괴한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납량특집 영화라도 보듯이 등골이 자주 싸늘해지기도 했었다. 저녁 늦게 혼자서 이 부분을 읽으며 어두운 방 한구석을 자꾸 노려보곤 했으니까. 마치 공포 영화를 보면서 무섭지만, 뒷이야기가 궁금해 자꾸만 읽어 내려가게 하는 그런 요소도 이 소설 속에 다분히 있었다고 본다.
이 정도로 요약해 보면 어느 정도 내가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었던 생각이나 느낌들은 대충 전달한 것 같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이 있을 것도 같은데 아직 또렷이 머리에 남는 부분은 없다. 그래서 좀 아쉽다. 뭔가 더 큰 물음표를 달고 한참을 고민하고 상념에 빠지는 즐거움을 기대하고 읽었는데 책을 끝내자 모든 물음표가 한꺼번에 사라진 듯하다. 현현하는 이데아가 모두 사라진 느낌?
이쯤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