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이 책은 화목했던 영국의 한 가정에 태어난 다섯째 아이로 인해 야기되는 불행을 이야기한다. 아이의 탄생은 부부간의 불화를 일으키며, 형제자매간 친인척 간 반목을 일으켜 가정 전체를 파괴한다. 마침내 세상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로 분리된다. 정상적 인간들과 정상적이지 않은 문제의 인간들이 양지와 음지의 세계를 각자 구현해 나갈 수밖에 없다.
소설 속 다섯째 아이는 소위 말해 이상적인 영국 가정에 (특히나 자녀를 많이 낳아 화목하기를 원했던) 암과 같은 존재로 탄생하게 된다.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남다른 폭풍 성장의 시기를 거친다. 아기는 뱃속에서부터 난폭하기 그지없어 출생 전부터 엄마를 불안과 공포에 싸이게 하고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유전자의 잘못된 조합처럼 평범한 아이보다 훨씬 크게 태어났고, 발육도 몇 배나 빠르다. 공격적이고 난폭함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생김새도 사랑스러운 아기와는 거리가 멀다. 주인공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네안데르탈인을 닮았다. 식욕 또한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광폭하기가 동물에 가깝다. 엄마의 젖에 검은 피멍을 들게 해서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젖을 물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뭔가 유전자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로 느껴진 엄마는 의사를 찾아가 의학적 규명을 듣고자 한다. 하지만 유난히 활동적인 아이일 뿐 정상이라는 말 밖에 의사가 권할 수 있는 적절한 처방은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다는 죄책감이 엄마를 정신적으로 괴롭게 만든다.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눈빛도 그녀를 점점 죄인 취급한다. 무엇보다도 엄마를 포함해 남편과 어린아이들 및 친인척 모두는 돌연변이 같은 아이를 여느 아이들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게 이 가정의 가장 큰 문제로 봉착한다. 다섯째 아이로 인해 겪게 되는 이 가정의 불행은 그전까지 네 명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평안하고 안락했기에 불행의 충격은 더욱더 감당하기 힘들게 다가온다. 유난히 자녀 욕심이 많았던 이 부부는 엄청나게 큰 저택을 구입해 아이를 여럿 낳아 행복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헛된 꿈은 다섯째 아이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게 된다. 마치 누군가 그들의 지나치게 큰 저택만큼이나 과한 행복이 무너져 내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 거대한 저택은 양가 친척을 모두 집결해 주는 가족 간에 행복한 시간을 나누는 장소로 해마다 애용되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여름휴가의 절기를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오랜 기간을 투숙하며 보냈고, 그렇게 보낼 수 있는 곳은 이 저택이 아니고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다섯째 아이의 난폭성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이 가정의 네 번째 아이이자 터울이 가장 가까운 아이 폴의 팔을 겨우 6개월이 된 아이가 뒤집어 꺽질 않나, 어린아이가 자기 방의 창문 벽으로 어떻게 올라갔는지 방 창문에 쇠창살을 달아야만 했고, 방에 가두어 두면 동물처럼 괴성을 질렀으며, 집에서 기르던 개와 고양이가 불현듯 죽임을 당한다. 아이는 점점 두려운 아이로 성장해 갔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은 그와 가까이하기를 피했고 같이 놀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들 모두 이 다섯째 아이로 인해 나름의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된다. 급기야 남편을 비롯한 가족 어른들이 다섯째 아이 벤과 같이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아이는 요양소에 보내져야 한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다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벤을 격리시켜야 했고 그렇게 벤은 요양소로 강제로 보내진다.
아이를 요양소에 보내고 나자 가정은 잠시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듯했지만, 죄의식과 공포감에 싸인 엄마는 아이를 찾으러 요양소로 떠난다. 벌거벗긴 채 구속복 속에 약물로 중독된 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엄마는 아이를 요양소에서 구출해 오고 다시 이 가정의 불행은 계속된다. 오직 벤을 회복시키고 정상적으로 키우기 위해 엄마는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집 안의 문제아일 뿐이었다. 벤과 유일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라곤 그 집에 정원을 정리하러 오는 존이라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벤은 존을 따라다니며 존의 불량하고 난폭한 패거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벤도 나이가 들어 학교에 가고 상급학교에 가서는 갱단의 우두머리가 되고 며칠씩 집을 나가 도둑질과 강간과 강도질을 해 가며 지하세계의 한 일원이 되어 살아간다.
벤의 엄마는 자신이 낳은 아이와 끝까지 동질감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벤으로 인해 가정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며, 한때 즐거웠던 저택에서의 삶을 버려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벤과 같은 아이는 결국 정상적인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비정상적인 종자임을 TV 속 포악한 사건 사고를 통해 확인 받으며 그 씁쓸한 괴리감을 그대로 갖은 채 소설을 덮어야 했다.
이 소설은 200페이지 안의 비교적 짧은 작품인데도 한 아이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문제라고 호소하는 듯하다. 서로 다른 인간의 종을 이야기하듯 마치 세상에는 선과 악의 원형이 있다는 듯이.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엄마의 모성애에 관한 얘기를 먼저 해 보도록 하자.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이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 아이가 어떻게 태어났고 성장하며 어떤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되었는지 그 환경적 요소에 결함은 없었는지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에게 혹시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희귀한 종자가 태어났거나 길러진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같은 엄마이자 여자로서 돌연변이를 출산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엄마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닐까? 뱃속에 태아가 심하게 동요할 때 지나치게 달리기를 한 것은 아닌지, 태교가 중요하다는데 태교를 놓친 것은 아닌지, 사랑스럽지 않은 용모를 갖고 태어난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에 혹시 1% 사랑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아이에 대한 수치심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아이를 마음속으로 학대하고 증오했던 것은 아닌지, 모성애만이 아이의 성장에 관여했을 것으로 의심하며 열심히 엄마의 틈새를 찾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책임을 물릴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단순하나 문화적으로 매우 당연한 심리에서 말이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 수 있는 확실한 것을 찾아야 심적으로나마 편했을테니까.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녀는 평범한 엄마였다. 적어도 아이를 정상적으로 키워보려고 애쓰던 그녀의 모습에서는. 내가 다섯째 아이 벤을 낳았다고 해도 그녀보다 더 훌륭하게 아이를 키워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지나치게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꿨던 것이 벤과 같은 아이를 얻게 된 자업자득이라는 비난을 하는 독자들도 있지만, 내게는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젊은 남녀가 만나 자녀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꿈꾸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걸까? 집이 지나치게 거대해서? 가족 일원의 희생을 동원했어야 했기에? 그것이 자신들의 행복만을 유지하려 했던 이기심이었다고 봐야할까? 그것보단 차라리 한 비정상적인 아이의 출현이 평범한 개인과 가정에 가져오는 불행에 이 소설을 읽는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은 엄마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그 비정상적임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과 함께.
이 소설은 더 큰 차원에서 인간성의 문제를 묻고 있다. 뭔가 평범하지 않다는 (평범을 정의하기도 어렵고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에서 좀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그것을 극복하기에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아프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와 나의 다름과 차이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옳고 그름으로 이분화시키며 종국에 가서는 나는 살아야 하고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그 범위는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다르지 않다. 정상인의 범주에 있다는 의사의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족 구성원으로 느끼는 정상인의 범주란 의학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벤은 그런 미묘한 수준의 차이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힘이 세고 난폭하고 폭력적이며 동물적이다. 이 화목한 가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아이였다. 그런 아이 벤이 존이라는 실직 패거리 청년들 사이에서는 용납되고 잘 어울릴 수 있으며 벤에겐 가족보다 그 세계가 훨씬 더 편안하고 가족같을 수가 없다. 아무리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사람 간에 존재하는 이질감과 동질감의 문제가 작지 않음을 시사한다.
소설처럼 극단적인 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정 안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가르고 나누고 이 패 저 패로 갈리는지 알 수 있다. 한 가정 내에서도 혼자 기름처럼 튀는 아이가 있기도 하고, 엄마와 더 잘 맞는 아이 내지는 아빠와 더 사이가 좋은 아이로 갈린다. 부모인 나도 나와 다른 아이는 기르는 게 힘이 더 들고 그러다 보니 자주 부딪히게 된다. 천성이 다르기 때문에 나뉘고, 나누기 때문에 갈리는 것이다. 같은 배에서 똑같이 태어났어도 형제자매간 마음이 맞는 끼리끼리 단합하기는 만국 공통이 아닐까 싶다. 한 가정 내에서도 이러니, 친구와 동료, 이웃과 커뮤니티로 나아가면 끼리끼리의 그룹은 점점 고착될 것이 뻔하다. 너와 나로 대적한 관계가 우리 대 너희로, 나라 대 나라로까지 갈리게 되면서. 마치 벤의 패거리와 그 외 가족이 서로 섞일 수 없는 그룹으로 각각 존재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이 모든 고립과 단절의 이유가 다름에서만 왔다고는 보지 않지만, 다름이 그 시작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지나치게 민감한 것일까? 다름을 인정하라고 그렇게 미디어와 학교에서는 다양성을 가르치고 선도하고 있지만, 인간들이 과연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매우 회의적이다. 다름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인간의 속성 자체가 서로를 인정하기엔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용납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착하게 태어나지 않은 것 같다. 다양성의 존중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최소한 대놓고 남을 차별하지는 말라는 정도에 머무르는 게 아닐까 싶다.
다름을 존중해 주고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차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모두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상적으로 들리고 말만 번드르르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폭력적인 벤을 좋아할 평화로운 가족 구성원들은 아무래도 찾아보기 힘들 테니까. 나부터도 나를 닮지 않은 (그것도 안 좋은 유전자를) 자식을 사랑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인간이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끼리만 사는 곳이 아니라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일까? 안타깝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리기 어렵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더더욱 그렇게 느꼈다. 아무리 헌신적인 모성애를 가지고도 내가 낳은 자식을 놓고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온전히 화합할 수 없었다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인간들도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과 테러는 끝이 나지 않으며 교도소의 건물은 매일같이 들어오는 새로운 사람들로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슈퍼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남편이 빌려온 영화이기도 하고 추수감사절 연휴 동안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원더우먼>이라는 최신 영화를 봤다. 역시나 슈퍼 히어로 원더우먼은 인류를 악에서부터 구원하고자 악과 홀로 맞서 싸운다. 전쟁을 일삼고 많은 생명을 무고하게 살해하는 악한 인간을 지배하는 악의 본성 그 자체를 타깃으로 싸우지만, 싸움의 끝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녀도 깨닫는다.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악과의 무모한 싸움이기에 포기하려 하다 가도, 인류에 대한 작은 불씨 같은 믿음을 붙잡고 끝까지 싸운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여도 인류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자고 자신을 일깨우면서. 그렇게 살려낸 한 포기의 싹이 어느 날 전 세계를 덮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렇다면, 매우 희망적이다. 우리에게 싹은 아직,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원더우먼 워나비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가족의 일원을 바라봐 주고, 이웃의 문제를 이해해 주며, 사회를 만들어가고 전 인류의 공동선을 향해 지향해 가야 함을 식상한 슈퍼 히어로 영화를 통해 또다시 주입받았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서 받은 절망적인 현실감을 위로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깨닫는다. 벤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나는 원더우먼이 아님을. 그래서 우리는 자꾸, 계속,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슈퍼 히어로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