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이 소설은 흑백 인종 간의 미묘한 긴장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렸다.
소설은 남아프리카 연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메리라는 이름의 백인 여자가 살해되었는데 살해범은 그녀의 집에서 일하던 모세라는 흑인 원주민이었다. 살인범은 순순히 자백했지만, 이 사건을 놓고 마을 주민들이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다. 살해된 메리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백인들의 체면을 손상했기 때문이다.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 백인 그들만의 문화가 이 남부 아프리카의 마을에서는 뿌리 깊이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과의 관계 속에서는 백인들의 체면과 자존심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왜 살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뭔가 중요한 사건이 메리와 모세 사이에 있었다 해도 마을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먼저 이런 이야기들이 긴장감 속에서 의뭉스럽게 전개된다. 사건의 전모를 다 읽기 전에 이 부분을 먼저 대하게 되는 독자에겐 그 의미심장함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다시 앞부분으로 와서 첫 챕터를 천천히 읽어 내려갈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이 지역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새내기 영국의 한 젊은이 토니가 느낀 문화 충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니도 별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의 사고방식에 맞춰서 처신해야 하는 것이 아니면 이곳을 떠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 소설의 작가 도리스 레싱은 영국인 부모 밑에서 출생하여 (출생지는 이란), 영국 식민지였던 남부 로디지아 (지금의 짐바브웨)로 이민 왔고 이 곳에서 성장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독학의 시간,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등 힘겨운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지냈다. 도리스 레싱은 1949년에 영국으로 떠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하게 되었고 2007년에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받게 된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페미니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 생명과학, 신비주의 등 20세기의 갖가지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자전적 요소를 담아 여주인공 메리를 그려냈고, 백인 여성이 겪는 심리를 통해 남부 아프리카에서 펼쳐졌던 흑백 간의 인종 문제를 자세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리의 주인공 메리. 그녀는 불행한 유년 시절을 겪는다. 엄마 아빠의 끊임없는 불화,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 아버지의 술주정이 메리로 하여금 남성과 가정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다. 학교를 중퇴하고 소도시의 사무실에 취직해 혼자 살아나가면서 점차 엄마와 아빠의 어두운 기억을 지우며 평안을 찾는다. 원만한 성격의 메리는 함께 거주하던 직장 여성 회관에서 동료들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녀는 어쩌다가 보니 결혼 적령기를 놓쳐 노처녀가 되었고, 서른이 되어서도 소녀티를 벗지 못하는 옷차림을 하고 다녀 친구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점차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은 메리는 극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리처드 터너와 결혼하게 된다. 리처드 터너는 시골에서 농장 일을 하는 도시를 무척 싫어하는 남자였다. 메리와 리처드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히 결혼하게 되고 이 둘은 시골에서 농장을 어렵게 어렵게 운영해 나간다.
리처드는 성실하게 농장 일을 하지만, 운이 좋지 않은 건지 경영력이 부족한 것인지 어려운 살림이 끝내 윤택해지지 못하고 늘 전전긍긍한 삶을 이어간다. 농장에서의 삶에 익숙하지 않은 메리는 무더위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시골 생활에 지쳐간다. 게다가 흑인 원주민을 다루는 일은 메리에게 힘에 부치고 곤욕스럽기 짝이 없다. 메리는 점점 더 신경질 적이 되어가고 리처드와의 사이도 갈수록 힘들어져만 간다. 남편을 도와 농장 일을 제대로 경영해 보고자 노력하지만, 농장 일도 남편 리처드도 메리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견디다 못한 메리는 농장을 떠나 도시로 도망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신의 초라함에 놀라 그녀를 찾으러 나온 남편 리처드와 함께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메리의 성격 중에 두드러져 보이던 것은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였다. 언제든 무엇에 열중해 일하거나 마음을 붙여야 하는 성격이다. 신혼 초 커튼을 만들고 집 안을 꾸미며, 새로 벽을 칠하고, 남편이 아플 때 직접 농장에 나가 일꾼들을 부리는 억척스러움도 있다. 채찍으로 혹독하게 흑인 원주민을 부리질 않나, 새로 시작한 양계업을 무리 없이 척척 운영해 내는 능력도 갖추었고, 사업가적 기질도 남편보다 뛰어나다. 메리와 리처드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면 이 가정이 몇 배는 더 부유해져서 행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의 에너지는 집안일을 돕는 흑인 원주민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슨 일을 시켜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게 일하는 흑인 원주민들을 끊임없이 혼내고 지적하고 해고하기를 반복한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일꾼을 부리느라 자신을 혹사하고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흑인 원주민들 간에 메리는 지내기 힘든 안주인이라고 소문이 나서 이제 더 이상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는 흑인 원주민이 마을 전체에 없을 정도다. 마치 무더위가 언제 그칠 줄 모르듯 메리와 흑인 원주민들 간의 불화는 지겨울 정도로 이어진다.
모두가 이 집에 들어오기를 꺼릴 때 모세라는 일꾼이 메리의 몸종으로 들어오게 된다. 남편 리처드가 농장에서 데리고 일하던 하인 중에 가장 쓸 만한 인물이라며 그를 메리에게 데려왔다. 그가 마지막 일꾼이 될 수 있으니 해고하지 않도록 메리에게 엄중히 당부하면서.
여기부터 메리와 모세 간에 긴박한 심리전이 펼쳐진다. 그녀에게 모세는 다른 원주민과 달랐다. 그는 농장에서 메리의 지시를 무시하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겠다며 백인 언어인 영어 몇 마디를 쓰며 말대꾸를 했다가 메리에게 채찍을 맞은 적이 있었다. 모세는 자신에게 채찍을 내리치던 메리를 적개심과 경멸로 바라봤었는데, 아마도 메리는 그때의 사건을 의식했기에 모세를 하인으로 옆에 두고 쓰기에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남편에게조차 자신의 채찍질 사건을 알리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메리는 그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명령을 복종시키면서 승리감이나 만족감을 느낀다.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는 것에서 오는 감정이자 남편이 경영하는 농장에 대한 화풀이처럼 보인다. 자신의 경영 아이디어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자신의 몸종에게 분노와 학대로 전이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날씨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더위에 지쳐 정신이 몽롱해지고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넉넉한 살림도 아니고, 남편의 일도 성공적이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가 갈수록 안쓰럽고 애처롭게 느껴져 답답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유일한 감정적 돌파구는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흑인 원주민이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메리는 모세에게만은 일종의 위압감 내지는 두려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때로는 그의 도전적인 눈빛에서 때로는 그의 느닷없는 친절함에서. 뭔가 인간적인 감정이 이 흑인 모세로 인해 싹트는 것을 메리는 가장 혐오하고 무서워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를 내쫓으려고 하고 해고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그것마저 쉽게 이루지 못한다.
메리의 압박이 견디기 힘들었던 모세는 자진해서 그녀의 집을 떠나려고 한다. 난처하게 된 메리는 가지 말라고 눈물로 하소연하며 그를 붙잡는다. 수치심이 들었지만 그녀로서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모세가 아니면 그녀의 집에 일하러 올 흑인 원주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날 이후부터 모세는 메리 앞에서 점점 당당하게 군다. 메리가 있어 달라고 했기에 자신은 부인을 돕기 위해 있는 거라며 서슴지 않고 말대꾸를 하며, 그녀를 꼼짝 못 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메리는 발악을 하듯 흑인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이 친 그물에 보기 좋게 걸려든 한 마리 참새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게 되었는데 메리가 자원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본다. 이렇게 될 것이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하인에게 밀리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메리는 모세 앞에서 무력한 안 주인이 되었고 집안일도 전처럼 간섭하지 못하고 모세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이제 모세를 감시하기보단, 그를 호기심과 두려움에 관찰하게 된다. 무의식적이긴 하나 성적으로도 모세를 상상했는지 모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은 항상 아버지의 환영과 함께 그녀를 꿈속에서 힘들게 하며 나타났다.
아마 모세도 주인 메리의 이런 변화를 충분히 눈치챘던 것 같다. 모세는 메리를 마치 자신의 부인을 다루듯 그렇게 조금씩 지배해 가며 만족을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이 농장에 잠시 일을 맡아 줄 사람으로 오게 된 영국 청년 토니가 메리와 모세의 이상한 관계를 목격하게 된다. 백인 주인과 흑인 원주민 간에 있을 수 없는 관계를 보고 경악하게 된다. 메리는 모세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그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고 있다. 행동만이 아니라 말투도 몸종이 안주인에게 할 수 있는 도를 넘어섰다. 메리는 거부할 수 없는 뭔가의 힘에 이끌려 모세의 꼭두각시 백인 인형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메리 자신이 원하던 바가 결코 아니었겠지만. 어쩌면 죽음의 공포 속에서 메리가 처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방법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모세를 거역하면 그가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남아프리카의 살인적인 더위는 메리의 몽롱한 정신 상태를 더 힘겹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육체적으로도 메리는 점점 쇠약해 갔다.
이때 기사처럼 이 집에 등장한 토니는 메리에게 마지막 희망이 된다. 토니의 도움으로 모세를 집 밖으로 내쫓고 그의 영향력에서 빠져나오고자 메리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부림쳐 본다. 그러나 그것이 되려 그녀에게 어처구니없는 복수의 화를 부르고 만다. 메리에게 배신감을 느낀 모세로 하여금 그녀를 살해하기에 이르게 하면서.
마을 주민들 모두는 메리의 죽음을 놓고 그녀가 나쁜 여자라고, 성실한 남편을 폐인으로 만들고, 백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그녀에게 모두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아프리카에 원주민을 상대로 사는 백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메리를 탓할 수 없었다. 충분히 그녀의 삶이 이해되고 그녀가 그만큼 살아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고통을 맛보았으며, 절망적이고 두렵고 힘든 삶을 살았을까 싶다. 아무리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삼고 부린다 해도 여자의 몸으로 건장한 흑인 남성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더군다나 모세의 날카로운 눈빛에 담긴 분노의 감정을 홀로 받아 내고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녀는 다루기 힘겨운 모세를 학대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대응해 보지만, 되려 원주민의 화를 불러낼 뿐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웬만한 백인 여자들처럼 흑인 원주민을 살살 다뤘으면 되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이 사람의 마음과 얼굴에 채찍질을 휘두르고 초연하게 그를 다시 두려움 없이 대하면서 평안하게 잘 지내기는 힘든 법이다. 혐오감이 두려움으로 두려움이 공포로 공포가 무기력함으로 메리를 작용하게 했다. 자기방어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메리가 모세를 통해 성적인 욕망이나 그 외 감정에 이끌렸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 같다. 아마 남자와 여자로서 간혹 그렇게 상상할 수는 있었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모세를 마지막에 가서 내쫓고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모세와 한 몸이 되어 남편 몰래 농장을 떠나 도망을 가거나 은밀히 성적 관계를 즐겼을 것이라고 본다.
메리에게 동정이 가는 반면 이 암울한 상황에서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물 마음은 없다. 남편 리처드도 자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고 본다. 비록 무능력했지만, 성실 하나는 충분히 신뢰하고도 남았으니까. 모세도 사람인지라 메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의 마음이 들 수 있었을 게다. 자기를 학대하는 여주인에 대한 반발심이 커져 그녀를 지배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한 백인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다 메리를 정말 아내처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녀의 변심을 보며 살해를 감행한 것을 보면. 그것도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자백하면서까지.
사실 모세와 메리가 흑인 원주민과 백인 여주인이라는 인종 차별과 계급의 관계를 벗기고 보면, 얼마든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남녀 간 불륜 중의 하나로 간과할 수도 있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핵심은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흑인 원주민이 백인 여자를 죽였고 그것이 백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백인 주민들은 이 사고로 경악했다지만, 내게는 백인들이 지키고 싶었던 그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것이 더 경악스럽다 못해 말할 수 없이 혐오스럽고 비열하다고 본다. 문명이 먼저 발전했다는 이유로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착취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체면만을 중시했던 세상. 그들의 뻔뻔함을 목격하며 인간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소름 끼치는 일은 아직도 이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Black Lives Matter”의 구호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백인우월주의가 다시 미국 내에서 고개를 들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면으로 당당히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심플한 일일 수 있는데 왜 단순하지 않은 걸까? 우리는 피부색만 다를 뿐 똑같이 가슴에 심장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 같은 종인데 말이다. 게다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알고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훌륭한 두뇌도 가지고 있다. 모든 능력에서도 각기 우월한 부분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비슷비슷한 다 같은 사람이다. 희로애락을 느끼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똑같은 인간이다. 사회라는 틀 속에서 교육을 받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좀 실천이란 걸 확실히 적용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지나온 역사가 창피하다고 생각이 들면 늦었지만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지자. 과거 흑인을 노예 취급하고 식민지의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것에 (이 대목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과 성의 없는 사과가 심히 걸린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갖자.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는 것을 자중하자. 그리고 좀 더 괜찮은 종으로 우리를 업그레이드해 보면 어떨까? 화성에 가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데 지구인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제발 좀….
메리와 모세가 살던 시절은 멋모르고 살았던 시절이기에 그렇다고 치자. 지금 와서까지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면 너무 창피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 정치와 언론 및 유명인들을 상대로 우후죽순처럼 공개되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폭로만 봐도 인간의 추함은 참 끝이 없어 보인다. 차별과 무시 그리고 착취와 학대가 더 교묘해지고 더 악랄해지는 지금 이 세상, 어떤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후대에 남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내 안의 내가 말한다. 셧업! 너나 잘 하라고. 그래, 나부터라도 노력해야겠다. 모든 인간을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로 대해야 함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