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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Dec 07. 2017

행복한 결혼의 선행조건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무엇이 행복한 결혼일까? 내가 일평생 죽도록 사랑하고픈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는 것? 아니면 나를 죽도록 사랑해주는 그러나 덜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는 것일까? 배우자 간 서로를 향한 사랑의 크기가 자를 잰 듯이 똑같다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일까?


결혼 적령기에 있는 아가씨들에게 아줌마들이 해 주는 조언이 하나 있다. 행복한 결혼은 주로 남자가 여자를 더 사랑해 주는 관계라고 한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목을 매 결혼해서 행복한 경우는 보기 힘들다고 덧붙인다. 아내에겐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며, 이미 결혼한 여자 선배들 열에 아홉은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남이 나를 더 사랑해 주는 삶이 더 행복하고 덜 불행하다는 얘기와 맞닿는다. 타인의 희생을 전제한 이기적인 결혼관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수긍하는 이야기이다. 남자도 똑같은 사람인데 똑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어떤 남녀가 과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남자들은 행복한 결혼을 포기했다는 것일까? 남자들에겐 이상적인 여성을 만나는 것이 그 여성에게 사랑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말일까? 애정에 대한 욕구보다 소유욕이 강한 남성들이기에?


<인형의 집> 로라와 남편의 관계는 어떠했나?


남편은 그녀를 집 안의 인형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로라도 그 사랑을 받으며 새장 속의 새처럼 평온하게 살아간다. 적어도 내가 살펴본 125페이지 안에 공개된 그녀의 결혼 생활을 살펴보면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고 로라 또한 남편의 사랑을 가득 받고 살며 행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새장 속 사랑이란 것이 위기를 만나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로라는 또 어떠했는가? 남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없는 돈을 무리하게 빌려 요양을 가고 결국 남편의 건강을 살려낸다. 남편을 향한 로라의 희생적 사랑이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남편 몰래 빚을 갚아 가느라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되고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다. 그녀는 남편이 끝까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렇지 않은 남편을 보고 실망하게 되어, 남편의 사랑이라는 것의 민망한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로라는 집을 떠난다.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다.  


한숨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좀 더 단순하게 책의 핵심 내용만을 읽었다. 페미니즘의 교과서처럼 종종 회자하는 로라라는 인물이 어떻게 남성의 장식품이나 소유물 같은 존재에서 한 독립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변화를 꿈꾸는지를 당당하게 보여주는지. 그래서 구시대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사고에 젖은 모든 남성에게 여성 대표로 강한 펀치를 날리는 통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근데 책을 덮고 나서 펀치를 날렸음에도 기분이 썩 시원치만은 않다. 특히 로라에 대해서. 소설 전반부에서 보인 로라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집을박차고 떠나는 로라의 모습과 일치시키기가 무척 힘들었던 이유도 없지 않다. 물론 사람은 결정적인 사건을 대하고 180도 생각의 전환을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로라도 그 상황에 해당한다. 그녀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그만큼 철부지처럼 믿었던 남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한순간에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로라는 남편의 사랑이라는 것이 매우 조건적이고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것임을 몸서리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이 냉정히 버리고 자신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로라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남편 몰래 돈을 빌리고 (특히 이것이 시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시절이기에), 차용증서에 위조 사인을 한 사실을 숨겨왔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건강을 돕는 일이었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로라를 이해하지 못했던 남편의 애정 없는 태도는 물론 비열한 처신과 행동이 실망스럽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로라를 남편은 단지 수치스러운 존재로만 취급해 아이들 엄마의 자격마저 박탈시킨다. 이 일로 인해 오직 자신에게 어떤 부정적인 요소가 생길까 그것만을 고민하면서. 로라에 대한 손톱만큼의 배려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남편에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아내가 누가 있을까? 없다. 나라도 이 믿지 못할 남편이라는 인간이 실망스러워 이런 남자와 앞으로 한평생을 사느니 이혼?이라는 것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 같다.  


그러나 분노로 흥분된 마음을 살짝 가라앉히고 로라라는 인물을 한 번 더 짚어 봐야할 것만 같다. 무작정 로라 편만을 들어서도 아니 되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무분별하게 로라 편을 들며 여성만의 권익과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해 또 다른 성의 평등을 깨는 자가당착적인 일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페미니즘이 과하게 작용해 또 다른 성의 불평등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점도 있고,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여성이든 남성이든 타인을 사랑함에 있어서 우월한 종자는 없다는 내 나름대로 내린 인생철학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로라의 남편을 저질 인간으로 취급하는 데에 아무 무리가 없다고 치자. 그렇다고 로라를 마냥 감싸주고 용납해 줄 수 있는 근거는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을 엄밀히 제거하고도)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두어야 할까? 로라가 남편보다 좀 더 괜찮은 배우자였다 내지는 그녀의 사랑이란 최소한 남편의 것보단 조금 더 고귀했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남는다.


로라가 정말로 고귀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했다고, 그래서 남편은 지탄받아 마땅하고 로라는 칭송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하기에 왠지 자신이 없다. 로라는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노라고 장담하지만, 바로 그 말을 하고 그녀는 남편을 박차고 자신의 갈 길을 찾아 떠난다. 떠났기 때문에 (물론 이 소설의 페미니즘적 핵심은 집을 떠난 로라에 있지만), 그녀나 남편이나 자신이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믿어왔던 사랑이라는 것이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이 말만 번지르르한 허상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한쪽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사랑할 정도로 고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내게는 짙다. 로라의 남편도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된 편지를 읽게 되기까진 로라를 자기 나름대로는 (돈이라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사랑하지 않았던가? 로라도 그런 남편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고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모두 무탈할 것이라고 믿어왔었고. 8년간 남편 몰래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 보려고 했다는 점이 그녀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남편보다 우월하다는 충분한 입증이 될까 싶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기가 어렵다.  


남편은 로라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서의 아내의 상이 있었고 그것이 깨어졌을 때 로라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똑같이 로라도 남편에게 자신이 원하는 남편의 상을(너그럽게 모든 걸 책임져 줄) 기대했었고, 그 확신에 금이 갔을 때 남편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둘이 서로를 사랑함에 별로 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론 남편이 좀 더 고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지만), 남편이나 로라 이 둘 모두의 사랑은 불완전했다고 본다. 인형처럼 자기가 원하는 모습만을 아내에게 바랐던 남성 중심적인 남편이나,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켜 줄 거라 믿었던 여성 중심적인 아내나 불행한 결혼을 이끈 점에서 둘 다 유죄라고 본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럼 어떤 결혼이 행복한 결혼이냐? 배우자의 사랑이 나의 행복을 전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답하고 싶다. 물론 배우자의 사랑 없이 내가 행복할 수는 없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게 풀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한 사람들이 만나면 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고 혼자로도 충분히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다. 넉넉하고 여유가 있는 자들. 왜? 이미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자신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갖고 고민해 보았기 때문에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있다. 그런 사람 둘이 만나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을 쌓아갈 때 진정한 행복한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결혼 생활과 동시에 각자의 삶을 사는 것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결혼은 마이너스 통장의 (돈 이야기가 아님!) 두 사람이 만나는 것보다 플러스 통장의 두 사람이 만나야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결점 사람만 결혼을 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결점이 최소한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결혼 전에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비록 다소 늦은 감이 없지만, 소설 속 로라는 자신을 찾아 떠난다. 결혼해서 자신을 인형처럼 만들어 연기해 봤지만, 그것으로는 남편의 사랑도 얻지 못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었다. 오직 나 자신의 한계와 배우자의 한계만 눈으로 확인하게 될 뿐. 남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는 본인이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진리 때문일까? 타인이 만든 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으로는 진정한 삶이 아닐테니까.


못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최소한 덜 파괴적이고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지 못할 배우자라면, 혼자 사는 것이 그나마 덜 거짓된 인생을 사는 것일 게다. 그러다가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운 좋게 만난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나도 나를 사랑하고 그런 나를 또 사랑해주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니 이중으로 행복할 수밖에.


“양쪽 모두가 온전히 자유로워야 해요”라고 외쳤던 로라의 마지막 말이 꼭 여성에게만 속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먼저 되어야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내와 남편을 떠나서 먼저 개인으로서의 나를 정립시키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그것이 정립되기도 전에 결혼하면, 타인의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만들어 나가는 인형이 되어 로라가 저지른 실수를 범하게도 된다. 어느 정도 눈가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라처럼 결국 파국을 맡기 쉽다.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사랑하지 못하는데 남이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설령 사랑할 수 있다 치자. 모래 위에 지은 누각에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잔잔한 바람에는 무사할지 모르지만, 위기와 어려움이라는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우리 자신의 행복은 결국 우리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만들어 나가야 함을 잊지 말자.


결혼 적령기의 젊은 남녀들이여, 로라의 충언을 소홀히 듣지 말라. 결혼은 나 자신을 누군가의 타입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지 않으며, 타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착취하라고 존재하는 제도도 아니다. 내가 먼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결혼 전에 반드시 선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못한 사람이 타인과 함께 살겠다고 무작정 살림을 차린다고 해서 그 인생이 행복해지기는커녕 잘살고 있던 사람마저 함께 진흙탕으로 인도하는 꼴이 될지 모른다. 결혼을 서두르기 전에 우리는 좀 더 나에 대해 똑똑해지면 좋겠다. 로라와 함께 나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먼저 떠나길 권한다.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로라처럼 집을 나가라고 권하고 싶진 않다. 내가 결혼 카운셀러도 아닌데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으랴먄, 로라처럼 집을 나가는 것만이 대책은 아닐 것이다. 집 안이던 집 밖이던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역시나 우선은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이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타인과 살아가는 지름길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것이 없지 않을까? 자아 찾기가 시급하고도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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