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특이한 소설이다. 제목만 보고 골랐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주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이어서 더 끌렸다. 바로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떤 생각과 상념들이 떠오를까 늘 궁금했었으니까. 소설의 내용이 은유적 표현으로 그치지 않을까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제목의 유혹이 너무 강렬해 결국 집어 들게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에 끌렸을 뿐. 그렇다고 내가 제임스 조이스를 아느냐? 앞으로 알고 싶은 작가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마르셸 프루스트와 종종 같이 회자되어 좋은 느낌이 많이 남았던 작가였으니까. 좋아하는 친구의 친구라면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막연히 좋은 감정처럼. 아무튼 그렇게 읽게 된 책이었는데, 새로운 창작 기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연히 만난 선택 치고 매우 만족스럽다.
이 소설은 무려 59개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마다 내레이션을 맡은 주인공의 이름이 나온다. 처음엔 장의 제목이 주인공의 이름인지(예를 들어 ‘달’) 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남편인지 아내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무척 헷갈렸다. 서로 다른 총 15명의 사람이 각 장마다 자기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펼쳐 내고 있다. 총체적인 구성을 만들어가느라 읽는데 좀 더 많은 시간과 집중이 필요했던 것 같다.
중반쯤 지나면 제목에서 시사한 그 죽음의 주인공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 뒤부터 어머니 애디를 관에 넣고 그녀가 묻히기를 원했던 고향 땅을 향해 40마일이라는 긴 여정을 온 가족이 함께 떠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때부터 가족의 파란만장한 모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30년도 미국 남부 (아마도 작가의 고향인 미시시피주의 어느 마을) 지역을 무대라고 상상하면서 읽으면 조금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마차에 관을 싣고, 노새를 빌려, 물이 분 강물을 위험스럽게 건너는 장면과 헛간에서 온 가족이 밤을 지새우고, 방화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간신히 구제해 내는 모험도 겪는다. 9일간의 고달픈 여정을 이어가는 모습은 1930년대라고 하지만 무척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낯선 풍경으로 치자면, 엄마의 시신을 넣은 (그것도 염을 하지 않은 시신) 관을 싣고 한여름에 떠난 가족의 여정이란 것이 이미 엽기적이다 못해 사이코 가족극을 보는 것 같이 비현실적이다. 이 가족 구성원들은 다 무언가에 홀린 게 아닐까? 30년대 남부지역의 가난한 가정의 풍경이 이렇게 비참했을까? 도대체 이 가족은 왜 이런 무리한 일을 진행하려고 하는 걸까?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죽은 엄마를 그녀의 고향으로 되돌리는 일이 아무리 엄마가 원했던 일이라 해도, 그렇게 온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역경을 거치며 이뤄야만 하는 일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특히 남편이자 이 가정의 가장인 앤스라는 인물은 과연 아내 애디를 얼마큼 사랑했기에 이 무모한 시도를 온 가족을 데리고 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내를 향한 사랑이었을까 싶다가도, 아내를 고향 땅에 묻자마자 새 아내를 맞이하는 걸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새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억지 고행이었거나, 아내를 진정 사랑하지 못했던 자성에 따른 행동이거나, 최소한 지키고 싶었던 양심의 발로였다고 믿는 것이 더 타당하면 타당해 보일 뿐.
신기하게도 이 가정의 자식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애디와 앤스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첫아들 캐시, 둘째 아들 달, 셋째 주얼 (이 아이는 교회 목사와 낳은 불륜의 자식인데 목사와 엄마 애디만 빼고 가족 중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딸 듀이 델 그리고 어린 아들 막내 바더만이 나온다. 각각의 아들들 특징이 있는데, 가장 관심을 가게 만든 아들은 아무래도 주얼이라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긴 여정 중 엄마의 관이 두 번이나 잃을 위기를 맞이했을 때 두 번 모두 필사적으로 물과 불에 뛰어들어 관을 구출해 낸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난 좀 더 이 인물로 인한 가족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상상했었는데, 딱히 스토리가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살아생전에 못다 했던 엄마를 향한 끈끈한 사랑이 묵직하게 느껴질 뿐.
맏아들 캐시는 여정 중에 다리를 다쳐 부상을 당해 걷지 못하고 엄마의 관 위에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된다.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다리는 점점 몹쓸 상태가 되어 고통이 심했을 텐데도 맏아들답게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낸다. 시멘트로 부목을 만들어 다리를 더 상하게 한 가족들에게 원망 한마디도 없이 말이다. 둘째 아들 달은 하룻밤 관을 보관해 두었던 헛간에 불을 지른 방화범으로 발각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어린 아들 바더만은 엄마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유일한 딸 듀이 델은 누구의 아이인지 뱃속에 임신한 아이를 낙태하려고 여정 중 어렵게 약을 구하러 다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약 사려고 모아둔 딸의 돈을 가로채 자신의 새 의치를 장만하는 염치없음을 드러낸다.
이 모든 코미디와 비극이 어머니 애디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일어난다. 애디는 죽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관찰할 수 없었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는 마치 엄마 애디가 시종일관 관 속에 누워 가족들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 속 엄마가 독백했던 “살아 있는 이유는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그 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같이 삶에 가장 고독하고 슬프고 처참한 순간이 또 있을까? 인간에게 죽음을 목격하는 그 순간만큼 공포스러운 순간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죽음이든 가족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에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매여 있을 새가 없다. 다들 자기 일과 고민으로 살기 바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남몰래 연정을 나눈 사람 사이에도 한쪽이 맞이한 죽음에 다른 쪽이 갖는 죽은 자를 위한 추모는 실망스럽도록 희박하다. 엄마 애디와 연정을 나눈 휘트필드 목사의 내레이션은 딱 한 번 고작 2장의 페이지에 걸쳐 나오는데, 애디의 집으로 향하면서 고민하는 그의 내용이 인간적이다 못해 너무나 비열하기 짝이 없다. 직업이 목사라서 더 비열해 보인다. 역시나 직업이 목사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가 휘트필드 목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누구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과오를 용서받는 것만이 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그나마 하나님의 권면으로 여인의 남편 애디에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라고 종용받지만, 자백하기 전에 이미 여인이 죽은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를 이미 받은 거라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과오에 용서를 받는 것으로 속 편하게 마무리 짓는다.
목사가 이 정도로 비열하고 속물인데 나머지 인간들은 한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어떻게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까? 소수의 그렇지 않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물론 이 땅에 존재하겠지만, 대부분 가족들은 별도리 없이 비열한 인간이 되어 인간적이기를 자처하지 않을까 싶다. 다들 자기 삶의 고민과 문제에 빠져 다른 사람의 죽은 시신이야 어떻게 누워있든 아무리 상관해 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다. 과거와 현실만큼 하늘과 땅만큼 그 간극이 크기 때문에. 그렇다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니 어찌 가족이 저럴까 하는 말 따위는 할 필요 없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다 죽은 자를 걱정하는 것보단 산 자의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독하게 현실적인 생의 숙명이라면 숙명인 셈이니까.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59개의 독백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런 각각의 삶에 초점을 맞춰 죽음에 대비되는 치열한 삶의 비애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취가 풍기는 관을 9일 동안 마차에 끌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누비며 엄마의 고향 땅에 다다르는 그 가족에게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차가 닿는 곳마다 동네 사람들은 썩은 시체에서 나는 악취로 빨리 동네 밖으로 나가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가족들만은 처연하게 대처한다. 냄새가 난다는 불평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린 바더만조차도 이건 엄마의 냄새가 아니라고 부정할 뿐 투정 부리지 않는다.
가족이라서 악취라도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9일 정도의 악취는 거뜬히 견뎌낼 수 있는 게 그나마 가족일 것이다. 심지어 냄새나는 관 위에 누워 자신의 부러진 다리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뱃속의 아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그로 인해 온 정신이 고통받고 피폐되어 말라가고 있을지라도. 그동안 이빨이 없어 먹고 싶은 것도 맘껏 먹지 못하며 오랜 세월을 버텨 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거지 같은 가족이라는 끄나풀에 매여 제 맘대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 살고 싶어도 그렇게 감행하지 못하면서도. 엄마 때문에 방화범이 되어 감옥행이 될지라도 그 정도의 악취는 가족이기에 감당해야 한다. 아무리 내 삶을 찾아 비열해지고 싶어도 이 정도의 고통은 가족이기에, 엄마가 죽어 누워 있기 때문에, 거뜬히 참아줘야 한다. 그리고 참아낸다. 비록 그다음 날 새 아내를 맞이할망정.
죽어 누워 있던 엄마가 그들을 보며 오래전에 준비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하루하루 저마다의 비밀과 이기적인 생각, 서로 낯선 피를 가진 아이들을 마주 대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난 이런 생각을 심어 놓은 아버지가 미웠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사는 것도 힘들도 죽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분명한 건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 여러 개의 점으로 이어진 한 선상에 공존하는 시작과 끝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도 있다는 어정쩡하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문장은 없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