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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Dec 26. 2017

대수롭지 않은 주홍 글자

<주홍 글자> 너새니얼 호손

이 책을 읽기 전에 <주홍 글자>에 대해 안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자. 간음죄를 상징하는 주홍 글자 A를 가슴에 달고 치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쩐지 간음한 여인의 소설 속 묘사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 보이기까지 해 이야기 초반에서부터 이상한 감이 오기 시작했다. 청교도 사회의 모든 주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신실하고 젊은 목사의 위선적 삶에 초점을 맞춰 읽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더 맞을 것이다. 



이 책은 묻는다. 비록 간음을 상징하는 수치와 모멸감의 주홍 글자 A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긴 하지만 자신의 죄를 만인 앞에 내려놓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해나가는 여인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겉으로는 권위와 존경을 받는 목사이지만 가슴속에는 불처럼 뜨거운 죄인의 화인을 맞아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질문 하나를 덧붙여 본다. 당신은 복수를 갚기 위해 타인의 죄를 정죄하는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 더. 당신의 죄가 당신을 더 고귀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면? 


죄는 다양하고 각각 그 결이 다르다. 간음은 십계명에서조차 분명하게 기록된 죄다. 소설 속에서는 여인이 저지른 간음죄가 온 세상에 공개된다. 반면 똑같이 죄를 짓고도 알려지지 않아 자신과 남을 속이며 내 안에만 존재하는 은폐된 죄도 있다. 은폐된 죄에는 죄 그 자체에 더불어 은닉한 죄까지 두 가지의 죄가 함께 공존한다. 딱히 죄라고 규명하기 어려운 죄도 있다. 계명이나 율법에서 제시되지 않아 죄로 인식되지 않지만, 타인을 정죄해 고통스럽게 만드는 죄가 있다. 타인의 신체를 상해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남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도 분명 죄가 되리라. 아무도 모르는 내면의 죄. 직접 자신의 손을 더럽혀 죄를 짓지는 않지만, 정죄의 무게가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일까? 질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살인? 도적질? 간음? 소설에 나온 죄악 세 가지를 굳이 비교해 보자면,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여인이 간음을 하거나 목사가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죄를 죄로 모르고 남을 정죄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간음은 죄 중의 죄다. 지은 죄를 감추고 자백하지 않는 것도 크나큰 죄다. 하지만 남을 정죄하는 일은 이 두 가지 죄와는 그 결이 다르다. 인간의 속성 중에 더 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간음이 자신의 욕구를 이기지 못해 죄에 빠지는 거라면, 나쁘긴 하나 연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누군가의 죄를 약점 잡고, 작정하고 사악한 인간의 길을 걷는다면 그 속에 인간적인 모습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로부터 동정조차 받기 어렵다. 많은 경우 정죄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처참하게 무너뜨린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정죄하는 자신을 타인에게 꼭꼭 숨겨 가면서 한다면 이건 보이지 않는 살인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소설 속에서도 목사는 의사의 정죄로 인해 서서히 영혼이 말라가며 결국 죽음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 물론 아내의 간음 때문에 받았을 남편의 상처를 간과할 수는 없다. 아내의 간음이 없었다면 남편의 복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누구의 죄가 더 크고 작음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죄의 크고 작음보단 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배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죄에 반응하는 방식도 제각기 다르다. 


간음한 여인 헤스터는 비록 죄인으로 가슴에 주홍 글자를 달고 살았어야 했지만, 자신의 죄가 백일천하에 모두 알려지고 나니 되레 자유로운 몸이 되어 새 삶을 산다. 그녀의 주홍 글자 A가 더 이상 치욕의 상징이 아닌 Angel과 Able을 상징하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좋게 인식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면 이 사실을 숨기고 위선적인 목회자의 삶을 사는 딤스데일 목사는 남몰래 가슴에 숨겨 둔 주홍글자로 인해 점점 더 자신이 판 죄의 심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어 피폐한 폐인의 길을 걸어간다. 결국, 그는 만인 앞에 자신의 죄를 만천하에 자백하지 않고는 죄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지 못했다.


죄란 그런 속성의 것인가 보다. 낱낱이 고백하고 하늘 아래 드러내야 씨를 말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죄일수록 숨기고 살기가 더 힘들다. 목사는 마침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자백하고 나서야 마지막 평안을 얻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최후를 맞는다. 비록 죽었지만, 목사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여인이 죄에서 일찌감치 해방된 삶을 살았다면, 목사는 죽음 앞에 가서야 간신히 얽매고 있던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나마 이 둘은 죄의 문제를 삶 속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해결했다. 죄의 해결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죄는 여인과 목사에게 새로운 경지의 삶을 경험하게 해 준다. 간음한 여인에게는 겸허한 죄인의 마음으로 천사와 같은 선행을 하게 하고, 목사에게는 죄로 인해 나약한 인간이 짓는 죄에 대한 설교를 그 누구보다도 공감 있게 전할 수 있는 훌륭한 설교자로 만들어 준다. 죄로 인해 저들의 삶이 좀 더 진실해질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둘은 아이러니하게 들리긴 하지만, 지은 죄로 인해 성장하고 배운 것도 많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죄를 통해서만 참다운 인간이 되어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끝까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여인의 남편이자 이 사실을 숨기고 일부러 목사에게 접근하게 된 의사일 것이다. 그는 복수할 마음으로 목사에게 접근해 은밀하게 그를 정죄해 나간다. 십계명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목사와 아내를 정죄하는 죄 속에 자신이 노예가 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간음한 두 인물보다도, 그가 가장 불행한 인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이 죄인인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죄의 가장 지독한 지배 가운데 살았던 인물. 죄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이유도 모른다. 그것은 죄 그 자체였으니까. 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죄를 죄인 줄 모르는 것이 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이 인물을 통해 느끼게 된다. 


청교도 시절 계율과 계명에 의존해 사람들을 평가하던 그 시절에 작가가 진정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엄격한 계율과 그에 따른 죄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이 얼마나 우리 삶에 필요한지 그것을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닌가 싶다.   


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목사라도. 의사라도. 청교도적 삶을 따르는 그 누구에게도. 죄를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죄를 인정하고 그것이 내 안에 자라지 않도록 뿌리를 제거하는 것만큼 좋은 확실한 방법은 없다. 간음한 여인 헤스터를 보라. 비록 처형대에서 죄인으로 서게 되었지만, 그녀는 천사에 가까운 존재로 주홍 글자를 치욕에서 칭찬으로 바꿔 간다. 그럴 수 있었던 길은 그녀가 죄를 인정했고, 만천하 만민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거름이 되어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걷게 된다. 죄는 빛 가운데로 끌어내야 죽일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가슴 깊숙이 숨겨 두면 둘수록 죄는 어둠을 먹고 자라는 속성이 있다. 어둠을 죽이는 길은 오직 빛으로밖에 가능하지 않다. 인간 스스로는 죄를 해결하기에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 위선적이며 기만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목사조차도 자신의 죄를 다루지 못한다. 감춰둔 죄가 자신을 더욱 옭아맬 뿐이다. 그가 좀 더 빨리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차라리 위선으로 가득한 목사의 옷을 벗었더라면 헤스터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소소한 기쁨이라도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죄를 가리느라 자신의 젊은 시절을 모두 탕진해 버린 목사의 삶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죄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죄 없이 살아가야 할 목사라는 인간에게도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면서. 


그렇다. 인간 스스로는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겠지만, 기독교 교리에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탁월하다고 본다. 기왕 죄의 이야기를 했으니, 소설의 내용을 살짝 넘어서 죄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보면 어떨까? 기독교에서는 절대자의 은총만이 인간의 죄를 구원한다. 인간이 구원에 하는 역할은 없다. 있다고 치더라도 매우 작다. 믿음이라는 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다시 말하면,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 성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은혜로 거저 주워진다. 아무개 A는 세상에서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으니 그에게는 금메달에 해당하는 구원이 주어지고, 아무개 B는 제멋대로 살았으니 메달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식의 세상적 심판과 판단이 기독교 구원의 원리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기독교가 죄를 다루는 가장 매력적이고도 명쾌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평등과 공평이 은혜와 자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의 구원 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노력의 대가가 아닌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이 훨씬 더 평등하고 전 인류적으로 공평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원이라는 것이 힘세고 잘나고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라면 그것처럼 불공평한 것 또한 없을 것이다.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은혜에 기반을 둔 기독교 구원의 원리가 가장 공평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인간들 간에 구원을 위해 스펙을 쌓고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그것이 가장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의 삶만으로도 불공평한 것이 많은데, 다른 생에서마저 불공평해서야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크고 작든 우리는 모두 죄를 짓고 사는 인간이고, 인간의 가장 큰 결점이란 그 죄성에 있음을 인정한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중요한 핵심 원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는 자라면 나는 무결점 무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되는 인간에게 구원자의 해결이 필요한데, 구원자는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원하는 자 모두에게 선물로 거저 준다. 이것보다 더 값진 선물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받아 마땅한 선물보다는 받을 이유가 없는데 받은 선물이 더 고마운 법처럼.


어떤 이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도 여인의 남편이었던 의사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가 펼친 복수의 죄가 가장 야비해 보이지만. 그래서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일지 모르겠다. 남의 눈엣가시만 보이고 내 눈의 들보는 전혀 볼 수 없는 이들. 계명만 잘 지키면 자신은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 같은 계명에 쩐 사람들. 삶을 무슨 계명 잘 지키기의 시합처럼 생각했던 사람들. 그래서 자신과 같지 않은 죄 많은 인간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이 각박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겐 의원이 필요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만찾아왔던 것일까? 목사도 여인도 여인의 남편도 모두 다 똑같은 죄인이지만, 가장 의미 없는 삶을 살았고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는 여인의 남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무시무시하게 생각해 왔던 주홍 글자가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우리 모두에겐 치욕적인 과거도 아름다운 천사로의 변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주홍 글자를 정면 대면하고 앞으로 그 의미를 다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정신과 의지만 남아 있다면. 거기다 신의 은총까지 더해진다면, 가는 길이 훨씬 더 밝겠다. 


오랜만에 시애틀에 눈이 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행운을 얻었다. 주홍 글자처럼 더럽고 추한 것을 하얗게 모두 감싸 버렸다. 인생은 하나의 귀중한 선물 같다. 생명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하얀 백지를 꺼내 다시 살아 볼 시간의 선물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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