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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Oct 17. 2017

#10.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And Beyond...

어제 들었던 일기예보는 오늘 10월의 햇살을 꼭 인조이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내일부터 주말까지 비가 며칠간 계속될 것이라고. 어제 일기예보가 마치 예언처럼 오늘의 내 운명을 결정짓는다. 마침 허리도 많이 안 좋고 해서 과감히 병가를 냈다. 하루가 다르게 색깔이 짙어져 가는 단풍구경을 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오후 2시가 되도록 오전 내내 책 읽기와 낮잠을 번갈아 가며 시간을 보냈다.

 

햇살에 이끌려 집 밖으로 무작정 나왔다. 가방엔 다 끝내지 못한 책을 넣었다. 걷다가 지쳐 커피점에 들어 조용히 남은 분량을 읽어낼 참이었다. 문을 나오자 순간 어디로 갈까 막막해진다. 집에서 북쪽인 반 고흐 카페로 갈까, 남쪽인 스타벅스로 갈까, 이왕 나온 김에 그린 레이크 주위를 오랜만에 걸어볼까, 아니야 유빌리지가 좋겠어.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몰라 차를 탈까 말까 집 앞 드라이브 웨이에서 정말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낯선 사람처럼 반복했다. 월요일 한낮에 수상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동네 누가 볼까 봐 발걸음을 익숙한 곳으로 서둘러 옮겼다. 일단 동네 슈퍼가 있는 쪽으로. 스타벅스까지를 나의 종점으로 삼기로 한다. 평소에 잘 걷지 않는 내게는 여간해서 의욕이 넘치는 날이 아니면 택하지 않는 장거리 코스다. 왼쪽 이마로 햇빛이 자꾸 부딪쳐 왔다. 따가웠지만 비타민 D를 섭취하라고 했던 일기예보 아나운서의 말에 충실한 나 자신을 목격하며 나 말고 오늘 일정을 바꾼 방청자들이 몇이나 더 있을까 궁금해졌다.

 

스타벅스에 도착해 늘 즐겨 마시는 커피를 시켰다. 앉을자리가 없어 밖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이곳 스타벅스에 와서 야외 의자에 앉아 커피를 혼자 여유롭게 즐겨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도 이렇게 화창한 가을날에 말이다. 마냥 그곳에 더 앉아 있고 싶었지만, 많이 걸어온 것도 있고 읽다 만 소설의 내용도 궁금해서 어딘가 실내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자리를 일어섰다.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면 빵집 겸 카페가 나온다. 마주한 곳에는 도넛 숍이 있다. 도넛 숍에 사람이 많지 않으면 달달한 도넛 하나 먹으면서 실내장식이 이쁜 그곳에 앉아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교 시간인지 어린아이들이 저마다 엄마 손을 잡고 도넛 숍에 줄지어 있다. 여기는 안 될 것 같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동네 도서관이 나온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갔던 적이 언제였던가? 도서관은 내가 걸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최종 마지노선과 같다. 이보다 더 멀리 가는 건 무리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때 고생이니까. 도서관에 가기로 마음먹는 순간 도서관으로 출근을 안 한 내가 마을 도서관에 가고 있는 이 상황이 무슨 마법에 걸린 아닐까 의심스럽다.


 

아이들과 자주 찾았던 도서관. 3살 때 아이들을 데리고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 쭉 다녔던 마을 도서관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자주 방문했던 마을 도서관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좋아하던 시절 이 도서관의 그림책을 책장을 쓸 듯 담아오곤 했었다. 큰 가방 두세 개 가득히 책을 빌려오면 아이들은 형형색색의 그림책을 무슨 별세계를 만난 듯 열심히도 뒤적거렸다. 유난히 동물 그림들을 좋아했던 아이들이 책을 통해 하늘과 땅과 바다의 동물들 이름을 하나씩 익혀 가며 글자에 서서히 눈을 떠 갔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으며 라이온, 피그, 펭귄 등 온갖 동물들의 이름을 어설프게 발음하던 그 조그만 입술, 그리고 동물들 이름을 부르며 얼굴 가득 환하게 퍼지던 아이들의 미소.

 

하루에도 몇 시간씩 아이들은 그림책을 들고 와서는 책을 읽어 달라고 졸랐다. 직장 일로 몸은 파김치가 된 저녁이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씻겼다. 책 읽는 아이들은 그 당시 내가 누리던 가장 자랑할 만한 기쁨이 아니었을까 싶다. 양옆에 아이들 하나씩을 끼고 목이 쉬어라 그림책을 읽던 시절. 그림책을 읽다가 그림이 없는 챕터 북을 읽어주던 감격. 아이들이 떠듬떠듬 혼자서 글을 읽어가던 기억. 책 내용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던 호기심 가득 찬 두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책 한 권이 끝나기 무섭게 서로 다음 책을 읽어 달라고 떼쓰던 아이들에게 인제 그만 읽자고 엄살을 부리며 감출 수 없는 행복에 몸부림치던 그 시절. 아이들이 책을 좋아해 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려서 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그 뒤로 아이들은 반스 앤 노블의 책장을 하나씩 점령해 갔고, 시리즈로 나오는 책의 출간을 기다렸다가 첫날 하드카피의 책을 사들고 오는 날은 아이와 내가 전장의 용사라도 된 기분에 빠지게 했다. 소소하나 결코 소소하다고 치부할 수 없던 완벽한 기쁨. 아이들은 차 안에서도 두꺼운 책을 그렇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읽었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하던 나의 기억들. 

 

책을 빌리고 반납하고 하느라 이 마을 도서관을 정말 자주 드나들었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 바닥에 널브러져 책을 읽을 때도 많았으니까. 그런 추억이 되살아나는 도서관에 들어섰다. 한동안 오지 못한 사이 풍경이 조금 바뀌었다. 도서관에는 안락한 의자들이 더 많이 들어섰고 도서관 사서가 앉아 있던 인포데스크는 더 많은 컴퓨터를 수용할 수 있는 책상으로 대치되어 있었다. 안쪽 깊숙이 책을 읽기에 편한 조용한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뒤쪽에 위치한 그룹 스터디 룸을 지나쳤다. 유리로 된 작은 방이었다. 여기를 지나칠 때마다 아이와 이곳에 들어와서 진지하게 나눴던 그때 그 이야기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이가 3학년 정도 되었을까? 바이올린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폭탄선언을 한 아이와 나는 무슨 연유인지 이곳에 오게 되었었다. 아이는 눈물을 보이면서까지 바이올린을 하지 않겠다고 우격다짐했고, 나는 그런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달래보고자 대화를 시도했다. 3학년 아이와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믿었을까? 나는 이 유리방으로 아이를 조용히 불렀다. 왜 도서관이었고, 왜 이 유리방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 아이와 나는 단둘이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너 정말 바이올린 그만둘 거야? 응. 선생님이 너는 바이올린을 아주 잘 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만하고 싶어? 응. 나 바이올린 싫어. 왜? 연습하기 싫어. 연습 많이 하지도 안잖아. 그래도 싫어. 하기 싫어 그냥. 그래? 그러면 연습 조금만 해도 좋으니 계속하면 어떨까? 싫어. 너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는데? 후회 안 해. 엄마도 후회했었어. 바이올린 더 할걸 하고 말이야.

그렇게 옥신각신 하는 사이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변해갔고 하기 싫다는 호소는 여간해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바이올린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중도에 포기했던 나 자신이 후회스러워서 아이에게 더 집착했던 것 같다. 어떻게 아이를 설득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아이의 동의를 끝끝내 얻어냈다.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바이올린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았다고 믿고 싶지만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한 번 생떼를 부려본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말 하기 싫었는데 엄마의 집요한 호소에 아이의 마음이 약해졌을까. 

 

어쨌든 나는 아들의 동의를 가까스로 얻어 낸 후에 아들에게 뭔가 큰 뇌물을 바쳤던 것 같고 그렇게 해서 아이의 마음을 완전히 되돌릴 수 있었다. 아이가 12학년 때까지 바이올린으로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날 아이를 설득한 성공의 결과라고 나는 자부한다. 도서관의 이 유리방이 그 현장에 나와 같이 있었다. 노란색 폴라 티셔츠에 남색 줄무늬가 가로로 들어갔던 옷을 입고 있던 아이. 그 셔츠를 입고 있던 아이가 얼마나 대견해 보였던지 모른다. 엄마의 강요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간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아이와의 어떤 논쟁에서도 나는 이기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나의 마지막 승리의 순간이 바로 이 도서관 이 장소에서 끝이 날 줄은 나조차도 그때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추억이 가득한 도서관을 나오면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그림책 코너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아이들 곁에서 책을 읽어 주는 젊은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길 가에 차를 대기한 채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도 보였다. 나도 저렇게 차 안에 앉아서 아이들이 나오기를 얼마나 많이 기다렸던가. 바이올린 레슨에서 학원 레슨에서 스포츠 경기에서 한글학교에서 교회에서 SAT 시험장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차 속에서 아이들을 기다렸었다. 때로는 그 시간에 시장을 보고 백화점에 다녀오고 책을 읽거나 볼일을 틈틈이 보면서. 그래도 항상 차 안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들은 해가 가도 줄어들 줄 몰랐고, 내 시간의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이제는 차 안에서 더 이상 아이들을 기다리며 보내지 않는다. 뒷좌석에 아이들을 태우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퀴퀴한 냄새 때문에 차 창문을 내리고 더 이상 환기시키는 일도 없다. 달리는 차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운전대를 잡고서 아이들에게 퍼 부었어야 해했던가. 백미러로 아이들을 봐 가며 뿔난 엄마 역할을 여러 번 수도 없이 반복했어야 했다. 그 많던 울분과 분노와 훈계와 한숨이 이렇게 휘리릭 사라질 줄 모르고 말이다.

 

도서관을 나오면서 아이들이 많이 그리워졌다. 유난히 어렸을 적 아이들의 모습이 그립다. 오늘 같은 가을에는 하늘색 저지를 입고 무릎에 보호대를 장착하고 축구장에서 공을 열심히 차던 모습이 생각난다. 오늘 같은 가을에는 핼러윈 의상을 입고(아마도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였던 것 같다) 소파 위를 날아다니며 “And Beyond”를 외치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그립다.

 

그렇게 외치던 아이들이 정말 저 멀리 동부로 이제 날아가 버리고 없다. 저들만의 꿈을 찾아서. 가을의 파란 하늘을 보며 토이 스토리의 라인을 마음속으로 소리쳐 본다. “그래, To Infinity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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