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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Nov 01. 2017

#13.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아들 없이도, 엄마 없이도

주변에서 정말 많이들 묻는다. 아이 둘을 대학에 멀리 보내 놓고 적적하지 않냐고? 애들 보고 싶어서 어쩌냐? 애들 생각 때문에 힘들지 않냐? 지금은 괜찮아도 한 번씩 애들이 보고 싶어 훅하고 뭔가 가슴속에서 밀려올 때가 있을 거다 등등. 정말 많은 걱정과 우려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 분들께는 실망스러운 대답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별로 적적하지 않고 괜찮다. 아니 심지어 좀 편하고 지금 이 상태가 더 좋기도 하다. 그것보다 살짝 더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내게 이런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홀가분하다. 밥 안 하고 빨래 안 해서 정말 좋다. 잔소리 안 하니까 세상 편하다. 라이드 때문에 이리저리 운전사 노릇 안 해서 좋다. 남편과 오붓하게 지내는 시간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등등 내게는 긍정적인 변화가 훨씬 더 많다. 아이들에게 별로 집착하지 않는 나의 성격 탓인지 모르겠지만.

 

신기하면서도 다행인 것은 (누구는 우리를 푼수 부부라며 눈을 흘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만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게 아니라 남편도 비슷하다는 거다. 며칠 전에는 정말 궁금해서 진지하게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도 정말 애들 없이 지내는 지금의 라이프가 괜찮아?라고. 그랬더니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괜찮다는 대답이 흔쾌히 흘러나왔다. 일단 안심이다. 남편은 심지어 아이들이 없는 지금을 나보다 더 엔조이하는 것도 같아, 이 남자 나보다 강적이네? 하는 생각이 든다. 애들이 겨울 방학에 오는 것도 그다지 기다리는 눈치가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뭐 달라질 리 없겠지만, 남편도 분명 지금 이 kids-free의 자유시간을 마냥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애들이 없어서 심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애들이 없으니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맘대로 아무 때나 우리 단 두 사람 마음만 맞추면 될 일이다 보니 간편하고 심플한 라이프 스타일이 우리에게 딱 제격이다. 우리가 너무 부부 중심적으로 삶을 살고 있나?

 

맞다. 우리는 아이들이 있었을 때도 상당히 부부 중심적으로 살았다. 특히 한국 부모들이 자녀 중심으로 사는 것에 비교하면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집에 있었을 때도 우리 둘만의 시간을 자주 함께 보냈다. 음악회를 간다던가, 식사를 단둘이 하러 간다던가 아이들을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서도 둘만의 외출이나 시간을 종종 보내왔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집에서 빠져나가고 나서도 별로 크게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한다. 조금 더 부부간의 시간이 많아져서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여유를 부리게 된 긍정적 변화 외에는.     

 

남편과 최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앞으로 자기 앞가림 잘해서 혼자 먹고살 능력이 되어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독립적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자식 걱정으로 속을 태우지 않고 노년을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겠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그렸다. 매우 평범한 바람인데, 그렇지 못할까 봐 지금 누리고 있는 이런 평안함이 계속되지 못하고 아이들로 인해 곧 깨어져 버리면 어쩔까 걱정이 된다. 뭐 그렇게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자신이 하는 일이 있고 그걸로 먹고살 수 있고 가정을 꾸릴 여유만 된다면 부모로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부모인 우리의 나이가 좀 더 들게 되면, 자식을 위해 어려운 고민도 할 여력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고 (요새 정말 병원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 난생처음 ER를 다녀오질 않나), 이제는 좀 어려운 문제라면 심리적으로 많이 부대낀다. 몸과 마음이 옛날 같지 않은 거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아무리 자식 할아버지의 걱정이라 해도 감당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이제 아이가 감당해야 할 고민은 아이가 스스로 져 줬음 싶은 거다.

 

어느 소설가 엄마가 군대에 아들을 보내고 썼다는 편지를 모은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 책의 두세 편의 편지를 읽고 책을 덮었다. 작가와 공감하기보단 나는 도저히 작가와 같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종에도 한 가지 이상이 있는가 보다. 나는 절대로 이 엄마와는 다른 종류의 엄마인 것이 틀림없다. 이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어떤 싸움에서도 네게 원군이 있음을 잊지 마라. 사랑하는 만큼, 엄마도 더 강해질게.”나는 이 엄마의 마음을 발가락만큼도 따라 하기 힘들다.

 

대신 나의 아들을 향한 버전은 이렇다. “아들아, 제발 네 앞가림하는 아이가 되어다오. 엄마는 엄마 삶으로도 벅차단다. 엄마가 네가 줄 것은 이미 다 주었어. 이젠 네 힘으로 일어서야 해. 좀 힘들더라도 네 인생이니 네가 버텨 나가 주렴. 엄마에게 구원을 요청한다고 네 인생을 엄마가 바꿔줄 수는 없단다. 미안하다. 아들아.”

 

사실 그렇다. 나는 내 인생을 살기에도 벅차고 바쁘다. 내 삶 때문에 정신이 없다. 직장에서 해야 할 일도 많고, 집에 오면 내가 보내고 싶은 방식의 여가를 보내느라 하루가 쏜살같이 금세 지내 간다. 전에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떻게 이 모든 걸 병행했는지 벌써 내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아이들이 빠져나갔는데도 나는 아직 내 인생 때문에 허우적거린다. 살기에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아직 해야 할 것과 이뤄야 할 것이 많아서 말이다.

 

나와 평행선의 경주를 하는 유일한 내 인생의 동반자에는 내가 선택한 남편이 있다. 하지만 아들은 아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남편과는 함께 인생을 꾸리고 같이 모든 걸 고민하고 나누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아들과 나는 처음부터 파트너로 만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일이 엄마로서 내가 맡은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나니 이제 그 엄마의 역할은 어느 정도 일단락된 셈이다. 아들에겐 아들의 인생에 자기만의 파트너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그의 생을 함께 사는 게 아니고, 함께 살아도 아니 되니까. 내가 끼어들수록 아들의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는 자식과 함께할 미래의 동반자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한 몸이었다가 (특히 엄마의 경우) 점점 두 개의 객체로 성장해 나가야 할 운명을 갖고 태어난 건지 모르겠다. 서로 멀어져 갈수록 서로를 위해 더 나은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자식이 앞으로 부모 걱정시키지 않고 그냥 잘 알아서 자기 앞길을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바랄 것이 없겠노라고.

 

이런 생각을 하기엔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의 Kids-free 순간의 평온함을 깨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남은 생 동안 쭉 이어지길 소망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 삶으로 꼭꼭 들어찬 지금의 이 알찬 시간을 행여나 아들로 인해 방해받고 싶지 않다. 내가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걸까? 확실한 건, 내 인생이 너무 꽉 찬 느낌이라는 것. 아들 없이도 자식 없이도 내 인생만으로도 너무 꽉 찬 느낌이라는 거다.

 

아들아, 너도 네 인생의 항아리에 김칫국물 한 국자라도 더 담듯 그렇게 채워 보렴. 엄마 없이도, 아빠 없이도, 네 인생을 열심히 사느라 충만함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루고 생에 최선을 다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것이 네게 기쁨을 주고 즐겁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엄마는 너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할 거야. 우리 아들, 인생이 아주 멋진데? 하면서. 엄마를 잊도록 살아 보렴, 내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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