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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Nov 08. 2017

#14.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편애할지도 몰라

자부하건대 쌍둥이를 키우면서 나는 편애를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마음속으로는 쌍둥이 중 누구와 더 궁합이 맞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쌍둥이 아들을 개개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고자 꽤 노력했던 것 같다. 선물 받은 옷이 아니고는 절대 같은 옷을 똑같이 입히는 일이 없었고 장난감을 하나 사도 똑같은 걸 두 개 사서 각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맘 같아서는 아이들이 서로 옷을 나눠 입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우리 집 쌍둥이들은 양말 한 짝까지도 철저히 자기 것이 아니면 절대 신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간혹 속옷이 모자라 (빨래를 게을리한 내 탓으로) 네 브라더의 것을 입으라고 하면 질색을 하며 차라리 어제 입은 속옷을 주워 입는 아이들이었다. 장난감도 나눠서 가지고 놀면 좋을 것을 (지금 와서 생각하니 소유욕이 강한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이좋게 나눠 쓰라는 건 어불성설이었음) 자기 것이 아니면 안 되는 아이들인지라 똑같은 장난감을 두 벌로 사야 할지언정 각자의 것을 마련해 주는 데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쌍둥이를 똑같이 키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돌이켜 보면 쌍둥이는 여러 면에서 비경제적이다. 형이 아우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누릴 수 없는 환경이니까. 아이들은 누군가의 쓰던 물건을 물려받는 일이 없어서 좋았겠지만, 부모인 나에겐 쓸데없이 돈을 두 배로 낭비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불평하지 않도록 늘 똑같이 공평하게 공급해 주었다고 자부한다. 서로 시기하지 않고 엄마의 편애를 의심하지 못하도록. 두 아이 앞에서 한 아이만 싸고도는 일은 가능하면 하지 않았고, 야단을 칠 때도 두 아이를 모두 훈계하는 일로 입이 두 배로 아프기도 했다. 똑같은 이유로 한 아이가 특별히 잘한 일이 있어도 다른 아이의 주눅이 들을까 과하게 칭찬하거나 비교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임신 중에 읽었던 쌍둥이 육아 책을 읽은 탓도 있었지만, 성경의 영향이 가장 컸다. 특히 아이가 돌도 되기 전에 언니가 경고했던 에서와 야곱의 가정 이야기는 늘 내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부모의 편애로 인해 형제간에 불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편애를 피해 왔다. 편애랄 것도 없지만, 누구 하나 내 마음속에 정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식을 여럿 키워 본 부모라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은 없지만, 덜 아픈 자식은 있다는 것을. 난 항상 쌍둥이 중에 한 녀석과 살짝 더 케미가 있다고 믿었다. 이건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365일 똑같이 생긴 아이 둘을 마주하며 지내야 하는데 어찌 둘을 놓고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똑같이 생긴 붕어빵도 속에 하나는 팥이 들어 있고 하나는 크림이 들어있다면, 엄마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취향에 따라 더 좋아하는 붕어빵을 찾게 되지 않겠는가? 한 녀석과의 케미의 크기보단 다른 녀석과는 상극의 비중이 더 커서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케미였을망정. 아무튼, 영어 표현에도 Evil twin이 있듯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엄마를 살짝 더 힘들게 하는 쌍둥이는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한 녀석을 다른 녀석보다 더 사랑하거나 그랬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이 애와 더 말이 통한다, 내지는 덜 통한다의 정도? 그것도 아주 미세한 차이로. 어차피 우리 집 아들 두 녀석은 둘 다 나와 상극의 스펙트럼에 더 가까이 있다고 보는 게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둘 중의 하나가 그나마 조금 더 엄마 마음을 이해하거나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뭐 그런 낮은 수준의 케미를 말하고 있다는 것만 분명히 해 두자.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녀석과 길게 말싸움을 할 때였다. 엄마랑 대화가 되지 않는 부질없는 이야기에 길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녀석을 보다 못한 다른 한 녀석이 “야, 그냥 엄마한테 그렇다고 해. 쓸데없이 그런 얘기를 갖고 엄마랑 물고 늘어지냐? 멍청하게.” 뭐 이런 식이다. 일단은 엄마 편을 들어주는 것 같다. 가만히 듣고 보면 엄마를 더 무시하는 발언인 것이 틀림없지만. 일단 아이가 고집을 꺾고 엄마 편을 들라는 것에 나는 일단 마음이 동한다. 이 녀석이 나랑 케미가 맞는다는 녀석이다.


그 녀석이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둘 다 똑같이 매를 맞아야 할 때가 있었다. 나는 30센티 자를 가져와서 손바닥을 내밀라고 했고, 나랑 케미가 맞다는 녀석은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며 엄살을 피며 어떻게 해서든 매를 맞지 않으려고 손과 발을 싹싹 빌었다. 얼굴 표정에서도 엄마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내가 나쁜 엄마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걸 그 녀석은 엄마에게 보여줬던 거다. 반면, 다른 한 녀석은 두 손을 내밀며 때리려면 때려 봐 난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 하는 표정을 짓는다. 차라리 매를 맞을지언정 잘못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나를 대응했다. 엄마와 맞짱을 뜨겠다는 도전이다. 물론 그때 나는 엄마에게 도전하는 그 녀석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든 아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이렇게 다른 두 녀석이 사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케미고 뭐고 그런 게 언제 존재하기라고 했냐는 둥 사라져 둘 다 퉁퉁거리고 퉁명스러워졌다. 둘 다 엄마 말에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 무뚝뚝하고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남자아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중 한 녀석과 나는 새로운 화학반응을 일으키듯 전에 없던 케미를 느끼고 있다. 지금. 더 놀라운 건 그 녀석이 나와는 더 상극이라고 느꼈던 바로 ‘그 녀석’이라는 데에 있다.


고작 이 녀석과 내가 나누는 대화란 일주일에 한두 번 오가는 문자가 전부이긴 하지만, 시애틀과 필라델피아의 엄청난 거리를 뚫고 이 녀석의 문자가 내 마음에 다가와 살살 녹는다. 우리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잠깐, 여기서 절대 과한 오해를 막기 위해 우리의 문자 수준이 그 어떤 달달한 모자간의 끈끈한 수준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워낙 우리 사이가 무덤덤했다는 것을 이쯤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 두자.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들에게 내가 볼일이 있어 문자를 하거나 아니면 아들이 먼저 문자가 와서 내가 답변을 보내면, 이 녀석과는 문자 답신이 시냇물 흐르듯 원활하게 이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내가 문자를 끊지 않는 한 자기가 먼저 엄마 말의 허리를 뚝 끊지 않는다. 적어도 엄마의 질문에 계속해서 문자를 이어서 받아준다. 적어도 내가 bye now라는 말을 할 때까지. 아주 유치한 수준이지만, 내게는 어떤 스윗하트보다도 달콤하다. 이 녀석이 엄마의 문자를 내치지 않고(씹지 않고) 끝까지 인내심 있게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이유로 엄마의 문자를 무시할 수도 있는데, 고분고분 묻는 말에 조곤조곤 대답하고 있는 아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 내 입가에 미소가 배시시 생겨난다.

 

한 번은 어디 시내 구경을 가는 데 가도 되겠냐고 뜬금없이 물어왔다. 많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닌데 엄마에게 허락을 구하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런 것까지 물을까? 문자를 받은 내가 더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아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좋아진 기분에 꼬치꼬치 무슨 구경이며 누구랑 가며 어디서 하냐고 묻는 것을 자제하고, 가서 재밌게 놀다 오라고 기쁜 마음으로 문자를 날렸다. 그랬더니 바로 “I will thank you”라는 문자가 날아온다. 이런 문장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뚫어지라 노려봤다. 현재형 땡큐도 아니고 미래형 땡큐는 과연 어떤 의미인가? 여기 내가 미처 모르는 색다른 뜻이 있나? 간단한 문장이지만 정확한 아이의 의중을 간파하는데 살짝 혼동이 왔다. 그래, 지금 구경을 간 게 아니니 그때 가서 엄마에게 고마울 거야 뭐 이런 뜻이라고 믿고 가슴은 이미 뿌듯해졌다. 구경하러 가서 신나게 놀다가도 엄마를 생각하면 땡큐를 할 것 같은 아들의 대견한 얼굴을 내 멋대로 상상하면서. 다음 날 잘 구경 갔다 왔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친절하게도 비디오 클립을 몇 개 보내주었다. 아들이 직접 찍은 비디오 클립씩이나 받고 나니 아들이랑 무척 가까운 친구 사이라도 된 느낌이다. 그런 좋은 느낌 덕분인지 내가 보내는 문자에도 전에 없던 애정이 담겼다. 잔소리 안 하고 애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쿨한 엄마가 되는 게 참 흐뭇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으면서.

 

어쨌든 처음 느껴보는 아들과의 친밀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이제는 아들의 좋은 반응을 자꾸 끄집어내기 위해서라도 한 글자 한 문장도 신중하게 골라서 문자를 보내야 한다. 할 말 안 할 말을 가려가면서 가능하면 듣기 좋은 얘기만 하려고 노력하면서. 공부나 학교 이야기는 궁금해도 가능하면 참고 묻지 않는다. 이런 나 자신의 변화에 나도 신기할 정도이다. 진작 이런 태도로 아이를 대했으면 우리의 관계가 훨씬 더 녹록했을까?

 

최근에는 주말에 뭐 하고 지내냐고 물었다. 아들은 친구들과 축구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냥 “Nothing”이라고 엄마의 귀찮은 질문을 쉽게 봉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건 다른 녀석이 주로 하는 방법이다) 이야기를 술술 이어간다. 어찌나 고마운지 그 틈을 노려 시험 기간은 아닌지 시작한 전공과목은 어떤지까지 몽땅 물어낼 수 있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고분고분 답을 해 온다. 해부학이 재밌다며 수학을 안 해서 좋다는 등등.

 

내 아들이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아직도 매우 상대적 개념!) 친절하게 대화를 잘 나누는 아이인 줄은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 놀라우면서도 마음이 뿌듯해져 오는 게 이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할 것 같은 그래서 뒤늦게 편애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든다. 다른 녀석은 통 이렇게 대화를 나눌 줄 모르고, 늘 문자 한마디 제때에 제대로 도착해 오는 법이 없다. 똑같이 대학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원치 않는데 자꾸 비교하게 된다. 그러면서 몰랐던 아이의 성격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둘이 각각 떨어져 있으니 편애를 맘 놓고 해도 알 길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없지 않다.

 

아무튼, 아들의 상냥한 문자를 받은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마치 연인의 다정한 메시지라도 받은 것처럼. 남편에게 아들 문자를 받고 자랑을 했다. 아들이 나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문자를 해 왔다고. 아들의 다정한 말투 (아니 다정한 게 아니라 퉁명스러운 말투가 빠진 지극히 평범한 말투)에서 나는 아들의 연인이 되었다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의 상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녀석이 아빠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아. 아빠처럼 다정한 아이가 될지 몰라. 우리 쌍둥이 둘 중에 이 녀석과 결혼하는 미래의 며느님은 매우 현명한 거야 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나라면 다른 쌍둥이 녀석이 아닌 이 녀석을 고를 것이다. 얘가 진짜 진국인데 등등.. 나의 이 한 아들 녀석을 향한 사랑은 문자와 함께 오늘도 둥실둥실 한없이 부풀어만 간다.

 

이 순간 이런 나를 비웃는 엄마들도 좀 있으리라 사려된다. 얼마나 대화가 건조했던 사이였으면 이 엄마가 저리도 호들갑을 떨까 부디 불쌍한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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