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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an 22. 2018

#23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한국어로 시사 뉴스 읽기

오랜만에 육아일기를 다시 씁니다. 지난 몇 주간 육아 일기만이 아닌 일체의 다른 것도 쓰지 않고 지냈습니다.  쓰지 않음을 아무렇지 않아 함이 의아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쌍으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저에게는 무색하더군요. 안 읽고 안 써도 신기하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렇게 지내도 괜찮나 하는 불안감이 잠시 찾아왔을 뿐. 사실 한동안 글이란 것을 쓰지 말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면서 핸드폰에 <작가의 다이어리>라는 트위터처럼 짤막한 메모를 남기기 시작한 것도 쓸 수 없음과 쓰지 못함에 대한 토로를 어떻게 해서든 글로 쓰고(!)자한 강박관념 때문이었죠. 생각해 보면 쓸 거리가 없어서 쓰지 못한 것이 아닌데 이것도 그놈의 무서운 습관이란 녀석이 부리는 횡포가 아닌가 싶습니다. 습관이 나를 탁자에 앉히고, 습관이란 녀석이 자판을 두드리게 하는 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봅니다.  


오늘은 그래서 작정하고 자리에 먼저 앉았습니다. 앉으면 사라졌던 습관이 나를 찾아와 줄까 싶어서요. 퇴근하고 10분도 채 되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 노트북 앞에 앉습니다. 평소에는 퇴근 후에 바로 저녁을 준비하느라 부산한 시간입니다만, 아들 녀석이 다행히도 저녁을 좀 있다 먹겠다고 하기에 잠깐 잊고 있던 오래된 습관을 불러 봤습니다. 이렇게 쓰고(!) 있는 걸 보니 습관을 불러오는 데 일단 성공인가 봅니다.  


제 육아일기가 꼭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는 건 아니지만, 지난 편 이후로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겨울 방학을 보내고 이미 학교 기숙사로 되돌아갔고 지난주부터 새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족 모두 시댁에 다녀오기도 했고요. 다른 아들 녀석은 (한국에서 첫 학기를 곧 시작하게 될, 그러나 비자 문제로 인해 발이 꽁꽁 묶여 있는) 현재 집에서 저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3월 학기 전까지 마냥 놀 수만은 없어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적분 수학을 듣고 있고요. 쌍둥이가 아닌 외둥이 아들을 둔 집 안 분위기를 맛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요새 이 하나뿐인 아들과 처음으로 함께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머리털 나고 아이와 이런 일을 해 보기는 처음인데 궁금하시죠? 제가 가끔 신통방통한 아이디어를 제조할 때가 있거든요. 어느 날 불현듯 아이에게 한국에 대한 상식을 좀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19년이 다 되어 뒤늦게 든 생각이긴 했지만, 아이와 이렇게 두 달 이상을 붙어서 지내기는 처음이라 뭔가 건설적인 일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제 마음속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상식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무엇보다도 아이의 반응이 괜찮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왜 옛날에 제가 제 아들 나이만 할 때도 <시사 백과사전> 뭐 이런 책을 사서 교양을 쌓는다고 읽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사실 교양이란 것이 책 한 권으로 쌓이는 한심한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지만, 지적 호기심에서 책을 들춰봤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 대해 일자무식한 아들 녀석을 한국 대학으로 보내려 하니 최소한의 기본 상식(아니 사실 상식도 아니라 기본 이해겠죠…)은 갖추고 있어야 친구들로부터 최소한 왕따 취급은 받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한국 관련 시사 뉴스를 하루에 하나씩 함께 읽습니다. 한국어가 많이 딸리는 아들을 위해 먼저 영문 뉴스로 된 한국 기사를 찾았습니다. 시사성이 있는 기사를 위해 첫 기사로 뽑은 것은 북한에 대응하는 한/미 관계에 관한 주제였습니다. 요새 신문에서 하루라도 북한과 한미/북미/남북관계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는 적이 없으니 말이에요. 아이에게 기사를 프린트해서 주고, 같이 읽고 나서 의견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아이에게도 그렇게 언질을 주었습니다. 한국에 대해 네가 잘 모르고 있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대한 상식과 이해를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요. 그러고 나서 기사를 읽었는데, 아이가 버럭 화를 내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제게 호통을 치더군요. 제 기사 선택이 잘못된 거였어요. 이런 내용은 이미 뉴스에서 들어서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기사로 공부할 거면 자기는 더 이상 엄마와 함께 공부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면서 자신의 상식 수준이 꽤 높다는 것을 자랑하더군요. 사실 아들의 말투는 기사 똑바로 고르라는 따끔한 경고였죠. 나름 한국에 대해 정말 새로운 것을 알게 될 것이라 기대했던 아이에게 실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하긴 북한 문제와 그에 따른 트럼프의 반응이 미국 신문에서 워낙 자주 오르내려야 말이죠.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처음이라서 네 수준을 보려고 일부러 미국 관련한 쉬운 기사를 뽑은 거야. 다음엔 더한국적인 기사를 뽑을 테니 기다려 보라고. 네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모르는지 깨닫는 건 시간문제라고.”둘러대며 저는 다음날을 기약했습니다. 


의기 충전한 마음으로 다음 날 저는 청년 실업 문제를 새해 목표로 잡은 문재인 정부의 신년사를 선택했습니다. 이번엔 아예 기사를 한글로 읽기를 제안했죠. 이왕 한국에 대한 기사를 읽는데 영어보다는 한국어로 읽어야 한국어 공부도 되고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에서요. 그랬더니, 우하하.. 이 프로젝트가 급속도로 재밌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도 한국어 공부를 같이하게 되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어디 해 볼 테면 해봐라 하는 식으로) 순순히 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이건 거의 무모한 시도이긴 합니다. 나이만 대학생이지 한국어 수준은 초등학교 저학년의 동화책 수준의 글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에 불과하니까요. 그렇다고 대학 갈 아이와 <해님 달님> 같은 동화책을 읽을 수는 없잖아요. 


청년 실업률이 어쩌고 올해 경제 성장률은 얼마에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목표로 한다는 등의 신년사 기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떠듬떠듬 읽으며 한 문장에 아는 단어보다 모르는 단어가 더 많은 기사를 독해하느라 30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그만하자고 하지 않는 것이 신통합니다. 


그다음 날은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져 초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되고 서울 광장 앞 스케이트장 운영마저 중단했다는 기사를 같이 읽었죠. 덕분에 저도 잘 몰랐던 통합대기 환경지수에 대해 공부도 하고 이 지수가 151을 넘어서면 대기 질이 심하게 악화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한국의 미세먼지는 저도 몸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라서 아이에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너도 한국 가서 일기예보에서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리면 마스크 쓰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겨우 몇 번의 공부였지만, 현재까지 아이의 호응을 보면 매우 성공적인 프로젝트입니다. 기사를 같이 읽으며 아이의 한국어 수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서 좋고, 무엇보다도 아이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모르는 한국어와 무지한 한국 상황이 대화의 물꼬를 튼 셈이죠. 진작 이런 시도를 해 볼 걸 인제야 시작한 게 아쉽습니다. 물론 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한국어 공부하자고 했으면 말에 씨도 먹히지 않을 일이었겠죠? 아무튼, 성공입니다. 성공이요.


저는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재미보다 (사실 제가 한국어를 잘 가르쳐 줄 실력이 한참 달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이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그 어떤 때보다도 즐겁습니다. 모르는 단어 때문에 아이가 일단 저에게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냅니다. 아이와의 대화는 늘 제가 아무리 질문해도 10개 질문에 답이 반도 오지 않는 밑진 장사와 같은 수준이었는데, 아이가 저에게 질문을 다 한다는 거 아닙니까? 질문을 받고 있자니 살짝 아이와 제 사이의 갑을 관계가 뒤바뀐 것 같아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이나 한국의 특이한 상황들을 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가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어 뭔가 신뢰받고 있다는 기분도 듭니다. 아들 녀석이 언제 제가 무슨 말을 하면 제대로 들을 때가 있었냐고요?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끼지 않으면 다행이고, 엄마가 뭐라고 해도 성의 없게 답하기 일쑤고… 또 얼마나 괄시를 하는지, 미국 실정에 대해서는 제가 아들보다 늘 약자였거든요. 근데 이것도 역전이 시작된 겁니다. 한국에 대해서라면 아무렴 제가 아들보다 못 하지야 않지 않겠어요? 아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반전의 기쁨을 느낍니다. 


이 아들 녀석이 한국으로 대학을 가게 된 이유로 제가 이런 덕(!)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 녀석의 황당무계했다고 생각했던 결정이 결국 저를 위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아닌 게 아니라 듭니다. 몇 발 많이 앞서 나가서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제가 쓴 글을 읽을 날도 올 수 있다는 엄청난 일이 현실이 될 날도 머지않아 가슴이 두근거려지고요. 앞으로 글을 더 잘~ 써야겠습니다. 미래의 독자 제 아들을 위해서라도요. 아… 이래서 모국이란 아들과 엄마 모두에게 중요한가 봅니다. 


발동이 걸린 아들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엊그제는 아들이 좋아하는 인기 가수 아이유 기사를 뽑았습니다. 그 전 기사들에서 전문 용어가 너무 많이 나왔기에 하루 정도 쉬어 가자 하는 마음에서였죠. 마침 아이유가 최근에 JTBC 뉴스룸에 나와서 손석희와 인터뷰를 했더군요. 역시 기사를 읽는 아이의 독해력이 월등히 나음을 확인했습니다. 기사를 통해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요. 참고로, 아이유의 노래 ‘밤 편지’는 멜랑콜리한 게 듣는 이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주는 매력이 있더군요. 얼마나 좋아하면 아들은 자신의 페북 프로필 사진마저 한 때 아이유로 도배를 하고, 현재도 핸드폰과 노트북을 열면 아이유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뜨도록 해 두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오늘은 자신이 앞으로 가게 될 학교에서 온 편지를 한글로 함께 읽어 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나면 자신이 공부하게 될 학과 소개 페이지도 읽을 계획이고요. 


사실 이런 일을 하고 지내느라 평소보다 좀 더 바쁘기도 해서 제 글쓰기가 지연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육아로 제 글쓰기 시간을 뺏기고 있긴 하지만, 오래간만에 육아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저는 이만 아들과의 공부를 시작하러 자리를 떠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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