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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Mar 07. 2018

#30.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이중 국적의 이중 이방인

아들을 한국 대학에 입학시켜 놓고 돌아왔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처리했어야 했기에 지난 1주일이 한 달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했고, 미처 못다 처리한 일이 너무 많았기에 똑같은 1주일이 하루처럼 짧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1주일 만이었던 게 어쩌면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엄마는 아들을 놓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렇죠. 엄마가 대학생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와 적정선이란 게 있는 거니까요. 아마 2주를 머물렀다면 2주만큼의 일을 더 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한 달을 지냈다고 해서 충분할 수 있었을까요?

  

아이를 한국에 놓고 시애틀 집으로 돌아오는 제 마음은 그래서 시원섭섭했습니다. 딱 1주일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노라. 그렇지만, 남은 일은 이제 아들 혼자서 스스로 해야 한다. 떠나오면서는 다 처리해 주지 못하고 온 일들 때문에 안절부절못한 것도 있지만, 이렇게 시애틀 집에 와 버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역시 자식 일은 안 보고 못 들어야 부모 속이 편합니다.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맥박이 빨라지고 한숨이 쉴 새 없이 나오며 걱정과 불안의 숲이 점점 쌓여가는 느낌이 드니까요. 이제 제 걱정일랑 저 태평양 바다에 던집니다. 나머지는 오롯이 아들의 몫이고 아들이 그 몫을 잘 감당해 내기만을 저는 바다 이편에서 바랄 뿐입니다.  


바다 저편에 아들과 함께 지낸 1주일간 제가 많은 일을 하긴 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첫날은 신입생 수강신청을 시작하는 날이라서 아침부터 분주했습니다. 수강 신청을 위해 학번을 받기는 했는데, 패스워드가 없는 거예요. 남들에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패스워드로 미리 지정해 주었다는데 외국인인 저희 아들에겐 존재하지도 않았던 주민등록번호란 도대체 뭐로 지정해 둔 것이었을까요? 학과 사무실에 물어보기도 하고, 학생 ID를 만드는 포털 사이트에 문의해도 서로 다 모른다는 거예요. 수강 신청이 아침 10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패스워드 하나 때문에 반나절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패스워드를 여기저기 문의해 간신히 받아 둔 것에 감지덕지할 뿐이었죠. 한숨 놓았다는 생각을 만끽할 새는 수강 신청을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수강 신청 사이트에 올라갔더니 이미 마감된 강의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남들은 이미 10시에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을 대기하고 있다가 30분 이내에 모든 신청을 마친다고 합니다. 저와 아들이 느지막이 오후에서야 수강신청을 했으니 웬만한 강의는 모조리 마감된 지 오래전이었던 거죠. 아들은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가능하면 모든 강의를 영강 (영어강의)로 들어야 하는데 특히 영강이 더 일찍 마감되더라고요. 글쎄 누가 이런 정보라도 사전에 알려 주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던 거죠. 아이를 제쳐 두고 제가 아예 수강 신청 사이트를 훑으며 영어강의를 찾아 과목들을 훑고 또 훑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고 들을 만한 강의가 모두 마감이 되었기에 걱정이 짜증이 되어 나도 모르게 제 입에서 자꾸 새어 나오기 시작했죠. 애꿎은 아이만을 들볶으면서요. “거 봐라. 네가 괜히 한국으로 대학을 온다고 해서 이렇게 모든 일이 쉽지 않은 거 아냐?” 며 울화 섞인 말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도 답답하다 보니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아무 말 못 하고 제 등 뒤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꼼짝없이 서 있던 아이의 모습을 보는 제 마음도 편치는 않았습니다. 내가 뱉은 말처럼 저 녀석이 지금 한국으로 온 것을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더 두려웠고요. 4시간이 넘도록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살피다가 간신히 몇 과목 수강 신청을 마쳤습니다. 나머지 마감된 강의는 교수님께 직접 이메일을 보내서 부탁을 드려 볼 요량으로요. 교수님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수강 신청 정정 기간까지 기다리라는 메시지 외에 별 도움을 주지는 못하셨으니까요. 이번 주부터 수업은 시작되었고, 이번 주중에 있을 정정 기간에 아이가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로 남아있습니다. 수업 스케줄도 다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아이를 두고 돌아오려니 뭔가 깔끔하게 일 처리가 되지 않아 여전히 찝찝합니다. 대학생 아들 수강 신청 때문에 발을 동동 굴러 본 엄마 있으면 나와 보시라고 묻고 싶습니다. 제 팔자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어려운 시험을 주시나이까?)

   

쉽지 않은 일들은 수강 신청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 핸드폰을 하나 개통하려 해도 외국인이라서 선불 폰이 아니고서는 개통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 와야만 본인 명의로 된 핸드폰을 개통해 준다네요. 외국인 등록증이요? 이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등록해야 하는 건데, 예약 방문하는데 만도 몇 주가 걸리고, 등록 후에도 등록증이 나오려면 적어도 1달은 소요된다고 합니다. 한국의 행정절차가 더딘 것인지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의 숫자가 행정 수행력을 초과한 것인지 외국인에게 한국 생활이란 이렇게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도 SSN (소셜 번호) 가 없으면 핸드폰 못 만드는지 이 시점에서 상당히 궁금해집니다. 

 

한국에서는 핸드폰이 없이는 인터넷 뱅킹도 할 수 없고, 학교에서 학생 ID의 패스워드 하나도 맘대로 바꿀 수가 없답니다. 거쳐야 할 인증은 왜 그리 많은지, 핸드폰으로 인증을 요구하는 일이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더군요. 인증의 나라, 한국입니다! 할 수 없이 선불 폰을 구입하긴 했는데 이놈의 폰이 SIM 카드 하나만 넣으면 쉽게 연결될 줄 알았는데 이것도 미쿡!에서 온 기기라 맘대로 작동이 되지 않더군요. 미국의 전화 회사에서 unlock을 해야 하는데, 신청하는 데 24시간이 걸리고, 신청 후에 24시간이 되어야만 풀리게 되어 있어 도합 만 이틀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이에 전화가 없어서 얼마나 불편했던지는 잠시라도 전화기 없이 지내보신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땅은 제 모국이고 제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죠. 저도 제 아들에게도 한국은 이미 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저희를 외국인 취급하는 남의 나라였고, 저희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했죠. 이 얘기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좀 더 깊게 나눠보고자 합니다. 한국을 다녀온 최대의 후유증이라면, 아니 아들을 한국 대학에 유학시키고 온 가장 큰 후유증은 저와 제 아들에 대한 아이덴티티와 국적의 문제였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는 미국과 한국 국적을 모두 가진 이중국적자가 아닌 이중(!) 이방인이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방인, 한국에서도 이방인인 이중 이방인이요. 아… 그래서 6. 25도 겪어보지 않았고 일제강점기는 더더욱 알 길이 없는 7080 세대의 제가 나라 잃은 슬픔을 감히 공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해하시렵니까? 아무튼, 이 문제는 곧 다시 짚어보려고 합니다. 꼭이요. 


화요일은 어떻게 보냈냐고요? 기숙사에 입소하는 날이어서 아침부터 분주했습니다. 침구며 개인 소지품을 위한 쇼핑을 해야 했고, 큰 슈트케이스 두 개에 짐 보따리를 들고 기숙사로 향했습니다.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해도 너무 가까운 거리라서 택시가 쉽게 오지 않더군요. 할 수 없이 모범! 택시를 불렀습니다. 역시 모범은 모범이었습니다. 부른 지 5분 안에 까만 택시가 호텔 앞으로 미끄러져 왔으니까요. 싣고 타야 할 짐이 너무 많아서 기사 아저씨 눈치를 보는데, 큰 슈트케이스 두 개가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몰랐습니다. 모범택시의 트렁크가 그렇게 작을 줄. 아니 저희가 가져온 슈트케이스가 그렇게 클 줄을요. 간신히 뒷좌석에 슈트 케이스 하나를 마저 넣고 기숙사로 향했습니다.  


기숙사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그렇게 가깝지만은 않았습니다. 차라리 다행이었습니다. 기사 아저씨에게 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기숙사에 간다고 하니 택시 기사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 유학을 오게 된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아저씨 반응이 “아니, 미국에서 하버드 대학에 가지 왜 K 대학으로 오는 거야?”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저는 그만 웃음이 먼저 빵 하고 터졌는데 아저씨 얼굴은 저보다는 훨씬 더 심각해 보였습니다.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었을 텐데 듣고 보니 무척 무안해지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의 눈치를 봤더니 이 녀석도 일단 웃고는 있는데 모범택시 운전사의 모범적인 답변의 속 뜻을 이해한 것 같더라고요. 이렇게 아이의 삶은 살벌하게 한국 땅에서 시작되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기숙사에 도착해서 방 배정표를 찾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몇 백 명이 넘는 아이들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정렬되어 있는데, 제 아이의 이름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리스트를 쭉 훑어도 눈에 띄지 않는 거예요. 한참을 이 페이지에서 저 페이지로 이동하며 부산하게 찾고 있는데 리스트 맨 앞 가나다 순서가 시작하기도 전에 커다랗고 낯선 로마자 알파벳으로 제 아들 이름만 하나 덩그러니 적혀 있었습니다. 순간, 제 가슴이 철렁했죠. 이 수많은 김, 박, 이 씨 틈에서 영어로 된 이름 하나로 아이가 홀로서기해야 할 것이 막막해서요. 이 기숙사 동에서 우리 아들 이름을 모를 친구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국인 기숙사에 들어갔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놈의 국적 문제 때문에 이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 오더군요. 이런 이상한 기분, 저도 처음입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 와서 홀로서기했던 것보다 더 무겁게 제 가슴을 짓눌렀다면 이건 분명 모성애에서 온 감정이겠죠?  


아무튼, 그렇게 하루를 거의 보내고 남은 시간에는 대학에 계시는 지인들을 아들과 함께 만났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교수님을 아이에게 소개도 해 줄 겸 해서요. 교수님들은 역시 아이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이쁜 여자 친구를 사귀면 한국어 공부는 거저 될 것이다 에서부터 미적분 수학 과목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이르기까지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얘기들을 들려주셨죠. 그중에 아들이 가장 명심해서 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마도 군대 갔다 온 복학생 선배들을 대해야 하는 태도 내지는 마음의 준비였을 겁니다. 남학생들의 경우 대학 1-2학년 때는 또래 아이들과 지내게 되지만, 3학년 정도 가면 또래 애들은 군대에 가고 복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처럼 미국에서 온 아이에게 남다른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남학생이라면 더더욱. 한국 사회가 아무리 개방적으로 되었다고 해도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남학생에 대해서는 아직도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배타가 짙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말씀하시고 계신 교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고요.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한국 젊은 청년들은 병역의 의무 때문에 (참고로 군대에서는 귀걸이가 금지라네요) 남학생 중에 귀걸이 하는 아이들이 전무하다는 겁니다. 아마도 군대 갔다 온 짓궂은 선배들이 제 아들 녀석의 귀걸이를 보면 한 마디씩 하지 않고 넘어가지 못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씀입니다. 아들이 하도 어려서부터 (중학교였던 가요?) 귀걸이를 하고 다녔기에 저조차 잊고 있었는데, 이놈의 아들 녀석의 귀에 걸린 작은 장식물 하나가 (아니 두 개) 대학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더라고요. 교수님 중의 한 분은 아들 녀석이 이런 압박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귀걸이를 자진 반납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장담을 하셨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저는 궁금합니다.   


귀걸이 이야기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다음 날은 입학식이었습니다. 전날 밤 아들은 귀걸이를 낀 채 기숙사에 입소했고, 저와 아들은 다음 날 입학식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아들의 전화가 안 되는 이유로 만날 방법이 모호했죠. 할 수 없이 입학식 끝나고 자리를 뜨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입학식 동안 객석에 앉아 있다가 아이를 찾아서 만날 요량이었습니다. 입학식에 도착해 체육관에 앉고 보니 제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던지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입학생 숫자가 셀 수 없이 많았고, 한 열씩 아무리 머리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례대로 아이를 샅샅이 찾아보려 해도 그 뒤통수가 그 뒤통수로 모두 다 똑같아 보이는 거예요. 한국은 역시 검은 머리 일색인 학생들이 전부였으니까요. 까만 뒤통수와 대부분 검은색 패딩 점퍼를 입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절대로 구분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곳이 한국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죠. 아이들 숫자도 많고 엇비슷해서 도저히 매의 눈을 가지지 않고서는 무리 속에서 제 아들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입학식 내내 아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나 그 걱정을 하느라 식순의 내용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입학생들이 앉아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이 끝나고 나서 정신없이 열대로 아이를 찾아 나서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도 시간이 좀 많이 걸렸을 뿐 아이를 찾게 되기는 하더군요. 어찌나 반갑던지 입학의 기쁨보다는 많은 인파 속에서 아들과 다시 상봉한 기쁨이 더 컸던 입학식이었습니다. 식장을 나오는데 수십 년 전에도 있었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늘 등장했던 전문 사진 기사들이 사진 촬영을 하라고 야단이었고, 다들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그 날을 기념하기에 바빴습니다. 어색한 꽃다발을 아이가 마다하지 않고 손에 든 채로 사진을 찍은 것은 오래오래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 밀려 입학식을 마치고 나니 이제 정말 아이의 새 출발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기숙사로 아이를 돌려보내며 물었습니다. 네 기숙사 방 친구들은 무슨 전공을 하냐고요. 세 명이 같이 쓰는 기숙사인데 다른 신입생 하나는 한문학을 전공하고 한 학년 위 선배는 언어학을 전공한다고 합니다. 한문학과라… 학교에서는 일부러 제 아들을 이 친구와 같은 방으로 배정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 시대 한문과 앵글로 색슨 영어와의 절묘한 만남, 한문학과와 신소재 공학과의 훌륭한 융합, 너무나 그럴싸한 조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는 언어학 전공의 2학년생이 있고요. 이 둘 사이에 생길지 모를 언어의 벽을 아마도 정리해 줄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하.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을까 합니다. 할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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