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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Mar 11. 2018

#31.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벌써 영어가 그리우냐?

입학식 다음 날은 삼일절이었고요. 그다음 날 아들 녀석은 대망의 새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수업이 오전 1교시에 하나 있었죠. 저는 전날 용인에 계신 부모님 댁에 내려가서 하루 쉬고 금요일 새벽녘 일찍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토요일에 출국해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한국에서 아들을 위해 일 처리를 봐줄 수 있는 마지막 날입니다.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아들 녀석의 학교로 향했습니다. 어찌나 날씨가 추웠던지, 언니의 두꺼운 패딩 점퍼를 빌려 입고 상경을 했습니다. 오리털의 외투는 칼바람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모자가 없어서 머리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눈물 나게 매웠습니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드는 한파를 실감했죠.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무자비한 추위가 마지막 남은 일정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제 춥고 더운 지역에서는 생존하기 힘든 나약한 시애틀형 인간으로 도태된 지 어언 16년이 지났거든요.  


캠퍼스에 도착해 보니 오전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캠퍼스에 학생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몇몇 학생들을 쫓아 캠퍼스 내 학생회관 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아들의 1교시 강의실과 가까운 곳이었으니까요. 아들과 1교시 끝나고 만나기로 했거든요. 학교 앞 스타벅스나 커피집에 갈 생각으로 일찍 나오긴 했는데 근처에 문을 연 곳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편의점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아침 일찍 문을 열지 않나 봅니다. 한국의 스타벅스 개장 시간은 어쩌면 많이 늦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긴 했습니다.  


스타벅스에 가려던 이유는 아침 요기도 할 겸 아들 1교시가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궁리해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숙제처럼 미루어 왔던 일거리가 있었으니까요. 제 부모님이 적극 권유하신 일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아는 지인 중엔 입학처장을 만나 따져보라고 얘기한 분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아들의 입학이 재외국민 입학 전형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국적이 이제 바뀌었으니 외국인 전형으로 어떻게 전환이 될 수 없느냐고 최대한 간절히 호소해 보라는 겁니다. 한국은 원리 원칙적인 미국에 비교해 딱한 사정에 꽤 호의적으로 관심을 두기도 한다면서요. 그 말에 저도 어느 정도 힘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떼쓰고 운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떼라도 쓰고 나야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저처럼 떼쓰기를 하면 안 되겠지만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대학 입학처에 물어보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때 받은 답은 ‘학생의 국적 변경과 상관없이 입학전형에 맞춰 교과과정을 졸업 때까지 이수해야 한다’였습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답이긴 했지만, 직접 얼굴 보고 말이라도 한 번 더 해보고 시애틀로 떠나야 제 속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았거든요. 일단 어느 부서로 가서 누구에게 어떻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것이며, 그렇다 해도 받아들여질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인지, 또 결과가 긍정적 일지는 매우 불투명했습니다.  


아이의 수업이 끝나기까지 넉넉한 시간이 남았던 것이 잘못이었죠. 용기를 내서 인재발굴처라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9시 오픈에 앞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9시에서 5분을 넘기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죠. 한국에서 이런 공무적인 일로 문의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본 게 대학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이 왜 그때 제 머릿속을 먼저 스쳐 가는 걸까요?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조금 창피하기도 했던 것 같고요. 아니라는 일을 구차하게 늘어놓아야 하는 게 제 자신도 민망스러웠습니다. 말 문이 잘 떨어질까 내심 걱정도 되었고요. 아십니까? 긴장하니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엉키고 부실해집니다. 한국에 와서 다국적 언어장애를 겪기도 하네요.  


변명하자면, 미국 생활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거죠. 한국의 오피스 문화에는 왠지 주눅이 듭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 온 그 당시 나이로 갑자기 쭈그러드는 것 같고요. 미국이라면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도 한국에서는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왜일까요? 얼굴빛에서 읽을 수 있는 상대방의 기분이나 생각이 훨씬 더 투명하게 전달되어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학교 인재발굴처라는 부서명에서 오는 중압감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고요. 가슴이 콩알만 하게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의 존재의 의미는 오직 아들을 둔 한 어리숙한 엄마, 그것도 한국 실정과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약간은 덜 떨어져 보이는 엄마가 제가 가진 유일한 이름표였으니까요. 아무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좀 있어 보이려고 해도 쉽게 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문 앞에 앉아있던 직원에게 이러저러해서 왔다고 그래서 상담을 할 수 없겠느냐고 어렵사리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직원의 답변을 생각해 보면, 제 서두가 너무 길었던 것이 민망했습니다. 직원은 이곳은 인재발굴처라서 국내 한국인 학생만 선발하는 곳이라며 국제입학팀으로 가라고 일언지하에 저를 돌려보냅니다.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 지 불과 1분도 안 된 시점이었죠.  


국제입학팀이 있는 건물 동을 향해 걸었습니다. 아침부터 찬 바람을 맞아 씩씩거리며 캠퍼스 언덕길을 올랐죠. 서러움이 밀려오더군요. 명색이 저도 미국대학교에 몸담고 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한국 대학에 오니 완전히 초짜가 되었습니다. 할 수 없죠.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그저 로마법에 익숙해질 수밖에요. 아까 긴장을 잔뜩 하여서 그런지 이제는 용기백배에 기세마저 등등해지려 합니다.  


이번엔 주저 없이 국제 입학처 문을 열고 단박에 들어갔습니다. 국제처라는 간판에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해외에서 왔으니 국제처와는 좀 얘기가 통하겠지 싶어서요. 안내 여직원 세 명이 쪼르르 은행 창구의 직원들처럼 나란히 앉아있었습니다. 손님은 물론 저 하나였고요.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입학식이 엊그제 끝난지라 입학 관련한 일이 일 년 중 가장 한산한 때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세 명의 여직원이 모두 저만을 일제히 동시에 쳐다보더군요. 그중의 한 직원에게 눈을 맞추고 제가 온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뒤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던 상급 직원에게 가서 제 얘기를 전하는듯싶었습니다. 그 직원이 걸어 나오면서 ‘아무개 어머님이시죠?’ 하면서 제 아들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닙니까? 순간 반갑기도 했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에 오기 전에 이메일로 상담했을 때 입학 전형대로 졸업한다는 답을 쐐기 박듯이 전달해 주었던 바로 그 담당자였습니다. 사면초가에 걸린 듯한 마음이었는데 그래도 저쪽으로 가서 앉으라고 하면서 상담을 해 주려고 하는 눈치였습니다. ‘어머님, 뭘 어떻게 해 드리길 원하시는데요?’ 하면서요. 아… 여기서 또 한 번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마치 내가 서울로 대학 보낸 시골서 상경한 시골 촌뜨기 아줌마 같다는 생각이 왜 그 순간 제 머릿속을 뱅뱅 맴돌던지요? 직원의 그 말 한마디에 이미 저는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오기가 나서 아무리 입학전형이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 재외국민 12년 전형 학생인데 한국어 수업이라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시골뜨기 아줌마 취급하는데 그 기대에 맞추기로 맘을 고쳐먹은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무척 상하더군요. 사실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보단 이성적으로 아니 합리적으로 제 아들 같은 케이스에 최소한의 배려를 고려해 주면 좋겠다, 뭐 이런 식으로 최대한 고상하게 대화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말하면서 목소리는 잠겼는데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원도 저에게 더 이상 학교의 교칙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마지막에는 한 방의 펀치를 날리는 대사를 준비했다가 읊었습니다. ‘어머니, 그러기에 아들을 학교에 보내실 계획이셨으면 국적 이탈을 사전에 미리미리 준비하셨어야죠.’ 이 말을 듣자 뭐 이런 고약한 발언이 있나 싶었지만, 제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은 순간이어서 무력감에 어서 그 자리를 털고 나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국제처를 그렇게 빠져나왔는데 햇살이 왜 그렇게 밝은 지 추위가 아침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습니다. 햇살조차 저를 환하게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이럴 때 갖기 쉬운 감정의 도착 증상 중 하나인 게 맞겠죠? 계속해서 문전 박대를 당한지라 아들을 만나러 가기 전 아직도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었습니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지만, 내친김에 국제학생들을 돕는다는 글로벌서비스센터로 향했습니다. 이곳에 가서 지난번에 왜 우리 아들 영어 도우미 붙여준다고 하고 안 붙여줬냐는 화풀이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습니다. 서울에 왔는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는 하고 가야죠.  


이곳엔 역시나 외국인들로 복작거렸습니다. 반가운 영어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여기저기서 들려왔고요. 익숙한 외국인 학생들의 얼굴이 마치 내 자식처럼 반가웠습니다. 그곳의 직원들도 모두 영어로 조잘조잘. 왠지 영어가 통하는 이곳에서 드디어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상황을 살짝 설명하니, 직원 중 하나가 카운터 뒤에 마련된 상담실로 저를 인도하더군요. 뭔가 대우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이 막무가내 아줌마를 격리하려는 이유였을까요? 그런데, 카운터 직원이 아닌 그 위 상급 직원이 저를 찾아와서는 제 사정에 그 누구보다도 귀 기울여 듣는 겁니다. 명함을 건네며, 언제든 무슨 일이면 연락하라, 그리고 아들에게는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도움을 청해라 등 친절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제 상황에 누구보다도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외국인인데 외국인으로 분류되지 못해서 정작 외국인이 받아야 할 정보의 사각지대에 놓인 상황을 부모 마음인 제 마음처럼 이해해 주더라고요. 이미 그곳에 앉아서 저는 아침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답답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혹시 외국인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최고의 서비스를 하는 한국인의 이중성이 아닐까 봐 잠깐 의심이 들긴 했지만, 저에게 이런 위로는 꼭 필요한 아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채로 아이를 만나러 강의실을 향해 걸었습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온통 학생들뿐인 강의실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게 잘한 일일까 아이가 민망해하진 않을까 후회가 되긴 했지만, 교내 캠퍼스를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전화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 이것뿐이었습니다. 미국 애처럼 보이는 백인 여자아이를 입구에 만나기도 했죠. 앗싸~ 여긴 정말 외국인이 많은 대학입니다. 


강의 시간이 살짝 지났고 아이들은 이미 강의실을 떠나고 없는데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녀석 첫 수업부터 결강한 거 아냐? 하고 화가 나려던 참, 반대편에서 아이가 저를 향해 유유히 걸어옵니다. 하마터면 ‘야! 아무개!’ 하고 아이 이름을 강의실 복도에서 크게 부를 뻔했습니다. 미국에서 자란 아이나 어른들은 웬만해서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아이가 기겁했을지 모릅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큰 소리로 Yelling을 하냐고요. 무슨 일인지 아이를 보자마자 아이 얼굴이 ‘NO Yelling’이라는 간판이라도 된 것처럼 제 입이 굳어진 것은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아니었다면 아이에게 Yelling 하지 말라는 주의를 한국 땅에서 조차 받았을지 모릅니다.  


오늘 강의는 취소되었답니다. 1시간 동안 아래층에 가 있다가 시간 맞춰서 올라왔다고 하더군요. 꽤 신경 써서 옷을 입고 나온 것 같은데, 강의 취소라니 제가 다 실망이 되더군요. 할 수 없죠. 첫 강의가 어땠는지는 아이에게 나중에 듣기로 해야겠습니다. 


저희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곧바로 출입국관리사무소로 향했습니다. 아이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찾아가 본 세종로의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종각의 빌딩 숲 속에 있었습니다. 서울은 정말 대단한 도시입니다. 촌뜨기처럼 (오늘은 시골뜨기 코스프레로 일관성 있게!)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 꼭대기를 바라보며 그 아찔함과 함께 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빌딩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오전 내내 학교에서 푸대접을 받았어도 서울로 아들을 유학 보내는 것이 어쩌면 잘 한일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뿌듯함이 빌딩 숲 속에 있으니까 들더라고요. 서울, 대단한 곳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위압하게 만드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들어오고 보니, 이곳은 그야말로 미국의 판박이였습니다. 조금 전 종각 교차로에 신호대기를 기다리던 한국인 일색의 모습과는 달리 장내는 온통 다인종으로 바글거렸습니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앉아서 대기할 자리도 없더라고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피부 색깔의 인종이 어우러져 저마다 출입국과 관련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하고 초조한 모습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이런 업무를 보는 것은 별로 행복한 일은 아닌 거 아시죠? 해 보신 적이 없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저는 아들 녀석을 자리에 앉히고 순번을 찾고, 가져온 서류들이 모두 맞는지 검토를 했습니다. 여권 사본이 없어 창구에 가 복사를 하고, 택배로 등록증을 신청하느라 인증을 사고, 대금을 지불하고, 정신없이 왔다 갔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죠. 마침내 준비를 다 끝내고 나서 자리에 앉아 순번을 기다리며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주변엔 저나 제 아들처럼 생긴 한국인의 얼굴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죠. 아, 이곳은 외국인들이 오는 곳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외국인.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복사해 주는 창구 여직원의 말투가 유난히 퉁명스러웠던 것도 이곳이 외국인을 상대하는 곳 때문이었을까요? 외국인에게는 더 불친절하게 땍땍거리다가 한국인 같아 보이는 저에게는 살짝 목소리 톤을 하나 가라앉히며 부드럽게 말씀하셨으니까요. 하여튼 저와 제 아들은 외국인으로 이 한국이라는 외국에 와서 등록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특이한 상황으로 느껴졌습니다. 난 원래 한국인인데 한국에서 외국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으니까요. 미국에서도 마이너리티로 어눌한 이민자 취급당하는 것에 진력이 났는데 내 나라에서조차 나는 진정한 이 나라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취득한 이 비참함의 국적은 도대체 어디인가요? 


미국의 시민권을 가지고는 있지만, 미국에서도 이방인 취급,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이방인 취급. 저는 과연 지구 어느 편에 속한 사람인가요? 미아가 된 느낌이 이런 걸까요? 이방인의 설움이 이런 걸까요? 그냥 웃어넘기려고 해도 될 이야기이긴 한데 이상하게 가슴에 사무칩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한 인간일까? 사회에서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소속감이란 게 얼마나 크고 영향력 있는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이런 상념과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는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일단은 다행입니다. 

 

출입국 관리소를 나와, 돌아가는 길에 아이와 함께 대형 서점에 잠깐 들렀습니다. 아이는 영어책도 파냐고 대뜸 묻더군요. 아이와 책방에 함께 왔던 적이 언제였던가요? 어린 시절 반스 앤 노블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사 읽던 시절이 거의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이와 책방을 둘러보는 일은 저의 소중한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아들이 책에 지대한 관심까지 보입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컴퓨터 게임 때문에 책과는 담을 쌓고 산 아이였는데 말입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신이 나서 아이를 외국 서적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게다가 아이는 클래식 명작을 좀 읽어 보겠다고 하며, <Little Women> 같은 소녀 취향의 책을 만지작거립니다. 역시 미국 문학만 아는 아들은 세계 문학에는 문외한입니다. 어깨가 으쓱해져 주변에 깔렸던 명작들을 훑으며 하나씩 서평을 말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가 읽은 책만 강추를 설토했죠. 엄마가 이 책 읽어 봤는데 하며 온갖 책 읽은 허세와 위세를 다 떨었습니다. 마치 이제까지 책을 읽은 이유가 아들에게 책 읽은 자랑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요. 저에게 보기 좋게 걸려든 아들은 <Zorba the Greek>과 <Great Expectations>을 강압적으로 추천받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본인이 읽고 싶었다던 칼 세이건의 과학 소설 <Cosmos>도 함께 구입했습니다.  


뜬금없이 영어책을 (그것도 소설책을) 사서 읽겠다고 하는 아들이 놀랍고 기특해 물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이틀을 보내고 난 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들의 대답인즉슨 내 언어(영어)로 된 쉽고 편한 글이 문뜩 읽고 싶어 졌다고 답했습니다. 계면쩍게 ‘영어를 좀 읽어줘야 할 것 같아’ 하면서요. 책에 대해 칭찬할 기세로 물어봤던 건데 제 손이 단숨에 아들의 등짝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마구 비웃어 주었습니다. “야 이 녀석아, 1주일도 안 돼 벌써 영어가 그리우냐? 에라~ 이 녀석아, 너 그새 한국어에 질린 건 아니겠지?”  


아들은 한국에서, 저는 미국에서, 우리는 이제 각자 무엇을 그리워하며, 무엇을 내 것이라 느끼며, 어디를 고향이라 그리워하며 앞으로 살아가게 될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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