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효경 Mar 16. 2018

#32.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I lost 3 credits.

역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도 멀어진다는 말이 맞네요. 아들 녀석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제 맘에 걱정도 서서히 사라져 갑니다. 일단은 맘이 편해서 좋습니다. 자고로 사람은 맴이 편한 게 세상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시애틀로 돌아오기 전 공항에서 출국을 앞두고 녀석에게 아주 짧은 카톡을 하나 보냈더랍니다. 

“엄마 지금 공항에 왔어. 곧 시애틀로 돌아가. 잘 지내고, 아프지 않게 밥 잘 먹고.” 

그랬더니 대뜸 “OK I will.” 하는 짧은 문장 하나가 도착합니다. 이어서 “See you soon” 메시지도 함께요. 저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곧 다시 만나요”라는 평범한 문장이 제게는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문장으로 다가오더군요. 얘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곧? 갈 때는 왜 왕복 항공권을 끊었냐고 묻던 녀석이 곧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는 게 왠지 이 녀석이 정말로 금방 시애틀로 돌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엄마, 나 한국에서 도저히 못 살겠어요. 대학이고 뭐고 그만 시애틀로 돌아갈래요”라는 말을 혹시라도 할까 봐 제 가슴이 철렁거렸던 겁니다.  


그렇게 아들을 놓고 집으로 돌아오니 제 마음 상태가 폭풍이 지나간 후 예전대로 되돌아간 날씨처럼 평온해졌습니다. 오랜만에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고, 놓았던 운동을 시작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죠. 이제 육아일기는 한동안 쓸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일단 제 맘이 편했으니까요.   


맴이 너무 편하다 보니 잠도 잘 오더군요. 시차도 아직 좀 남아 있고 새로 시작된 썸머 타임에도 적응하느라 요새는 주로 아침에는 늦잠, 저녁에는 이른 초저녁 잠으로 잠의 풍년을 맘껏 누리고 있습니다. 어제도 바로 그렇게 9시가 되기도 전에 잠이 들었더랬죠.  


갑자기 잠에서 깬 것은 남편이 아들 녀석한테 온 문자를 보라며 제 핸드폰을 건넸을 때였습니다. 화들짝 놀란 저는 이불을 걷어차고 핸드폰을 받아 들었습니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I lost 3 credits.” 


지옥 같았던 수강 신청의 악몽이 꿈처럼 다시 살아났습니다. 초저녁 잠을 잤던 저의 죗값이었던가요? 아들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지난 월요일까지만 해도 잘 듣고 있던 수업이 갑자기 폐강되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대치할 강의를 찾지 못한 채 수강 신청 정정 시간이 지나갔고요. 그래서 3학점을 또 잃게 되었던 거고요.  


아… 악몽입니다. 이미 한국어로 된 교양 강의 하나를 이번 학기 듣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아 포기한 상태였으니까요. 이 과목은 그나마 잘 듣고 있던 ‘대학 영어’ 교양 필수 과목인데 하필 이 수업이 폐강되는 바람에 3학점을 더 못 듣게 셈입니다. 이건 둘째 치더라도 아이와 제가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건 어떻게 폐강이 되는 수업에 대한 조치를 학교에서는 이렇게 소홀히 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도 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내 둔 상태다. 글로벌 서비스 센터에 가서 문의했더니 정정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등등. 아이는 블랙 보드라는 공지사항을 알리는 페이지를 매일 확인했는데도 폐강에 대한 아무 공지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월요일 수업 이후로 정정 기간은 단 하루 화요일 뿐이었는데, 수요일이 되어 예정대로 수업에 가니 교실에는 있어야 할 학생이며 교수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고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죠. 저는 “How absurd!”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녀석도 “Well yeah it is” 하며 제 말에 추임새를 달더군요. 혹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아는 애라도 있으면 사정이 어찌 되었는지 물어보라고 할 텐데 아무도 없답니다. 하긴 이제 막 시작된 수업에서 사귄 친구가 있기는 쪼금 어려운 상태이긴 합니다. 특히 제 아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라 저는 아들을 먼저 추궁해 보았습니다. “너 정말 월요일에 수업에 참석하긴 한 거야? 혹시 수업 빼먹고 엄마한테 딴소리하는 건 아니지?” 아들은 아마도 “What?”을 표현하고자 한 커다란 물음표에 LoL (laugh out loud) 문자를 함께 곁들여 보내면서 틀림없이 수업에 갔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마치 미스터리를 대하는 형사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일단 교수님한테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강조했습니다. 이건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사태이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 건 학교의 잘못된 처사이다. 반드시 이 문제의 발단과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아들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꾸나. 저는 나름 전장에 나가는 비장한 마음으로 아들의 사기를 바로 세워주고자 했습니다. 교수님께 연락을 받게 되면 엄마한테도 알려다오 라는 말로 마무리를 하면서 말입니다.  


옆에서 궁금해하던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남편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1학년 1학기에 너무 적은 과목을 수강하면 2학기에 들어야 할 과목이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들이 도대체 한국에 수업을 들으러 간 건지 수업을 포기하러 간 건지 헷갈리기 일보 직전이니까요.  


제 한숨 사이로 남편은 뭔가 급히 체크하더니 이메일 하나를 제가 들이밀었습니다. 남편은 아직도 아들 녀석의 이메일 계정을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아들 녀석은 무슨 이유인지 자신의 메일 계정 패스워드를 여태껏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제 남편 탓이라기보단 아들 녀석의 무관심 내지는 불성실한 태도의 단면이라고 봅니다. 덕분에 아들 녀석의 이메일을 몰래 훔쳐보는 혜택을 누리고는 있습니다만.

  

남편은 아들 녀석 이름 앞으로 온 폐강과목 안내라는 메일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월요일 날짜로 온 메일이었죠. 아들 녀석이 아무 공지 사항을 받은 적이 없노라고 철석같이 잡아떼더니, 이 녀석 보기 좋게 딱 걸려들었습니다. 메일 체크를 꼼꼼히 하지 않은 자신이 자초한 결과였으니까요. 어이가 없는 건 학교 당국이 아니라 천하의 몹쓸 제 아들 녀석이었습니다.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거친 언어가 마구 쏟아져 나와도 할 수 없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이 녀석을 도대체 어떻게 혼쭐을 내줘야 할까요? 저는 먼저 폐강 메일을 사진으로 캡처해서 보란 듯이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자 봐라. 너의 한심한 작태를. 이렇게 중요한 메일을 놓치고 사는 네 녀석의 정신이란 것은 도대체 어디에 박혀 있는 것이냐?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분노를 가라앉히고 가능한 한 냉정한 상태로 차분하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주의 깊게 보지 않는 네 단점을 이제는 정말이지 고쳐야 한다. 지금 당장! 그렇지 않으면 넌 앞으로 한국에서 서바이벌하기 힘들 것이다.”라고요.   

아이의 얼굴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죠. 설마 너무 웃기다는 식의 LoL은 아니었겠죠?  


남편과 저는 어이없이 서로의 실망스러운 얼굴만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지나니 남편이 먼저 슬슬 웃기 시작하더군요. 어이없는 웃음이었죠. 저는 남편의 그 웃는 얼굴이 견딜 수 없어서 남편의 얼굴에 대고 맘 놓고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애들을 잘못 키웠나 봐. 이제 어떡하지? 이제 정말 어떡하라고!” 징징댔죠. 울음만 나오지 않았지 제 마음은 울고 싶은 심정에 흡사했으니까요. 근데 남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지 않고 더 음흉한 얼굴빛으로 점점 변하는 겁니다. 마치 더 흉측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음흉한 미소로요. 그러더니 조용히 한마디 던집니다. “오늘 xx (쌍둥이 다른 녀석, 일명 필라델피아에 있는 아들)한테 무슨 문자가 왔는지 알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저는 거의 실성하거나 미친 여자의 수준이 되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듣기가 불안했던 거죠. 마치 지금 겪는 일보다 더한 일이 딴 자식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터뜨릴 것만 같은 눈빛이었거든요. “안 돼! 제발 얘기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라고 절규를 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어느 픽션의 한 토막처럼 들리지만, 이건 분명 실제상황이었습니다. 시애틀 39번가 어느 가정집 거실에서 일어났던… 


남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도 진심이었지만, 이내 무슨 일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의외로 여유로운 모습으로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말라고 하더군요. 여전히 그 의뭉스러운 얼굴과 눈빛을 유지한 채로요. 이판사판이 된 마당에 안 좋은 소식은 한꺼번에 들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제 감정이 먼저 작동을 하더군요. 빨리 얘기하라고 졸랐습니다. 마치 남편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얘기를 계속해야 할까요?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굴뚝같이 솟아오릅니다. 당시 제가 느꼈던 애가 타도록 답답하나 궁금해서 심장이 타 들어만 가던 그 상황을 독자분들과 공유해야 그야말로 실감 나는 육아일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여러분께 욕을 얻어먹더라도 오늘은 여기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도 이 사건을 생각하면 제가 마치 한 극의 연기자가 되어 강렬한 장면을 찍은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쌍둥이 아들 녀석 때문에 히스테리가 된 여자의 역할 말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31.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