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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Mar 18. 2018

#33.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조금 덜 행복해도 행복한 것이라 믿으며

자, 아들 녀석 때문에 히스테리가 된 엄마의 역할로 다시 돌아갑니다 (#32회 마지막 부분 참고). 한국에 있는 아들 때문에 거의 분노 폭발 수준에 있던 저에게 남편이 의뭉하게 던졌던 한 마디가 시작 배경입니다.  


남편 (배시시 한 웃음을 눈가에 흘리며 조롱하는 얼굴로): 오늘 다른 쌍둥이 녀석한테 뭐라고 문자가 온 줄 알아? 

아내 (더 이상 놀랄 만한 소식은 듣고 싶지 않는다는 얼굴로, 하지만 금세 호기심에 가득 차서, 하나 여전히 볼멘소리로):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남편 (점점 더 음흉한 표정을 띤 채): 알고 싶어? 알고 싶지 않으면 관두고. 

아내 (참다못해 신경질을 버럭 내며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얼굴로): 도대체 뭐야? 빨리 말하지 못해?  

남편 (흘리던 웃음을 천천히 주워 담으며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글쎄…  

아내 (남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고도로 긴장한 상태가 되어 덩달아 목소리가 작아진다): 녀석한테 무슨 일 있어? 

남편 (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녀석이 기숙사를 옮겼대. (전후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28회를 참조) 

아내 (녀석이 기숙사를 옮겨 친구들끼리 자취를 하기로 한 것이라고 속단하며): 어떻게? 어디로? 그 녀석 친구들이랑 기어코 아파트로 들어갔구나? 

남편 (여전히 덤덤하게): 아니, 다른 기숙사로 옮겼대. 원래 옮기고 싶어 했던 기숙사 말이야. (이 기숙사는 아들 녀석이 친구들과 아파트 계획을 세우기 전에 옮기고 싶어 했던 최신식 기숙사를 말함) 

아내 (얼굴에 굳어졌던 근육이 풀리고 어느덧 생기가 도는 빛으로): 잘됐네. 지가 가고 싶어 했던 기숙사였잖아. 진작 신청하라고 했을 때 아파트 어쩌고저쩌고 하며 딴전 피우다 결국 놓치더니, 근데 만석이었던 그 기숙사를 어떻게 다시 들어갈 수 있었대? 

남편 (아내처럼 얼굴에 생기가 돌아):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자기가 수소문을 해 봐서 바꿀 수 있었나 봐. 나도 자세한 내용은 몰라. “Dad, 나 기숙사 바꿨음” 하고 문자만 딸랑 왔더라고.  

아내 (히스테리가 말끔히 사라진 얼굴로): 그 녀석 기특한데? 야~ 한국에 있는 다른 녀석에 비교하면 그 녀석 엄청 똑똑한 거 아냐? 절대 바꿀 수 없을 줄 알았더니, 원하는 걸 찾아서 어떻게 해서든 바꿔 놓을 줄도 알고 말이야. 이건 좋은 소식이네! 

남편 (아내의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흐뭇해하며 웃는다) 

아내 (남편의 심상치 않았던 표정이 장난으로 그친 것에 안심하며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 


여기까지가 제가 맡았던 히스테리 엄마의 연기 끝입니다. 저희는 이렇게 삽니다. 아주 작은 일에 감사하려고 하면서요. 하하하.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것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하나가 속을 썩이면 다른 하나에게서 위로를 받기도 하네요.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위로가 되더군요. 남편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작은 일이 마음에 큰 위로를 준다는 것을 알았던 거겠죠? 그랬기 때문에 저에게 연기하면서까지 위로를 전달하기 위해 극적 효과를 노린 거고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날은 그렇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살다 보니 마무리를 짓는 일은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경우가 많더라고요. 오늘 그 정도로 마무리 짓고 이쯤에서 만족하려 합니다. 아들이 설령 내 성에 차지 않게 행동하며 살아도 그냥 이쯤에서 만족하기로요. 이렇게 마무리 짓지 않으면 제 속은 계속 끓고 있겠죠. 신기한 건 안 될 것 같은 마무리가 된다는 겁니다. 제 맘만 잘 추스르면 자식은 괜찮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식이 꼭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면 할수록 저도 자식도 점점 불행해져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제는 한국 뉴스에서 최근 명문대학에 다니는 한 신입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비슷한 나이로 한국에 있기에 뉴스에 더욱더 관심이 갔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명문대에 입학해 희망찬 첫 학기를 시작한 청년이 무슨 이유로 자살을 했을까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죠. 게다가 아들이 자살한 며칠 후 엄마와 여동생이 동반 자살을 했다고 하네요. 무엇이 그 청년을 죽음으로 몰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전 무엇보다도 제 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행복하게 학교생활하고, 행복하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맘껏 경험하며, 자신이 한 선택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그런 현명한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자신이 선택한 것이 기대한 것에 못 미치더라도, 자신을 위해 내린 결정에 대해 기쁘게 감당하는 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뭔가를 배우고 있는 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참, 인생 좀 낭비해도 크게 탈 나는 것은 아니고요). 명문대가 아니라도, 고학점이 아니라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의 행복을 위해 엄마인 저는 조금 덜 행복해도 행복한 것이라 믿겠습니다. 아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행복하다고 믿겠습니다. 세상엔 엄마가 행복하고 자식이 불행한 케이스가 너무 많으니까요. 아마 그 자살한 청년도 부모의 행복을 위해 살다가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했던 안타까운 케이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자식이 불행하다면 사실 누가 더 불행할까요? 그건 당연히 불행한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겠죠.  


세상에 많은 부모가 자식들보다 현명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의 행불행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고요. 때로는 우리의 아집과 우리의 원하는 방향에 치우쳐 자식들의 행복을 짓밟을 때가 종종 있으니까요.  


우리는 애들보다 좀 더 인생을 산 어른이니까 우리가 지혜롭기로 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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