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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Apr 08. 2018

#37.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수잔을 만나서 못 다한 질문

나이가 들면서 기분 좋은 건 어려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을 잘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저지른 일 중의 하나는 수잔과 만난 겁니다. 그녀는 입구에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2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한 걸음 내딛게 될 때마다 그녀를 만나지 말고 그냥 되돌아갈까 계단 하나를 딛는 발걸음에 주저함이 가득했죠. 한 사람씩만 겨우 올라갈 수 있을 만큼의 좁고 어둠침침한 계단을 오르며 뭔가 가서는 안 되는 길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판단과 달리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할 때면 밀려드는 기이한 쾌감이란 도대체 어느 정신의 구석에서 생성되는 걸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수잔의 집 문턱 마지막 계단까지 어느새 올라와 버린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굳게 닫힌 유리문을 마주하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돌아설까 망설였지만, 벨은 이미 눌러진 상태였고요. 돌아보니 제 옆에 동행했던 저보다 담력이 몇 배는 훨씬 큰 동료의 적극적인 용맹스러움이었습니다. 제 발로 혼자서 수잔을 만나러 오는 일은 상상을 불허할 일이었으니까요. 벨이 눌리자 저를 포함해 나머지 두 동료(네! 맞습니다. 도합 넷!)는 꺄악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죠.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물을 건너 버렸다는 사실을 벨 소리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곧이어 굳게 닫혀 있던 유리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열리는 문을 망연히 바라보는데 뭔가 홀린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문에 달려있던 스산하면서도 이 세상 소리 같지 않은 불쾌한 방울 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떨리는 심신에 혼란을 가중하면서요. 혼미한 정신을 수습할 새도 없이 문 뒤로 수잔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 여름 햇빛에 그렇게 그을렸는지 구릿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 멀리 인도양 바다와 함께 맞은 따가운 햇빛이 아니었을까 상상했습니다. 구릿빛 피부와 의외로 잘 어울리는 반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그녀의 나이를 정확히 짐작하기 힘들게 했죠.  


우리는 수잔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저와 세 명의 동료가 모두 함께. 우리는 그날 그 외딴 그곳에서 수잔을 만나기로 운명 지어져 있었던 걸 깨달은 건 우리의 만남이 모두 끝나고 난 한참 후였습니다. 수잔은 네 명의 아시안 여성이 호들갑을 떨며 (자신들의 언어로 알 수 없는 소음을 더 하면서) 한꺼번에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별로 의아해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수잔에겐 종종 그런 일이 있었을 테니까요. 수잔은 최대한 그윽한 눈빛을 담아 우리를 담담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있었나 싶습니다. 수잔은 저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지만, 저희 모두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한 채 주변을 탐색했고 걸려있던 간판에 일제히 눈이 갔습니다. 그리고선 서둘러 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녀의 방에는 생각보다 많은 금액의 숫자들이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저희를 더욱 혼미하게 하고 있었거든요. 미안하지만, 수잔을 만나기 위해 고액의 돈을 지불할 마음은 없었으니까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한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아래 간판에는 5불이라고 적혀 있던데 맞나요?”


수잔은 익히 너희들의 그 얄팍한 속마음까지 모두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마치 저희가 올라올 것을 오늘이 있기 전에 예측하기라도 한 모습으로요. 그녀는 네 명을 단체로 받아 좋아했는데 싸구려 손님이었다는 걸 알고 속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불짜리 일을 가능하면 어떻게 빨리 해치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작업을 위해 한 사람씩 들어 오라고 말하며 커튼이 쳐진 작은 공간으로 자신이 먼저 들어갑니다. 누가 먼저 들어갈까 저희 넷은 마치 심판대에 서는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죠. 그중의 제일 어린 동료가 자진해서 수잔을 따라 들어갑니다. 그녀의 뒷모습은 수잔의 마력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제 그녀와 수잔은 단둘이 마주 앉아 작업을 시작합니다. 저는 호기심도 호기심이었지만, 끌려가는 동료가 본능적으로 걱정이 되어 그들을 문 앞까지 쫓아갔습니다. 다행히도 수잔은 방의 커튼을 닫지 않았습니다. 친절한 수잔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팁이라도 좀 주고 나와야 했는데 딸랑 5불만 주고 온 게 한없이 미안하긴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사람씩 수잔과 차례대로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저희에게 오른손을 내밀라고 했고, 그녀는 저희의 손바닥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곧바로 질문을 요구했죠. 뭐든 물어보라는 넉넉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습니다. 5불에는 두 가지 질문이 가능했습니다. 질문은 두 개만 해야 했지만, 질문의 내용은 제한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질문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이때 깨달았습니다. 불과 5불을 주고, 그러니까 2불 50센트짜리 질문 하나를 만드는 일이 생에 이렇게 진지하고 힘든 일인 줄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몰랐다니요.  


생각해보면 비싼 돈도 아닌데 질문 하나 만들기 위해 그 순간 제 머릿속은 어지러웠습니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하나 온갖 우주 삼라만상의 거대한 주제들이 제 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중에서 단둘만 골라야 하는 선택 장애도 함께. 이 질문을 할까 저 질문을 할까 겨우 2불 50센트를 갖고 250불 정도의 망설임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오가는 동안 수잔을 테스트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질문을 통해 그녀에게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죠. 그녀가 예측 가능할 만한 대답을 끌어내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닌 것을 짜느라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 유학 간 제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은 제 빤한 속을 다 보여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힌트나 단서 및 실마리를 전혀 남기지 않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렇게.


“제 가족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라고요. 이 질문을 던지면서 속으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잔이 과연 내 가족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들어보자 하는 속셈이었습니다. 내가 미혼인지 싱글인지, 자식은 있는지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니 뭐라도 맞추는 게 있으면 그녀의 신령한 기운을 인정해 주리라. 뭐 이런 식으로요. 긴장을 잔뜩 한 채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숨죽여 기다렸죠. 대뜸 수잔은 제가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수잔이 손금만 볼 줄 아는 게 아니라 제 얼굴 뒤에 숨겨진 마음을 읽는 재주도 있었다면 제가 속으로 뜨끔해 하는 모습도 분명 보았을 겁니다. 그러면서 부모님 걱정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하면서 부모는 잘 지내실 거라고 위로를 해 주더군요. 신통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잔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녀를 한치라도 의심하던 마음의 조각이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반신반의하던 마음에서 자세를 고쳐먹으면서 저는 부모님 이야기도 좋지만, 제 가족은 어떤지 말해보라며 “How about my own family?” 의 첫 번째 질문에 딸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이 두 번째 질문이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수잔은 역시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기겠지만, 좋은 남편을 만나서 행복할 결혼 생활을 할 거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손금을 보는 일에도 장사 코드가 있나 봅니다. 아무리 5불이라고 하지만 좋은 말만 해 주자. 뭐 그런 장사 속이 가득한 말 말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을 싫어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다 잘 될 것이다. 앞으로 괜찮아질 것이다. 돈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행복하게 오래 살 것이다. 미래형의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찌푸리고 방을 나설 사람은 없으니까요. 어쩌면 5불은 미끼고, 그걸 미끼로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수잔도 제게 당부했습니다. 내일 꼭 다시 오라고 하면서요. 그때는 카드 점을 쳐 주겠다면서요. 상대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은 후에 복채를 계속해서 끌어낼 계획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찾아가면, 뭔가 구체적이면서도 심상치 않은 일들을 예견해 주는 게 아닌지 무척 궁금하긴 합니다. 아무튼, 저에겐 심지어 이 남편을 떠나지 말고 꼭 붙어있으라는 말까지 하더군요. 하하하. 겉으로는 수잔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꾹꾹 참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웃기던지.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는데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 적어도 내가 수잔을 만나고 온 것 때문에 남편이 저를 책망하거나 불쾌해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안심을 할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수잔의 손금 보는 능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고요.  


수잔은 아이 셋(!)에 노후가 행복할 거라는 막연하게 좋은 얘기들로 일사천리 쌩쌩 달리더니, 마치 동전을 더 넣지 않으면 한창 재미 있을때 게임이 끝나는 그런 모습으로 갑자기 말 수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너에게 들려 줄 이야기는 다 했노라 하는 그런 눈짓으로요. 좋은 얘기 다 해줬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지 하는 얼굴입니다. 네가 일어나야 나머지 친구들 손금을 또 볼 게 아냐 하는 눈치도 함께요.  


순간 저는 아차 했습니다. 저는 제 가족에 대해서 말해 보라는 질문을 두 번째 질문으로 한 게 아니었는데, 수잔의 머릿속엔 이미 5불어치 계산이 끝난 겁니다. 저는 그 질문이 첫 번째 질문에 연관된 딸린(!)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셈 방식은 저와 달랐던 겁니다. 이럴 수가.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질문을 못 하고 허탈하게 자리를 일어서야 했었습니다. 수잔의 얼굴에 2불 50전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면 얼른 돈을 찾아 급하게 쑤셔 넣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잔은 기계가 아니었거든요. 차마 초면에 본 수잔에게 체면을 구기고 2불 50전 더 줄 테니 질문 하나만 더 받아 달라고 할 용기는 제게 없었습니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을 봐서도 그냥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일어설 수밖에 없었죠. 이게 나의 운명인가보다 하는 생각과 함께요. 정작 하고 싶은 질문을 하지 못하는 운명 말입니다.  


무슨 질문을 하고 싶었냐고요? 제가 묻고 싶은 건 물론 제가 지금 가장 고민하고 있는, 아니 저를 가장 고민하게 하는 제 아들들에 관한 거였죠. 그 질문을 돌려서 한다는 게 (수잔의 의표를 찔러 질문을 하겠다는 제 얕은 꾀임에), 그만 정작 중요한 질문을 못 하고 돌아왔습니다.  


수잔을 만난 일도 난생처음 감행한, 옆에 동료가 없이는 혼자서 저지를 수 없는, 역사적인 일이었는데, 그런 엄청난 일을 해 놓고도 정작 가슴 속에 가장 묻고 싶었던 그 질문을 못 하고 나오는 제 발걸음은 절대로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저와 아들과의 관계처럼 우리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주변만을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가 저의 그런 모습을 재밌다고 보는 것도 같고요.  


한편 이런 마음도 듭니다. 차라리 아들에 대해 수잔에게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요. 아들이 앞으로 제 생에 커다란 문젯거리로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수잔이 분명 한마디라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수잔이 아무 말 하지 않은 거라고 저는 믿고자 합니다. 아들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예언도 누군가의 추측도 누군가의 판단도 누군가의 짐작도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 두는 게 가장 희망찬 미래 그 자체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들 얘기를 하지 않은 수잔에게 고마워하렵니다.


아무튼, 수잔과 저의 인연은 거기까지만이었나 봅니다. 그녀를 앞으로 다시 만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설마, 수잔의 예지와 영험으로도 절대 가독할 수 없는 이상한 사이키 아이들은 아니겠죠?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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