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전화를 타고
또 전화 이야기입니다. 전화만큼 로맨틱한 물건도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올까 안 올까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추억이 대부분 있지 않으신가요? 뚫어지라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귀신같이 전화가 걸려 오기라도 하면 깜짝 놀랐던 기억, 그래서 너무 좋았던 기억이 아직도 전화기에는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물끄러미 전화통만 바라보다 하루를 보낸 기억도 있죠. 밤이 늦도록 아무리 기다려도 소리 없이 하루를 삼켜 버리는 무심한 전화기를 보며 우울해지던 기분도 전화가 만들어 준 것이었죠. 별것도 아닐 수 있는데 전화를 받는 일은 늘 누군가가 나를 특별히 지명하여 불러 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뭐 이런 로맨스를 전화와 자연스레 엮게되는 이유입니다.
전화 거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냐고요? 글쎄요.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쩐답니까? 그래서인즉 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잘 걸지 못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전화를 걸기 전에는 항상 가슴이 콩닥콩닥 뛰죠. 좋아해서 전화기로 불러보고 싶은데 그 마음을 전화통에 모두 들킬까 봐 전화를 못 거는 거예요.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내 맘대로 호출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그렇고, 너무 좋아해서 이 사람이 내 전화를 받는 걸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소심함 때문에 또 전화를 못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전화통만 바라보며 그가 나를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무척 소극적인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짝사랑밖에 못 하는 체질이랄까요?
아들과의 사랑도 저만의 짝사랑이라는 깨우침이 이제사 듭니다. 아들의 전화를 받고 보니 제 행태가 짝사랑 수준인 것이 그대로 탄로 납니다.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조차 여태껏 못하고 있었던 거죠. 전화가 걸려 오고 나니 짝사랑이라고 저를 비웃는 따르릉 소리가 귀에 따갑습니다.
며칠 전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도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전화가 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 일찍 걸려 온 전화라서 더 놀랐죠. 시애틀 아침 9시면 한국시각으로는 밤 1시라서 전화가 올거라고 생각지 못하고 있어서 더욱더 화들짝 놀랐습니다. 마치 오래오래 기다렸던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들의 전화를 받는 엄마의 가슴이 이렇게 마구 뛰어도 괜찮은 걸까요?
그 가슴이 뛰었던 이유가 짐작되는 듯해 저는 로맨틱한 감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출근 전, 정확히 아들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 약 1시간 전쯤 아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더랍니다. 보내 놓고도 늘 그렇듯이 답장을 바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도 늦고 해서 오후 늦게나 답장이 오면 오겠지 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음은 물론 심지어 아들이 문자 메시지로도 답장할 수도 있었는데 (아니 그렇게만 해도 그저 황송할 뿐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전화통을 붙잡고 아들이 저를 불렀다는 사실에 저는 식물인간(꽃?!)이라도 된 마냥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순간 늦은 밤 아들에게 급히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나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근데 이 전화가 울리자마자 마치 짝사랑하던 옛 시절로 돌아간 듯 가슴이 설렜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던 순간 제 모습을 보셨어야 합니다. 너무 놀라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허둥대던 모습을 말입니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납니다. 더 웃음이 나는 건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겁니다. 애인의 전화를 받고 일주일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던 시절처럼 말입니다. 짝사랑의 증상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날따라 제가 아들에게 날렸던 카톡의 메시지가 제 평소 대화의 내용에 비교해 멜랑콜리하기는 했습니다. 막상 카톡에 몇 자를 쓰려고 하니 무슨 말을 써야 하나 낯선 이에게 편지를 보내듯 막막했습니다. 어쩌다 쓰는 말이라서 더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요. 단어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몇 줄 안 되는 말을 적느라 한참을 고민했죠. 시작은 잘 지내니? 중간고사 잘 봤어? 로 했다가 그렇게만 적어 놓고 카톡방을 나오기가 너무 진부한 엄마같아서 한 줄을 더 쓰기로 했더랍니다. 고민하고 고민해서 만든 한 줄이 이렇습니다.
“엄마가 자주 연락 안 해도 한국에서 우리 아들 잘 지내리라 믿어.”
별것도 아닌 그 한 줄을 적는 데 무려 3분의 시간이 걸렸죠. 왜 그런 말을 쓰고 싶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화를 자주 안 하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도 싶었고, 그것이 단순히 무심함이나 귀찮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해서 일부러 자제한 행위임을 명확히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말입니다. 언어의 선택도 일부러 한국어를 고집했습니다. 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으니까요. 영어로 문장을 바꾸었을 때 생기는 원래 의미보다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나는 것이 싫었거든요. 아들이 한국어 문장을 적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제 말은 정확하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 마음과 더불어 아들에게 가장 힘이 될 만한 구절을 넣고 싶었습니다. ‘공부 잘해라, 밥 잘 먹어라, 좋은 친구 사귀어라’라는 귀에 식상한 말은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말로 아들의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가능하면 제가 묻고 싶은 말보다 아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좀 느끼하게 들리긴 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 보냈습니다. ‘잘 지내라’라는 말보다는 이미 잘 지내고 있음을 확신하며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과 그 모습에 담긴 아들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동시에 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평소에 하지 않는 ‘우리’ 아들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여가면서 말입니다. 이런 어색한 문체는 아들과의 대화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단어였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적어 놓고 살짝 쑥스러워져서 (짝사랑이 워낙 그렇잖아요),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지 말고 지내”라는 추가 말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 “뭘 하든 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나름 중화해서 한 말이었죠. 중간고사도 끝나고 했으니 점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할까 봐 걱정이되기도 했거든요. 스트레스 너무 받지 않아도 걱정인데 너무 많이 받아도 그건 제가 아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요렇게 말랑말랑한 말을 전했더니 아들이 전화하지 않고는 못 배긴 게 아니었을까요? 저는 감히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르릉 전화기가 울릴 때 저는 그 믿음이 선명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건 분명 말의 힘이 상대방에게 전달 된 것이라고. 하하하. 이렇게 제멋대로 사랑을 확대해서 상상하는 것도 짝사랑하면 갖게 되는 고질병일 수 있겠죠.
정작 아들과 전화기를 사이에 놓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별로 기억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사실이었으니까요. 별 용건도 없이 그냥 엄마를 찾았다는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둡니다. 무척 평범한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잘 지내냐? 시험은 잘 봤냐? 다시 평소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서 엄마가 들려줄 수 있는 말들을 쏟아 놨습니다. 밥은 잘 먹고 있냐? 돈은 아직 많이 남았냐? 운동도 하고 좋은 친구도 사귀라고 했고요. 여름에 혹시 엄마가 나가게 되면 그때 보자고 하고 끊었죠. 생각보다 할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전화가 그래서 불편한 것도 있습니다. 단어를 고르고 다듬고 하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전화이니까요.
아들과의 전화를 끊고 제일 먼저 전화기에 찍힌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 겨우 11분 정도가 흘렀더군요. 아들과 제 사이는 11분 정도가 전부인가 봅니다. 언젠가는 아들과 20분 30분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날이 올까요? 아님, 제 짝사랑은 11분에서 멈추게 될까요? 짝사랑이라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들과의 사랑은 엄마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정석이니까요. 오래간만에 전화통을 붙잡고 다시 시작한 짝사랑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 나이에 누군가를 짝사랑해서 가슴이 어린아이처럼 뛰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가슴에 아들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는 한 엄마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는 증거일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