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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ul 20. 2018

#42.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젖을 떼듯 엄마를 떼다.

문득 초저녁 잠을 자다가 발밑에 자꾸 부딪혀오는 바람이 서늘했기 때문인지 베고 자던 팔이 저려서인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모를 이유로 깼다. 사위가 너무 조용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들과 나는 같은 집에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옆 방에 있지만, 문은 평소처럼 조용히 닫혀 있었다. 누구와 대화하는 듯한 말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게임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들은 온라인 게임을 할 때 가장 수다스럽고 활동적이다. 아이의 입에서 저렇게 많은 단어와 문장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게임을 하지 않으니, 누워서 노트북을 펼쳐 들고 영화를 보는 중이거나, 아니면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아래위로 빠르게 스캔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 녀석도 나처럼 초저녁 잠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함께 깨어 있을 시간에 각각 서로의 잠과 세계에 빠져 지내느라 마주칠 시간이 더 적다.

  

아들이 집에 온 지 벌써 4주째가 다 되어간다. 아들의 일과는 어제와 오늘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비슷하다. 같은 집에 있어도 기척이 없어 아들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때가 많다. 주인이 돌아오면 멍멍 짖는 강아지만도 못한 아들이다. 퇴근 후에 집에 오면 아무개야 집에 있니? 하고 내가 멍멍 짖는다. 아들 이름을 그렇게 먼저 불러 보지만, 외출하고 없거나, 방에 있어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방문을 열고 질문을 하는 내게 제대로 눈을 맞추지도 않는다. 일부러 그러려고 머리를 문 쪽으로 향해 드러누웠는지 모르겠지만. 못 들어오게 문을 잠그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방문을 마음대로 열 수 있게 허락해 준 것을) 감사해야 하나 싶다.


지난 주말이었나? 토요일 오후 늦게 아들은 친구네 집에 가서 자고 온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자신의 방 밖으로의 외출이라 잘 놀다 오라고 하고 남편과 나는 평소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당연히 아들이 집에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 밤중에 집에 돌아왔는지, 자기 방에 버젓이 드러누워 자는 걸 보고 집 안에 도둑과 마주친 것처럼 까무러치게 놀랐다.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는 데 아들이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 기척이 없기는 마찬가지라 아들이 온 줄도 통 모르고 있었다. 밤에야 그렇다 치고, 아침이 되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들이 집에 와 있는 줄 전혀 몰랐으니까.   


남편과 내가 출근하는 아침 시간에 아들은 한밤중 꿈속을 헤맨다. 도무지 밤 몇 시(아니 새벽 몇 시)에 잠을 자는지 모르겠다. 알 길이 없으니 아침에 아들 녀석의 깨어 있는 형상을 보는 일은 4주째 일어나지 않고 있다. 토요일 주말 아들의 기상 시간으로 미루어 볼 때 평일에도 정오는 되어야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할 것이다. 평일과 주말을 동일하게 규칙적으로 보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출근하고 없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아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지내는 걸까? 아침은 건너뛰는 일이 대부분인 것 같고 (퇴근 후 집에 와 보면 부엌에 뭘 먹은 흔적이 없다), 배가 고파지면 정오가 훨씬 지나서 슬슬 먹이를 찾아 거리로 나가는 모양이다. 이건 아들의 신용카드 사용 시간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러니 아들 녀석과 하루 한 끼 저녁 식사 시간을 맞춰 함께 식탁에 앉는 일은 다른 시간대를 사는 사람과 시간을 맞추듯 힘들다. 고작해야 내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저녁 한 끼를 만들어 주는 일인데, 그것마저 아들은 나에게 허락해 주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다. 인류 모두가 합의한 저녁 식사 시간을 자기 맘대로 엉망으로 만든다. 지난 1년을 집 떠나 기숙사에서 살면서 자신만의 생활 리듬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런 아들을 보며 지난 1년간 엄마의 자취라고 한 가닥 그나마 남아있던 밥을 짓는 내 엄마 역할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온 대학생 아들이 내 자식이 아닌 것처럼 낯설다. 사실 밥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하게 느낄 만큼 평소에 밥을 알뜰살뜰 잘 지어 주었던 엄마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아들의 밥에 이렇게 의존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밥마저도 아니라면 아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두려운가 보다. 밥 한 끼가 아니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공통의 삶이란 이제 정말 존재하지 않게 될까 봐 불안하다.     


이 순간 왜 아이에게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이며 시원섭섭한 마음이 드는 엄마의 마음을 상상하게 되는 걸까? 모유를 먹여 키운 아들도 아닌데, 엄마가 지어주는 밥에 의존하던 아이가 어느새 성장해 혼자 밥을 챙겨 먹는다. 엄마 밥을 졸업한다. 엄마 밥을 뗀 것이다. 그렇게 엄마를 완전히 뗄 수도 있겠구나. 아들과 이렇게 점점 멀어져 가나 보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라는 의미의 가족 말고 이제 다른 의미를 찾아볼 일이다.  


어제는 아들과 남편 셋이서 피자집에 갔다. 하필이면 그 식당이 커뮤날 식당 (communal)이어서 같은 일행이 아닌 데도 같은 테이블에 앉아 (마치 학교 식당에 줄지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듯이)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셋이면 그나마 밥을 먹으면서 대화가 덜 오가도 덜 불편한데 (워낙 나와 남편이 주로 떠들고 아들은 밥만 먹을 때가 많다), 다른 일행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과의 대화 없음을 공동 식탁에서 만인 앞에 공개해야 한다.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참고로 이런 식당, 대화하기 싫어하는 아들과 가는 것은 사전에 신중하게 고려해 볼 일이다. 오늘은 점심에 뭘 먹었니?로 시작해서, 오후엔 어디 놀러 갔었어? 등등 매일 같이 아들에게 물어보는 질문에 바닥이 난 지 오래다. 뭘 하고 지내는지 관심사가 뭔지 알아야 대화를 하지, 정말 잘 모르는 사이에 대화하는 일은 먹기 싫은 음식을 남 앞에서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고역이다.


대화는 둘째 치고, 긴 여름을 (여름 학기를 하고 왔는데도 여름 방학은 근 2달이 넘는다) 뭔가 뜻깊은 일로 보내야 하지 않나 옆에서 바라보는 내가 다 안절부절이다. 여행이라고 다녀올래? 네 쌍둥이 동생이 있는 한국에? 아니면 유럽여행이라도 보내줄까? 물어보지만, 아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아들은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무욕의 인간처럼 보인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세상에 관심이 덜했나 싶다. 뭐든 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엄마를 졸라 얻어내고 받아내는 게 내 일이었던 것과는 무척 상반된 길을 아들은 걷고 있다. 새삼 아들이 열광하는 무엇이 있기나 하나 궁금하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집 녀석이 무척 형편없는 아이처럼 들릴까? 객관적으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엄마의 열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덤덤한 캐릭터를 갖고 태어난 것이리라. 사고 안 치고 말썽 안 부리는 우리 집 아들 정도면 잠자코 감사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모 속 썩일 일이야 눈만 돌리면 세상에 다반사로 널려 있으니까.    


그럼, 내가 너무 아들을 범생이로 키웠나? 아들은 이 무더운 여름에 (무더운 여름이란 단지 여름에 대한 예의상 붙인 수식어일 뿐 참고로 시애틀은 전혀 무덥지 않다) 다른 것도 아닌, 학교 수업을 듣고 있다. 비록 자원해서 듣기로 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아들이다. 이미 여름 학기 한 과목을 학교에서 듣고 왔고, 집에 와서는 인터넷으로 수업 하나를 신청해 이 무더운(!) 여름에 공부라는 걸 하고 있다. 공부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한 일은 없지만, 수업은 듣고 있다. 내가 출근한 사이 그 공부라는 걸 나 몰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터넷 수업은 잘 되어가고 있냐고 물으면 내가 알아서 하니 묻지 말란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지만, 내가 알아서 하겠다니 그냥 믿을 수밖에 없다. 하긴, 지난여름 학기 수업 성적을 보면 믿어도 괜찮지 싶다.


그렇게 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나름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 꾸준히 뭔가를 하고 있다. 다양한 식당을 순회하며 점심을 해결하고 있고, 때로는 늦은 오후 해피아워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한다. 혼자 레스토랑에 가서 먹고 싶은 걸 사 먹을 줄 아니 다 컸다. 가끔은 혼자 영화도 보러 가고, 아이쇼핑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시애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전거를 보고 어떻게 타는 거냐고 묻더니, 어제는 라임 바이크를 타고 다운타운에 있는 맛집 버거를 찾아서 다녀왔다고 했다. 오늘은 자기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에 가서 학창 시절 즐겨 먹던 햄버거를 다시 맛보고 돌아왔다.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도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링크를 타고 때로는 우버를 타고 혼자서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시애틀을 돌아다니면서 여름을 나고 있다.

 

아직 대학 1학년인데 하고 싶은 게 없어도 괜찮고, 밀린 잠을 여름에 다 잔다 해도 나쁠 건 없다. 그렇게 무료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하루가 매우 지루하고 느리게 가는 날이 지금 아니고 어느 인생의 지점에 다시 찾아와 줄까? 지구가 천천히 도는 그런 날들도 인생에 맞이할 수 있다면 행운이다. 그런 날을 그리워할 때가 찾아올 때 무얼 그리워할지 아는 거니까. 회상할 날들을 미리미리 기억 속에 예비해 둔다. 하루에 많아야 두 끼, 주로 한 끼만 챙겨 먹어도 영양실조 걸리지 않고 잘살고 있으니 그것도 그리 염려할 일은 아닐 것이다. 워낙 잠자는데 대부분의 열량을 쓰니 일일 성인 필수 열량이 다 필요하지 않으리라. 한밤중에 배가 고프면 부엌에 나와 라면이든 뭐든 찾아 먹으니 엄마가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다. 정말 없다. 은행 잔고에 용돈이 바닥나지 않고, 언제든지 돌아와 늘어져 잘 수 있고 맘껏 지껄이며 온라인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엄마의 관심과 잔소리는 정말이지 녀석에게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고 보니 아들과 살 비비며 지내던 엄마로서의 시간은 그와 나 우리의 인생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어린아이 시절 안아 달라고 할 때 더 많이 더 자주 안아줄 걸 그랬다. 그림책을 읽고 또 읽어 달라고 들이밀 때 피곤해도 더 읽어줄 걸 그랬다. 동물원이든 유원지든 놀러 가기 좋아할 때 지칠 줄 모르고 놀게 해달라고 할 때 더 시간을 보낼 걸 그랬다. 맥도널드 놀이터에서 5분만 더 놀자고 할 때 더 놀려줄 걸 그랬다. 좋아하는 음식을 더 많이 만들어 줄 걸.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추억을 아들과 만들어 놓을 걸. 때늦은 아쉬움이 밀려온다. 아직도 늦지 않았는데 아들과 가족 여행이라도 떠나 볼까? 아들이 싫다는 걸 강행하는 게 아들에게 좋은 일인지, 내게만 좋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내게 좋은 일을 하는 게 나중에 아들에게도 유익해질까? 아들이 좋다는 것을 위해 엄마인 내가 지금 양보하는 게 맞는 걸까?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음만 답답하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만큼 아들이 나와의 시간을 먼 훗날이라도 아쉬워해 줄까? 음… 그건, 내가 내 부모에게 하는 꼴을 생각해 보니 아닌 게 맞을 거다. 다 자신이 주인공인 삶이라서 그러겠지. 그래, 그렇다면 아들도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면 되니 너무 섭섭하지 않기로 하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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