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덜컥 미국 MBA에 합격을 해버렸고, 합격 발표 후 미국 입국이 2달이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와 아이들도 함께 미국에 갈 것인지, 신랑과 치열하게 고민을 했다.
내가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막달이 될 무렵 신랑은 갑자기 지방 발령이 났다. 난 그대로 서울에서, 신랑은 지방에서, 그렇게 떨어져 지내며 난 출산을 했다. 그리고 육아휴직을 하고 다시 복직을 하며 3년을 주말부부로 지냈다. 결국 첫째 아이는 태어나서 근 3년 동안 아빠와 떨어져 지냈다. 그래서인지 신랑이 다시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고 같이 살게 됐지만, 첫째 아이는 아빠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게다가 신랑은 서울 본사로 발령받은 후에도 야근, 출장, 공부로 매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나는 기회만 되면 신랑과 첫째 아이가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 솔직히 10년째 아직도, 계속 애를 쓰고 있다. 이제 큰 아이는 곧 사춘기를 겪을 것이고, 이런 상황을 다신 만들고 싶지 않다.
우리는 경험상, 가족이 함께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신랑과 나, 두 아이 모두 다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경제적인 문제와 나의 Job, 나의 dream에 대한 숙제는 그대로 덮어둔 채, 겁 없이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미국행을 결정했다.
언어의 장벽이 높습니다만,
막상 미국행을 결정하고 나니, 또 다른 숙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이었던 건, 사실 아이들도 아니고, 어제 있었던 일도 깜빡깜빡하는 아들 둘 맘인 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랫동안 영어 공부 할 일이 없다 보니 멈춰버린, 아니 바닥을 드러내는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나의 영어는 거의 20년 전 수능 이후 쓸 일이 없었다. 그 당시 많이들 가는 어학연수를 갈 상황도 아니었고, 사실 외국에 별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토익 점수는 나쁘지 않았고, 그렇게 난 대기업에 입사를 했다. 그 이후로 야근, 회식, 육아로 더 바빴고 더더욱 영어가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영어에 대한 필요나 동기부여가 없다 보니 매번 현실에서 그 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하기에 바빴다. 되돌아보니, 근 10년 아이들에게 책육아를 해준다고, 퇴근 후 매일밤 영어책 읽어준 거 빼고는 영어를 쓸 일이 없었다. 참,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에 미국 입국을 앞두고 큰 아들내미 친구의 엄마를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그 언니가 나에게 말하길, "자기, 미국 간다며? 아이들한테 너무 좋은 기회다. 당연히 영어가 되니까 애들도 데려가고 부러워."라고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겁 없는 자아가 튀어나와 나는 당당히 말했다. "언니, 나 사실 언어의 장벽이 아주아주 높아요."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나니 오히려 시원했다. 지금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었고, 나 스스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가서 충분히 언어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어디서 나오는지 자신감인지, 긍정적인 성격 탓인지, '까짓 거 가서 배우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놓고 살았던'영어'에 대해 '도전'해 보고 싶은 열정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인생의 많은 과제를 뒤로 한 채, 미국행을 결정한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안 가보면 후회할 길인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나의 겁 없는'도전'은 시작됐다.
미국에 도착해서 구름을 보고 가장 많이 감탄했다. 구름이 어쩜 저리도 아찔하게 멋질 수 있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