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때, 울림을 주는 강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둘째를 출산하고 몇 개월 육아휴직을 쓰다 회사에 복직 신청을 했다. 운이 좋게도, 10년 넘게 다닌 회사에서 난 일반 업무뿐 아니라, 강사 역할도 맡게 됐다. 울림을 주는 강사가 되고 싶었기에 업무 이외의 시간을 쪼개 개인적으로 비싼 외부기관 교육도 받고, 주말에는 별도로 공부를 하고, 국가기관 인증 관련 자격증도 땄다. 강의를 위해 수도 없이 연습하고, 실전에 실전을 거듭했다.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더 좋은 강의 자료를 만드느라 잠 못 이루던 날이 많아졌고,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도 완성도 있는 강의 자료를 만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이 그 피로감을 어느 정도 녹여줬다.
울림을 주는 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에서 맡은 업무도 다 해내며 강의 준비도 해야 했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과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알차게 보내기 위해 열혈 엄마 모드로 변신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주어진 하루는 너무 소중하고도 짧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겐 울림을 주는 강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고, 자신감이 가득했기에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나의 열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강의 날짜가 잡히고 나면, 그 이후에는 내 몸의 모든 신경 세포들이 오롯이 강의에 집중되는 듯했다. 오직 강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강의가 시작되면 준비했던 모든 것을 쏟아내며 사람들과 신나게 소통을 했다. 그 무엇도 이 시간만큼 행복할 수가 없었다. 청중들이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강의 후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모습에서 난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전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코로나 시국을 맞이하게 됐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그 어느 회사보다 더 빠르고, 더 철저하게 외부 교육이나 출장을 금지했고, 전 직원들은 팀 내에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의무적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나는 재택근무하는 날이 늘었고,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이들과 집에서 복작복작 지내는 날도 늘었다. 가끔 신랑마저도 재택근무를 하게 되는 날이면, 난 집에서 ZOOM으로 미팅도 하고 회사 일도 하며, 가족들 식사까지 매끼를 챙겼고 하루하루가 더없이 바쁘고 고단했다. 그런데 이때,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그동안 대면하며 소통하던 강의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쭉 걸어가면 끝이 나올까.
신랑이 MBA에 합격하다.
이 무렵, 나도 신랑도 재택근무를 하던 어느 날, 신랑이 중대발표를 했다. 신랑이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미국 MBA에 합격한 것이다. 그동안 신랑이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준비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말 너무 기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다만,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신랑에게 MBA에 가기 위해 미국에 입국해야 하는 날짜가 언제인지 물었다. 2달이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사이에 비자 인터뷰도 해야 하고 일정이 너무나 빠듯했다. 게다가 그 비싼 학비는 어떻게 충당할지, 우리에겐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게다가 우리 부부는 신혼 때 한 약속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은 함께 지내는 거라며, 우스갯소리로 우린 절대 기러기 부부는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신랑과 나, 아이들까지 다 함께 미국에 간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스러웠다. 신랑은 미국에 가면 공부를 할 테고, 공부를 마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내가 굳이 가야 할까? 적어도 내가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게, 가족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에게 안정감을 주고 더 편하지 않을까? 사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원하던 꿈을 놓지 않고 계속 도전해보고도 싶었다.
그때 비록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무슨 오기인지, 열정인지, 그 터널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과연 나는 한국에 남아 계속 내 일을 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신랑과의 약속대로 가족이 다 함께 미국에 가는 게 맞을까. 우리 인생에 정답은 없다. 다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겠지. 후회가 덜한 선택은 무엇일까. 그 날밤, 신랑과 나는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참,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구나!
한국에서 우리가족이 바람쐬러 자주 갔던 서해바다. 가끔은 우리 인생도 바다의 끝자락처럼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