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고 보니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KTX와 탑승구에서의 시간 동안 대략적인 여행 동선과 일정을 계획했다.
이십 대의 나는 없는 돈을 모아 나름 여러 국가를 여행해 왔는데, 한 번도 유럽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비싸다는 느낌도 들었고, 어쩐지 너무 흔한 여행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일을 하면서 언젠가 유럽의 고전 예술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업무 중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할 기회는 많았지만 사실 예술을 감상하는 눈은 일반 대중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늘 의문스러웠다.
대체 예술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인간 사회의 중요한 요소로 존재하는 것일까.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중부 유럽의 풍부한 예술품을 직접 두 눈으로 감상하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2차 목표는 1일 1맥주였다.)
독일에서 체코, 오스트리아,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가장 적당한 동선을 구상해 보았다.
이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1) 과하게 욕심부리지 않을 것 2) 계획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부지런하지는 않으면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을 넘어 강박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이때 말하는 완벽이란 최소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최대의 효율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마다 나는 지나친 후회와 짜증으로 이후의 소중한 시간마저 얼룩 지워버리곤 한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조금씩 명확히 알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좋은 점, 좋지 않은 점, 취향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번 여행에서는 불필요한 후회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즐거워보기로 다짐했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서 비행기 안에서도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무려 열세 시간의 비행을 견디기 위해 나는 몇 가지를 준비했는데, 그중 가장 좋았던 것은 내 최애 유튜버인 원지의 책 <제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와 언젠가 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던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였다.
책과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 중에 나의 열망이 반영되었던 모양이다.
두 번의 기내식과 한 번의 간식이 이어지는 길고 긴 비행 끝에 나는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약간의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간단한 입국 심사를 마치고 기차를 타러 움직였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바로 뉘른베르크(Nürnberg)라는 도시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예매한 티켓을 확인하려 독일 철도청(DB) 어플을 켜보니 갑작스러운 취소 알림이 떠 있었다.
독일 철도의 잦은 지연과 취소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게 닥치니 역시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다른 기차편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오히려 운 좋게 더 빨리 출발하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정신없이 기차에 올라타 캐리어와 배낭을 각각의 자리에 놓고 좌석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러다 보니 너무 목이 말라 식당 칸을 찾아가 물을 한 병 샀다.
알록달록한 내 카드 디자인을 보고는 판매원 아주머니가 웃음 지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기차에 타기 전에 들렀던 화장실에서는 무슨 정신에선지 무려 배낭을 두고 나왔는데, 한 중년의 여성이 "Lady, your bag!" 하며 직접 찾아다 주기도 했다.
짧은 삼십 분 사이에 두 명의 독일 여성에게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도보로 8분 정도 거리에 있던 숙소를 향해 가는 길이 아주 멋졌다.
유럽스러운 성곽을 따라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