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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효 Jan 02. 2023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핫플보단 웜플, 서촌 국립맹학교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지폐의 비밀

지폐에도 '점자'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지갑에 지폐가 있다면, 잠시 꺼내어 눈을 감고 오른쪽 끝부분을 만져보자.

천 원은 점 하나, 오천 원은 점 둘, 만원은 점 셋, 오만 원 권은 선 다섯 개. 손끝으로 오돌토돌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시각 장애인이 지폐를 구분할 수 있도록 조폐공사가 보안인쇄기술로 새긴 점들이다. 하나 더, 천 원에서 오만 원 권으로 갈수록 지폐의 가로길이가 길어져 금액 별 구분이 가능하다.


시각 장애에 대한 오해

시각장애인=전맹? 전맹과 저시력장애

우리는 흔히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을 생각한다. 빛을 전혀 감지하지 못해 깜깜한 세상 속에 사는 시각 장애 유형을 '전맹'이라고 하는데, 전체 시각 장애 유형의 10%를 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은 저시력, 단안실명, 시야각 결손 등을 포함하여 '선천적 혹은 후천적 문제로 시력이 현저히 낮거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저시력 장애'를 가지고 있을 경우 빛을 인지하고 최소한의 윤곽 정도는 알아볼 수도 있다.  

<장애인복지법 규칙 상 시각장애인의 정의>
- 나쁜 눈의 시력 0.02 이하인 사람
- 좋은 눈의 시력이 0.2 이하인 사람
- 두 눈의 시야가 각각 주 시점에서 10도 이하로 남은 사람
- 두 눈의 시야 2분의 1 이상을 잃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담벼락

국립맹학교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국립맹학교 정문 담벼락에는 아이들의 손이 새겨져 있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부터 꽤나 큰 손까지, 주말 아침마다 내가 마주할 풍경이었고 아이들의 인사였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과 직접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담벼락을 지날 때마다 "안녕, 또 왔네요~"하고 반갑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국립맹학교와 국립농학교는 청와대 가는 길 안쪽에 위치해 있다. 나는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쯤에야 집에서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두 학교는 과거 한 학교로 운영될 당시 헬렌켈러가 직접 방문한 적도 있을 만큼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 서촌에 존재해 왔다.  


올록볼록, 글자가 부풀어 오른다고?

부풀어 오르는 펜, 촉각교재 만들기

국립맹학교에서 주로 했던 활동은 '촉각교재'와 '점자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을 손으로 익혀 나가는데, 기업 후원으로 만들어지는 교재로는 한계가 있어 자체 제작하는 교재도 꽤 많았다.

촉각교재를 만드는 일은 흡사 미술시간 같았는데, 가장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부풀어 오르는 펜'이었다. 펜으로 쓰고 열을 가해주면, 펜이 부풀어 올라 아이들이 손으로 글자를 만질 수 있다.

점자책의 경우 워드를 입력하고 나면 점자로 변환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일련의 규칙이 있어 이를 지켜서 정확히 타이핑해야 했다.('훈맹정음(訓盲正音)'으로 불리는 한글 점자의 경우 1913년 제생원(맹학교의 전신) 교사로 취임한 박두성 선생님이 7년간의 노력 끝에 1926년 창안한 것이라고 한다.)


시각 장애인이 컴퓨터도 하고, 수학도 한다고?

저시력 장애 친구들을 만나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점프업 정보교실'을 통해 저시력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만났다. 국립맹학교는 본교인 서촌 외에 용산캠퍼스가 있는데, 이곳은 맹학생들과 졸업생을 위한 ‘이료 교육시설’이 갖춰져 있다. (안마, 마사지, 지압 등 일종의 직업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영상 제작을 맡아 아이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담을 수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노래를 들으며 송곳같이 생긴 '니들'로 종이에 가사를 입력하고, 직접 쓴 점자를 손으로 읽으며 노래하는 친구를 담기도 했고, 소리 안내를 통해 컴퓨터 활용법을 익히는 친구들도 만났다.


재우는 수학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넓은 마을'은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포털사이트인데,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재우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범죄 수학: 리스 하스아우트'라는 책을 찾으며 기뻐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왜 수학이 좋아요?" 대답은 단순했다. "재밌잖아요!" 응용수학도 재밌지만 순수수학이 더 좋다는 재우와 대화하며, 나는 이 친구가 훌륭한 수학자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당시 만든 영상 중 재우의 인터뷰 부분을 기록한다. 망설임없이 시원시원했던 수학에 대한 재우의 대답은 인터뷰어로써 너무나 명쾌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연대의 힘, 웜플레이스 서촌

코로나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믿는다. 광화문, 그리고 서촌은 단순히 업무지구, 혹은 관광지구의 역할만 하지 않는다. 오랜 역사가 흐르는 이곳에 사람 냄새도 함께 흐른다.

국립맹학교 근처에 있는 상점들을 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학교 앞 빵집 아주머니는 갈 때마다 익숙한 듯 맹학교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주머니의 자녀들은 맹학교, 농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한지 오래되어 더 이상 봉사자가 아닌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맹학교 친구들이 좋아하는 단골 중국집도 근처였으며, 한 화원은 과거 맹인 친구의 전자기기를 고쳐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본업보다 전자기기를 고쳐주는 곳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맹학교와 농학교가 위치해 있는 학교 골목에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아이와, 그러한 아이의 걸음을 함께 지켜보는 부모, 이를 조용히 따뜻하게 안아주는 동네 주민들이 있다. 요즘 맛집과 편집샵 등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촌이지만, 이 공간이 '웜플레이스'로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란다.

길을 가다 보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장소일 수 있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손을 내민다면 그곳이 어디든 조금은 더 풍요롭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지난 서촌의 100년이 그러했듯이.

국립맹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그림. 나는 세계지도 위에 친구들이 있어 좋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모습을 기대한다.


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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