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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hyun Hwang Jul 15. 2019

IMF의 추억

지나간 일은 왜 모두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일까. 그것은 다가올 미래가 불확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고통으로 가득한 시절도 나름 반짝이던 구석이 있었다고 회고하지 않는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연민이라 생각한다. 온나라가 집단적 고통을 당한 사건이 IMF로 통칭되는 1997년의 국가 외환위기다. IMF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는가. 이미 그 과정은 소상히 밝혀져 있으니 세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들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공격적인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발이라도 늦으면 오히려 사업기회가 날아갈 판이니 돈만 구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려 들었다. 자연히 단기 채무, 즉 만기 1년미만의 융자가 난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단기채무를 끌어다 쓴 이유는 융자기간이 만료되면 자동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이라는 말은 좀 어폐가 있는데, 은행이 자의적으로 연장이든 중단이든 결정할 수 있지만 그 당시까지는 정말 기업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즉 이자를 잘 갚는 한 자동연장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1997년 하반기 우리나라의 달러 보유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때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일본계 은행들이었다. 외화표시 대출의 약 1/3을 점하고 있던 이들은 무차별 채권회수에 나선다. 당연히 연장될 것으로 생각했던 대출을 갚으라고 하니 난감할 수 밖에 없없다. 1997년 9월부터 11월까지 세달간 일본계 은행들이 회수해간 채권은 120억달러 규모였다. 치명타였다. 일본이 움직이자 관망하던 다른나라들도 움직였다.


97년의 외환위기는 여러가지 원인이 겹쳐서 발생한 우리나라 초유의 국가 위기 사태였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대비를 잘하면 막거나 피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의 역량이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적어도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 등에 칼을 꽂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제 다른 종류의 칼을 들고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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