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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hyun Hwang Sep 13. 2019

신문의 부활을 기대함.

활자는 말과 달리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말은 흩어져 버려 남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사족이 너무 많아서 본말이 전도 되기도 하고 듣는 사람의 확증편향적 기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신뢰도가 한참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오죽하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것으로 증거능력이 상실되겠나. 그러나 글은 다르다. 종이 위에 인쇄된 문자는 글을 쓰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과 대면하는 순간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을 얻는 유기체가 된다. 그래서 글은 강하다.


책이야 개정증보편으로 수정 보완할 수 있지만 신문은 또 다르다. 이미 확정된 그 날짜에 지면에 실려 나가면 줏어담을 방법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정정보도를 게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신문 스스로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라 어떻게든 정정보도를 하지않는, 정정보도를 하더라도 두리뭉실하게 우리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취재원의 오류인데 우리가 그 이면까지 확인못한 것은 잘못이다 식이 고작이다. 반론보도라는 것도 있다. 특정한 사실이나 주장에 대해 반대되는 내용을 기사화하는 것이다. 이것도 법원의 결정에 따르는 것일뿐 신문이 스스로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론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은 일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신문이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신문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신문에 대한 신뢰는 활자의 힘과 더불어 사실중심주의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것으로 축적되어 왔다. 그래서 간혹 옥의 티같은 오류가 있어도 우리는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정도로 여긴다. 단순 실수일뿐 고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겨 사실 확인이 부족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신문이 위기다. 위기는 진작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전의 위기가 시장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위기라면 지금의 위기는 신문스스로 자초한 위기다. 신문의 힘을 대변하는 것은 활자이지만 활자를 살아움직이게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과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외면하고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주장이 강해질때 신문은 죽어간다. 그래서 지금 맞고 있는 신문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사실을 추적하는 것이 기자의 업이라 아무리 영특한 독자라도 기자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독자 100명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수의 집단 지성 혹은 집단 정보력은 기자 1인의 노력보다 훨씬 강하다.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가던 이전의 독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상당수 독자는 이제 조선일보를 보면 똑같은 사건을 다룬 한겨레를 찾아본다. 오마이뉴스를 접하는 독자도 동시에 동아를 찾아본다. 지금 신문이 처한 환경이다. 신문이 절대 신뢰의 상징이던 시절은 지나갔다. 자기들만의 울타리안에서 쳐다보는 하늘을 보고 맑다 흐리다 하는 것은 아닌지 지성인다운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문의 부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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