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내내 지붕을 두드리며 떨어지던 도토리는 찢겨나가는 달력과 함께 멈춰 버렸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야 하는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으나 달포 지붕을 다닥거리던 도토리의 깊은 내막을 내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떠나야할 도토리를 모두 떠나보낸 나무는 이제 남은 이파리마저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또 한장의 달력을 찢어낼쯤 그들의 이별은 마무리되어 있지 않을까.
기온이 훅 떨어졌다. 9월에 대롱대롱 메달려 있던 여름도 흔들어 대는 시간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듯 시월과 함께 조용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내가 아끼는 바머자켓(Bomber Jacket)을 꺼냈다. 이태전 그런 걸 왜 사냐는 타박을 들으며 기어이 사고야 말았던 나의 애장품. 어느날 식당에서 누군가가 자켓이 참 좋다며 어디서 샀냐는 물음에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 그때 아마 나는 속으로 이랬을텐데, 옷이 아무에게나 어울리겠소 라고.
도토리는 마당에 지천이다. 칲멍크가 월세도 내지않고 우리마당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것도 이 물반 고기반 같이 늘부러져 있는 도토리 덕분일텐데 나는 별로 그들을 쫓아낼 생각이 없다. 덩치가 너무 작아서 손아귀에 들아올까 말까하는, 황금색 몸통에 힌줄이 쭉쭉 가 있는 이놈들을 보면 귀엽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우리집의 칲멍크 가족은 날래고 부지런하다. 나는 그들이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후다닥 뛰어갔다 또 후다닥 뛰어오고, 사랑놀이도 뛰어다니면서 하는 듯 하니 가히 그 부지런함이라니.
바쁜 칲멍크와는 달리 사슴 가족은 유유자적하다. 우리집을 조석으로 방문하는 저 사슴 가족은 얼마나 뼈대있는 가문인지는 몰라도 지난 봄 가문을 잇기위한 2세 불리기에 골몰한 것이 틀림없다. 두세마리 뿐이던 무리가 가을에 8마리로 늘어난 것이다. 그중 압권은 몸에 아직 힌점이 박혀있는 새끼 사슴이다. 우리 가족은 그넘을 꽃사슴이라 부른다. 사주경계에 열심인 제 엄마와는 달리 이넘은 천방지축이다. 엄마와 있으니 세상 무서운게 없는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