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안 위어링; 남들이 말하는 당신 VS. 당신이 말하고 싶은 당신-
간밤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치이고 치이고 또 치였는지. 아침나절에 코피를 다 쏟았더랬다.
나의 친애하는 적들은 하나둘씩 차례대로 꿈에 나타나 저마다의 기질과 요구대로 나를 골려먹었고 나는 늘 그렇듯 지는 사람에게 또 지고, 속임을 일삼는 자에게 또 속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에게 벙어리처럼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밤새도록 끙끙 열만 올렸다.
그러다 보면 여지없이 이가 아프다. 어금니를 하도 꽉 깨무는 통에 잠에서 깨면 곧장 입에 들어간 힘부터 빼야 한다. 어찌하여 나는 꿈에서 조차 여전히 나일 수밖에 없는지...... 스멀스멀 다시 열기가 오른다.
무거운 눈두덩이의 무게를 느끼며 간신히 실눈을 뜨고는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더듬고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6시 20분. 아직 기상시간까지의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는 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힘없이 중얼거린다. "오 주여, 내 영혼을 보살펴주시옵소서"
나는 꿈속에서 못다 한 일을 마저 이루기로 한다. 그것은 되돌리기와 재생을 반복하며 통쾌한 장면을 삽입하는 일. 나는 침착하고 여유있게 그러나 날카롭고 서슬퍼런 입담으로 너를 찌르고 너도 찌르고 너 역시 찔러 버린다. 무수한 너는 속절없이 고개를 떨군다.
아아, 참으로 말끔한 죽음이로다!
현실 집입하기 5분 전의 승리이다.
사람들이 날더러 마음이 넓다고 한다. 나는 그저 뭐든 혼자 삭히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라 볼멘소리가 드물 뿐인데. 나는 저들의 믿음대로 진실과는 상관없이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꾸역꾸역 삼켜 온 고민거리를 내 앞에 꿀렁꿀렁 토해놓고 가는 사람들은 나를 제 전용 변기처럼 편안해하다가도 별안간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 나의 잠잠함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이따금 나의 그 잠잠함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지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한 주먹 가득 자갈을 움켜쥐고서 내 면상에 대고 내립다 던져 버리기 일쑤다. 내가 목매는 모든 가치를 값 없이 여기며 동정하거나 가짜로 둔갑시키는 것으로, 아니면 덮어놓고 내 모든 걸 과대평가하고 시기하는 방식으로 나를 찌른다. 그러면 나는...... 그럴 때면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요란한 물수제비에 하염없이 술렁이는 수면처럼 고통으로 일렁이는 분을 꿋꿋하게 참아내는 것 말고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운데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그 아이는 나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평안도 되찾았을까? 정말로 그 아이는 여직 나를 두고 착해빠진 애로 단정하고 있을까? 내가 저보다 늘 못났고 앞으로도 저보다 늘 못날 애라는 데 한 점의 의혹도 갖지 않을까?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짓게 하는 걸까?
나는 위어링의 (Gillan Wearing)의 작품을 떠올려본다. <당신이 말했으면 하고 남들이 원하는 것을 적은 표지가 아니라,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적은 표지 Signs that Say What You Want Them To Say and Not Signs that Say What Someone Else Wants You To Say>(1992–3) 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인 억압과 자아의 상태를 꼬집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외양, 태도로부터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얼마나 오류 투성인지를 보여준다.
말쑥한 슈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는 실은 절망스럽다. 다부진 인상의 젊은 남자는 삶의 활기를 잃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경찰관은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다.
이 같은 고백은 당혹스럽다. 사진 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과 마음 상태는 보는 이의 기대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아아, 우리는 얼마나 사람의 외모와 태도에 대한 가정들을 바탕으로 성급하게 타인의 내적인 삶에 대한 가정들을 만드는지.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분류하고 가볍게 단정하곤 하는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제멋대로 제단 해놓고 잘도 아는 척은.
나는 이어서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착한 아이 나쁜 아이 Good Boy Bad Boy>(1985)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옷을 잘 차려입은 두 명의 배우들을 각각 보여 주는 두 개의 컬러 비디오 모니터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한 배우는 꽤 젊은 흑인 남성이고 다른 한 배우는 중년의 백인 여성이다.
"나는 착한 아이였다. 너는 착한 아이였다. 우리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그것은 좋았다....... 나는 나쁜 아이였다...... 나는 살아있다! 너는 살아있다! 이것이 삶이다!....... 나는 놀이를 한다. 너는 놀이를 한다. 이것이 놀이이다!......." 이 두 사람이 내뱉는 100개의 구절들은 계속 반복된다. 처음에는 그 구절들이 평탄한 어조로 똑똑히 발음되지만 점차 진행될수록 어조와 강조점과 긴박감에서 점점 다양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배우들이 말하는 속도도 점점 달라져서, 루프형식으로 반복되는 두 비디오 모니터의 진행순서는 시간적으로 점차 서로 어긋나게 된다. 점점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함에 따라 배우들은 마치 우리에게 무언가 -아마도 그들의 진정성- 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며, 두 배우가 동시에 같은 대사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흡사 그 두 배우들이 상대방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끝에 가서는 배우들이 대단한 증오에 사로잡힌 양 소리를 지른다.*
별안간 나도 따라 소리치고 싶다. 발끈 성을 내며 소리치고 싶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나는 말이지...... 네가 나랑 비교함으로써 자신감을 얻는 게 싫어! 나는 네가 나를 동정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게 싫어! 나는 네가 나를 함부로 착하다고 여기며 이것저것 부탁하는 게 싫어! 나는 네가 나를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게 싫어! 바닷물 마신 것처럼 해소되지 않은 갈증, 바닥에 엎질러진 콜라를 밟아서 걸을 때마다 끈끈하게 따라붙는 불쾌감, 가시가 있는 호의. 사실은 이런 개운치 않은 찜찜함을 너에게 선사하고 싶어. 단지 그게 뜻대로 안 될 뿐이야.
사람들이 아는 나는 약간씩 다른 나다.
*메튜 기이란, 이해완 옮김, 『예술과 그 가치』, 북코리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