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누구도 나에게 시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때는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은데, 정작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고대부터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이고 물리학적인 시간의 존재를 규명하는 일은 여전히 묘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경험한다. 태양이 뜨고 짐에 따라, 계절이 바뀜에 따라, 사물의 외형이 변함에 따라, 출생과 죽음을 목도하며 우리는 시간은 인지한다.
허나 누구나 시간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시간의 의미와 속도가 동일하고 일정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유명한 그림 <비, 증기, 그리고 속도>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고 믿은 기존의 시간관념을 통째로 뒤엎는 근대적 사건을 보여준다.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1844 18세기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유럽 전반의 사회와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기술혁신의 정점은 철도였고 이 철도의 시대가 열리자 근대인들의 시간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 그림 <비, 증기, 그리고 속도>를 보자. 지금 막 우렁찬 굉음과 뜨거운 증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달려온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기차를 무겁고 장엄한 에너지가 에워싼다. 성난 괴수처럼 무섭게 돌진하던 기차는 눈깜짝 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온 감각을 총 동원하여 포착한 이 생생하고도 비일상적인 사건은 화가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기계적인 실체라고 여겼던 시간관념에 의심을 품게 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지금은 황당한 소리로 들리지만 터너와 동시대에 산 사람들은 달리는 기차 안에 탄 승객들이 시간의 빠른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내장이 파열될 거라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웬걸, 이들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경험한 시간은 도리어 더디게 흘렸다.
이처럼 묘한 시간의 수수께끼는 당대의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까지 사로잡았다. 심리학자 칼 융은 정상과학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이를테면 인과적 질서가 거부되고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는 등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의 리듬'을 논의 하였다. 이를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탁월하게 묘사했다.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마치 열이 닿은 치즈처럼 흘러내리는 시계 그림은 달리의 대표적인 작품 <기억의 지속>이다. 화가가 저녁 식사메뉴로 나온 말랑한 까망베르 치즈를 보고 착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껏 늘어진 시계는 더디 가는 시간에 대한 지겹고도 무료한 감정을 보여준다. 도무지 어떠한 감각적인 사건일랑 없는 상태, 좀체 끝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 공허의 지속은 정처 없는 진공상태의 무한한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붉은색 회중시계에 들러붙은 개미며 그 옆의 늘어진 시계 위에 앉은 파리며 모두가 붕괴된 시간 속에서 허덕인다.
그런데 저 멀리 푸른 바다와 태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절벽이 보인다. 달리가 유년시절에 살았던 바닷가 마을 피게레스 풍경으로 전경에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달리는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현재의 고통스런 시간을 잊으려 했던 것일까?
한편 해안선을 경계로 낮과 밤이 갈리고 현실 풍경과 초현실 풍경이 대치하고 있는 이 그림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칼 융의 비인과적인 연결 원리의 시각적 자료로서도 거론된다. 곧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던 고전역학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뒤바꾸어 놓고,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것으로서 여겨지던 시간의 의미를 전복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시간 노마드
고유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자가 항상 시간을 잃어버리고 늘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결단코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고 '언제나 시간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인 면에서 고유한 실존이 지니는 탁월한 특성이다(하이데거).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트의 윤리 강령이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라' 였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윤리 강령은 '남들보다 빨리 성과를 내라'가 아닐까?
시간이 곧 돈이 되면서 현대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점점 더 시간을 볶아댄다. 매일같이 일에 가정에 학업에 분주하게 매달리지만 시간은 언제나 빠듯하기만 하다.
하이데거는 이 시간 빈곤자들의 증세를 가리켜 '머무름의 부재'라고 진단하였다. 고속 성장과 고득점을 위해선 가속화를 내야 하다 보니 느린 것은 참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성과는 기다리기 힘들다. 입버릇처럼 '나는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며 초조함과 조급함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여기 쉼표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가 있다. 일본 모노하 운동의 주축으로 인정받는 화가 이우환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시리즈이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1976
그의 초기 작품 <선으로부터>(1976)를 보면 수많은 머리들이 위를 향하여 돌진한다. 붓에 물감을 묻혀서 위에서 아래로 선을 한 번에 내리그을 때, 종이에 처음 닿은 붓 머리에는 물감이 많아서 진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옅어지다가 점점 사라진다. "마치 혜성이 꼬리를 달고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가다가 곧 사라질 것 같은 광경이다"(심은록).
또 다른 작품 <선으로부터>(1981)에는 화폭의 가장자리에서 출발한 선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질주한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1981 ...... 으로부터(from)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로까지(to)도 생각하게 되는데, 이우환의 작품에선 보이지 않는다. 원인 발생론적 출발론적인 제시는 있지만...... 로까지와 같은 목적론적인 암시, 목적인, 목적지 등은 전혀 없다(심은록).
화폭에는 무수히 많은 점과 선이 모여 자신들의 존재 전략을 구상하지만 화폭을 튕겨나갈 듯한 질주는 공연히 공중만을 과열되게 돌뿐이다. 끝없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중심을 갖지 않는 점과 선들이 빠르게만 뻗어나가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시간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딘지도 모를 목표점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하는 세상엔 시간의 중력이 파괴된다. 앞서 언급한 하이데거를 다시 소환하면, 시간을 잃어버리는 자는 자기 세계도 잃어버리게 되므로 결국 실존의 파괴에까지 이르게 된다.
조급함의 시대는 향기가 없는 시대(한병철)라 했던가. 다양한 눈 맞춤과 관계망을 잇는 과정이 생략되면서 우리는 향기를 입을 세가 없다. 마들렌을 먹다가 잃어버린 시간을 향수한 프루스트의 시간 향락을 이해하지도 누리지도 못한다. 어쩌면 시간의 간격 속에 멈춰 서서 과거를 소환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에 빠지느라 우물쭈물, 머뭇머뭇거릴 때 우리의 삶은 더 의미심장한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참고문헌]
강성화,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울대 철학사상 연구소, 2006.
뤼디거 자프 란스 키,『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김희상 옮김, 은행나무, 2016.
이우환,『양의의 예술』, 심은록 엮음, 현대문학, 2016.
한병철,『시간의 향기』,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