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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Feb 17. 2020

파리지앵의 여가(1)

-르누아르, 메리 커셋, 드가; 무도회, 극장, 경마장 관람-

무도회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어느 화창한 주말의 오후. 파리의 젊은이들이 몽마르트르 언덕 위로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아가씨들은 평소보다 더 공들인 화장과 신경 써서 고른 나들이 옷을 빼입고 수많은 얼굴과 수많은 인연을 만나게 될 설렘과 흥분을 가득 안고 왔다. 사내들은 용기 있고 점잖은 매너로 아리따운 여인들과 춤을 추고 허물없는 지기들과는 진창 술을 마실 생각에 한껏 부풀어 왔을 테다.

 작품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다. 밝은 색채와 화사하고 생기 있는 화풍으로 유명한 그의 그림답게 인물들은 따스한 햇살이 빚어내는 알록달록한 색점으로 빛나고 표정 또한 명랑하다. 아름다운 왈츠의 선율과 유쾌한 웃음소리 그리고 경쾌하게 부딪히는 유리잔 소리가 화면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시골의 댄스>, 1883

 물랭 드 라 갈레트는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있던 야외주점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민들의 혁명 정부인 파리 코뮌(Paris Commune)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보다시피 그림이 반영한 파리의 현재 모습은 혁명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고 삶의 여유와 기쁨으로 가득하다. 르누아르이러한 파리지앵의 근대적 세련미를 엿볼 수 있는 놀이문화와 여가생활을 여러 화폭에 생생히 담아냈다.

 <부기발에서의 댄스>, <도시의 댄스>, <시골의 댄스>는 젊은 남녀가 즐겁게 춤을 추는 장면을 실사 크기로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은 르누아르의 친구이자 화가인 폴 로테이다. 싱그러운 봄날, 폴 로테는 밤나무 밑에서 한 여성과 춤을 추었다. <시골의 댄스>에 등장하는 여성인데 화사한 꽃무늬 드레스에 당시 유행하던 손부채를 손에 들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즐겁다. 그녀는 훗날 폴 로테의 아내가 된다.

 도시와 시골 할 것 없이 무도회장은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좋은 사교의 장이 되었고, 정말로 그곳에서 자신의 반려자를 찾은 이들이 있었다.





극장 

메리 커셋, <오페라를 보고 있는 검은 옷의 여인>, 1878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뛰어난 재능으로 높이 평가받는 여류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은 당대 모더니티의 주요한 한 면모를 잘 포착하고 있다. 작품 <오페라를 보고 있는 검은 옷의 여인>을 보자. 전경에 크게 그려진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한 손엔 부채를 쥐고 다른 손엔 망원경을 들고 공연을 관람하는 중이다. 흥미롭게도 이 여인의 건너편에 도 한 남성이 똑같이 망원경을 들고 있는데, 그는 공연이 아닌 극에 열중하는 이 여인을 훔쳐보고 있다.

 이와 같은 화면 구성은 당대 극장에서 이루어지던 사교적 네트워크의 생성 방식에 대한 회화적 설명이다. 당시 극장은 사람들과 친목을 쌓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도시 내의 역할 공간으로도 작용했다. 극장의 특별석은 사업상의 협상을 마루리 짓거나 예술과 문학, 스포츠와 정치에 관해 토론을 즐기거나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성공담과 연애사를 자랑하는 부유한 사업가들의 만남의 장소로 기능했다.1

루이 베루 , <오페라 가르니에의 계단>, 1877

 특별히 화려한 외관과 무대 공간에서 시청각을 아우르는 거대한 버라이어티 쇼인 오페라는 파리 부르주아가 가장 애호하는 예술 장르였다.

 이들은 17세기 바로크 궁정미술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웅장한 스케일과 사람의 눈길을 끌만한 현란한 것들을 오페라에서 발견한 것이다. "반짝이는 조명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화장실, (...)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의 영향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행복을 표현하는 이곳은 수준 높은 예술에 대한 경의를 상징"했다.2

 이처럼 부르주아가 오페라를 각별히 좋아하는 이유를 두고 저명한 예술사회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정신성이 결핍될수록 표면적인 위대성을 과장하고자 하는 심리를 바탕으로- 세속적으로 성공한 부르주아가 자신에게 결여된 정신적 고상함 내지는 품위를 외관상의 거대함을 입음으로써 만회하고자 한 야망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경마장

에드가 드가, <경마장의 마차>, 1869

 경마장은 부르주아에게 매우 인기 있는 유희의 장소였다.

 마네와 세잔을 비롯하여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친구이자 미술평론가였고 우리에게는 문필가로 잘 알려진 에밀 졸라는 그의 유명한 소설 『나나』를 통해 당시 유산계급이 얼마나 경마장을 자주 찾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위험천만한 로맨스가 일어나는 장소도 바로 경마장이었다.


 소설나나』에서, 경마장 근처에는 마치 부드러운 벨벳 양탄자 같은 넓은 풀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라는 대목은 에드가 드가의 그림 <경마장의 마차>를 연상시킨다.

 그림 속 초원은 노르망디의 메닐 위베르의 사유지인 인근 아르장탕 경마장을 나타낸다. 당시 경마는 나폴레옹 3세가 영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왕의 주도 하에 블로뉴 숲 안에 대규모 관중석을 갖춘 경마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경마에 푹 빠졌던 황제 때문에 부르주아는 물론 파리의 사람들에게 경마는 주요 구경거리였다(박희숙).

 그림 전경에 그려진 인물들은 주말을 맞아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모습이다. 오늘날 고급 세단에 해당하는 사륜마차를 타고 경마장을 찾은 이들은 중산층 가족이다. 분홍색 모자를 쓴 여인이 잠든 아기를 무릎에 눕혀놓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노란색 양산을 받쳐 들고 아이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여인은 아이를 돌보는 유모이다. 검은색 실크 모자를 쓰고 잿빛 정장을 입은 남성은 집안의 가장으로 마차의 앞자리에 서서 말의 고삐를 채 이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이 남성의 이름은 폴 발팽송으로 드가의 친구이자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에드가 드가, <관중석 앞의 경주마>, 1866-68

 드가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시 인상주의의 물결에 동참하기는 했어도 평소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를 존경하였고 그의 화풍을 따라 훈련한 탓에 동료 화가들과는 추구하는 화풍이 사뭇 다르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보이는 찬란한 햇살과 윤곽선 없이 그려진 인물들, 마치 웨딩케이크처럼 화사하고 부드럽게 부서질 듯한 풍광은 드가에게 와서 명료한 붓터치와 사실적이고 분명한 선의 형태로 되살아 난다. 드가의 인상주의는 순간적인 빛의 변화보다는 순간적인 동세의 변화에 초점을 둔다. 그가 무용수를 유독 많이 그린 것도 바로 이러한 변화의 역동성을 회화의 중점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물의 동세를 관찰하기 위해선 발레교습소만큼이나 경마장 또한 매력적이다. 뜨거운 열기와 함성으로 물결치는 관중들과 부우연 흙먼지를 날리며 번개처럼 달리는 경주마는 드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스케치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으리라.

 드가의 그림 <관중석 앞의 경주마>는 다음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된 깃발이 장대 끝에서 펄럭였다. 말들이 한 마리 한 마리 마구간 일꾼들에게 끌려 나왔다. 팔을 늘어뜨리고 안장에 앉은 기수들의 모습이 햇빛에 밝게 빛났다 (...) 종소리가 울려 말들이 경마장으로 들어간 것을 알리자, 군중이 긴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나는 더 잘 보려고 물망초와 장미 꽃다발을 발로 밟으며 사륜마차의 걸상 위로 올라섰다"(에밀 졸라,『나나』)


 관중석에 빽빽이 들어찬 군중들. 그 흥분의 도가니에서 예쁜 아가씨들은 까치발로 서서 늠름한 기수들의 얼굴을 훔쳐보고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들은 수백 프랑의 돈을 걸고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경주마가 달리는 것을 지켜볼 때는 젊잖은 체면도 불사하고 야수와 같이 고함을 쳐댔다. 특히 영국과의 경주가 벌어질 때는 그 열기가 더없이 격렬했다. 영국을 타도하라며 여자들은 양산을 휘둘르고 남자들은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윽고 경주마가 결승전에 들어올 때 터져 나오는 그 뜨거운 환호성이란!




1)홍석기,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 생각의 나무, 2010.

2)위의 책에서 참고.


[참고문헌]

에밀 졸라, 『나나』, 김치수 옮김, 문학동네, 2014.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백남청, 염무웅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9.

홍석기,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 생각의 나무, 2010.

박희숙, https://www.sciencetimes.co.kr/?news=19%EC%84%B8%EA%B8%B0-%EB%B6%80%EB%A5%B4%EC%A3%BC%EC%95%84%EC%9D%98-%EC%82%AC%EC%B9%98%ED%92%88-%EB%A7%88%EC%B0%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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