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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Oct 28. 2020

파리지앵의 여가(2)

-드가와 카유보트; 윈도쇼핑과 도시 산책자-

산책

에드가 드가, <콩코르드 광장>, 1875

 말쑥한 연미복 차림에 중절모를 쓴 신사가 꼬마 숙녀들과 함께 광장을 걷고 있다. 입에는 담배를 문 채 심드렁한 표정의 신사는 지적이면서 품위가 있어 보인다. 겨드랑이에 긴 우산을 끼운 채 뒷짐 지며 걷는 폼에서 여유로움도 묻어난다. 신사의 양 옆에는 쌍둥이처럼 똑 닮은 두 자매가 똑같은 옷과 똑같은 모자를 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동생보다 한 뺨 정도 키가 큰 언니의 손에는 애완견의 목줄이 쥐어져 있다. 이제 막 화면에 등장한 사내가 이들을 곁눈질한다. 멀리, 마차가 달그락 거리며 광장을 가로지른다. 그 너머로 화려하기로 소문난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되고 있다.

 작품 <콩코르드 광장>은 인상주의 화가이자 대중들에게는 익히 '무용수의 화가'로 잘 알려진 에드가 드가가 길을 걷다 마주친'우연한 만남'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 신사는 화가의 친구이자 미술 감정가인 레픽 자작이고 꼬마 숙녀들은 그의 두 딸이다.

 이 그림은 화면 중심의 텅 빈 공간과 원근법의 제거, 인물의 전신을 다 그리는 종래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무릎 아래를 댕강 잘라버린 과감한 구성이 돋보인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유행한 일본 목판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진과 연관이 깊다. 드가는 사진의 특징을 회화로 끌어와 마치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대상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그렸다. 흡사 오늘날의 스냅사진을 보는 듯 생생한 현장감이 다.



윈도우 쇼핑

억수같이 내리 퍼붓는 비가 내게 심술을 부린다. 그러면 슬쩍 아케이드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 천장이 모두 유리로 덮여 있는 상점들로 종횡으로 뚫려 있어 (...) 이러한 아케이드의 일부는 아주 우아하게 지어져 있으며, 악천후나 이처럼 휘황하게 빛나는 불빛으로 한껏 밤의 정취를 돋우는 밤이면 이곳을 찾아와 한번 산책하고픈 욕망을 부추긴다. - 죽 늘어서 있는 휘황찬란한 상점들 말이다(에두아르트 데브리엔트,『파리에서 온 편지』)


구스타브 카유보트, <비 오는 날의 파리 거리>, 1877

 <콩코르드 광장>의 레픽 자작처럼 오후 한나절에 유유자적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시간과 돈이 있는 계층임을 암시한다. 19세기 중반 이래로 신흥 지배계급으로 급부상한 부르주아들은 한껏 멋을 낸 차림으로 근대화된 파리 거리를 산책했다.

 이 '여유로운 걷기'는 -일과 생존을 위한 걷기가 아닌- 이미 18세기 후반 중산계급층들 사이에서 새로운 취미로서 대두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원, 공원, 도시의 성벽, 근처의 강가, 숲을 둘러보며 휴식을 취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파리를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전혀 새로운 산책 문화가 등장했다. 1853년, 파리 지사에 오른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 사업이 크게 기여했다. 산업혁명으로 먼저 근대화를 맞은 런던에 비해 더럽고 불편한 중세도시의 꼴을 벗지 못한 파리는 오스만의 지휘로 점차 근대화된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도로 체계, 녹지 조성, 미관 관리, 상 하수도망 구축에 이르는 총괄적인 도시 개혁이 일어났으며 유리와 철근을 사용한 기차역, 박물관, 오페라 하우스, 에펠탑 같은 새로운 건축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아케이드가 가장 혁신적이었다.

 

거리는 집단의 거처다. (...) 반짝반짝 빛나는 에나멜 간판은 부르주아의 응접실에 걸린 유화만큼이나 멋진 -어쩌면 더 나은- 벽장식이며, '벽보 금지'가 붙어 있는 벽은 집단의 필기대, 신문 가판대는 서재, 우편함은 청동상, 벤치는 침실의 가구이며, 카페의 테라스는 가사를 감독하는 출창이다. (...)  거리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이 아케이드에게 대중에게 가구를 구비한 편안한 실내로 모습을 드러낸다(발터 벤야민).
파리의 아케이드

 아케이드는 큰 유리창으로 만든 지붕이 있는 통로로, 파리인들에게 아케이드를 따라 걷는 일은 매우 고상한 일이 되었다. 지붕이 덮여 있기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도 젖지 않을 수 있고 거리의 마차들이 들어올 수 없기에 안전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됐다. 이들은 "오늘날 쇼핑몰에서 쇼핑에 나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가로이 걸어 다니면서 궂은 날씨를 피하거나 둘씩 짝을 지어 팔짱을 낀 채 상점 안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제 쇼핑이 일종의 몽상적인 걷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심지어 도시 그 자체를 이상화하는 데 한몫을 하기도 했다."

파리의 아케이드

 한편 거리를 장악하기 위한 두 계급 간의 투쟁이 불가피해졌다. 여가시간에 거리를 걸으며 쇼핑을 하려는 상류계급의 재산가들과 먹고살기 위해서 반드시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이 부딪혔다.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진열창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쇼핑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둡고 지저분한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했고 길에서 썩어가는 쓰레기 더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정중한 대접을 받고 싶어 했다.

 당국은 예상대로 상류계층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하층계급은 언제나 사회의 불안 요소이기만 했다. 그리하여 보행자들은 점차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1


 아케이드의 등장은 거대한 군중이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백화점의 설립과 더불어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자들이 스스로를 군중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발터 벤야민). 주인이 아닌 '구경꾼'으로 밀려난 군중은 비인격적인 존재가 될 위험에 처했다. 당대의 문인들은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며 비판적 어조로 글을 썼다.


"이들 무리는 각자가 독자적인 존재, 즉 각자에 고유한 이력, 고유한 신, 장점과 단점, 독백이나 운명을 가진 독자적인 존재들의 무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뭔지 모르지만 똑같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똑같은 알갱이들의 흐름처럼 생각되었다"(폴 발레리,죽은 것들)


"순수한 산책자는 항상 자기 개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반대로 구경꾼은 외부 세계에 열광하고 도취되기 때문에 그들의 개성은 외부 세계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만다. 구경거리에 정신이 빼앗긴 구경꾼은 비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그는 더 이상 하나의 인격이 아니다. 그는 공중, 군중이다. 쉽게 불타오르는 소박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으며 쉽게 환상에 사로잡히는 구경꾼들"(빅토르 푸르넬,『파리의 거리에서 있는 것들』).2


 

지적인 게으름뱅이, 플라뇌르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는 쫑긋 기울인 채 군중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찾는다. (...) 다른 모든 사람들 귀에는 아무것도 아닐 소음도 음악가의 귀에 닿으면 화성을 떠올리게 해 줄 것이다. 몽상에 빠진 사색가, 철학자에게도 이러한 외부의 자극은 유익할 것이다(피에르 라투스,『대백과사전』).

 이때, 군중으로부터 살짝 비껴 서서 군중들의 삶을 관찰하고 관조하고 탐구하는 도시의 산책자 '플라뇌(flaneur)'가 등장한다.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아케이드의 산물 중 가장 고상한 의식이 바로 플라뇌르라평했다. 특히 시인 보들레르가 플라뇌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어로 '어슬렁거리는 자'라는 뜻의 플라뇌르는 우리말로 하면 한량쯤 되겠다. 당대의 유수한 화가와 음악가들이 플라뇌르였으며 샤를 보들레르, 장-자크 루소, 폴 발레리, 스테판 말라르메, 에드몽 드 공쿠르와 같은 문인과 비평가들 대부분이 도시의 산책자들이었다.

구스타프 카유보트, <파리의 다리>, 1876

 그러나 이들이 마냥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빈둥거리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종종 예술가나 시인들은 가장 한가하게 보일 때가 가장 일에 몰두하고 있는 때일 경우가 많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광장과 성벽을 돌아다니며 악상을 떠올린 베토벤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플라뇌르는 범람하는 유행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며 "군중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찾았다. 보들레르의 표현대로, "잔인한 태양이 맹렬히 화살을 쏘아댈 때 홀로 환상의 칼싸움을 연습하러", 즉 예술적 영감을 얻으러 거리로 나섰다.

 구스타프 카유보트, <유럽의 다리 위에서>, 1876

 그러나 시인은 때때로 서정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군중 사이에서 소외감과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고독하고 사색에 잠긴 시인은 "돈 궤짝처럼 닫혀 있는 에고이스트나 연체동물처럼 갇혀 있는 게으름뱅이들이 끝내 얻지 못할, 열렬한 즐거움을 알고 있다"라고 자위하며 시시로 자기 앞에 나타나는 무지의 조롱을 참아냈다. 사유하는 자신이야 말로 진정한 파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한편 "관찰하는 모든 곳에서 익명성을 즐기는 군주"들은 군중 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에게 흡수되고 싶어 하는 모순된 갈망을 보이기도 했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이자 작곡가 E. T. A. 호프만은 날씨만 나쁘지 않으면 매일 저녁 산책을 나갔는데,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가 둘러보지 않는 술집이나 찻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한다.3  이러한 플라뇌르의 양가적 태도를 두고 발터 벤야민은 “지성은 그저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지만 (...) 실제로는 이미 그런 식으로 고객을 찾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은 새로 떠오르고 있는 상업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설자리를 쇼핑하러 나선 사람이 되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구스타프, <작업복을 입은 남자>, 1884

 그럼에도 플라뇌르에게, 산책하는 예술가들에게 산책은 단순한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보다 실존적인 문제로 고독한 산책자 루소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기이한 상황에 처한 내 영혼의 일상적인 상태를 묘사하려는 계획을 세운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으로 나의 고독한 산책과, 머릿속을 완전히 자유롭게 두어 그 어떤 저항이나 구속 없이 생각이 마음껏 제 흐름을 따르게 할 때 그 산책을 가득 채우는 몽상을 충실히 기록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 고독과 명상의 시간은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 되어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연이 바랐던 상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하루 중 유일한 시간이다."4

 흥미롭게도 이러한 플라뇌르의 태도는 오늘날 현대인의 삶에도 요청된다. 몇 해 전, 에르메스가 '플라뇌르의 정신"이란 주제로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미술전 <Wanderland(파리지앵의 산책)>을 주최했다. 에르메스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 알렉시 뒤마는 "대도시 거리를 걷다 보면, 아무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아트가 실종된 것 같다. 카페나 벤치에 앉아 있는 게 제일 멋지다. 모두가 몹시 바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가는 것만 보고 있는 것. 이것이 오늘날 럭셔리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플라뇌르의 정신이 루소와 벤야민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하기엔 다소 석연찮은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곧 돈이요 바쁜 것이 곧 근면한 것이라고 보는 지배적인 시각을 딛고 플라뇌르의 정신을 호소한 점은 매우 인상 깊다. 

 이와 같이 보건대 느긋하게 내가 사는 동네를 산책하며 군중을 만나고 그 속에서 나를 만나는 일, 오늘날 현대인들이 놓쳐선 안 될 중요한 삶의 태도이자 품격있는 여가생활이 아닐까.



1)조지프 A. 아마토, 김승욱 옮김,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작가정신, 2006, 289-292쪽 참고.

2)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아케이드 프로젝트 3: 도시의 산책자』, 새물결, 2008, 83-84쪽 에서 재인용.

3)위의 책, 28쪽 참고.

4)장-자크 루소, 문경자 옮김,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문학동네,  2010, 19쪽.


[참고문헌]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아케이드 프로젝트 3: 도시의 산책자』, 새물결, 2008,

샤를 보들레르, 황현산 옮김,『악의 꽃』, 민음사, 2016.

샤를 보들레르, 정혜용 옮김,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은행나무, 2014.

장-자크 루소, 문경자 옮김,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문학동네,  2010.

조지프 A. 아마토, 김승욱 옮김,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작가정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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