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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Feb 20. 2023

보내지 못한 마음

새 똥 때문에 불편을 호소한 이웃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새 모이를 주지 않겠노라 약속한지 보름째, 혹시나 하는 기대로 찾아들던 새들의 발걸음도 이제 드문드문하다.

한동안 나는 동네 새들 먹이 주는 낙으로 살았다. 베란다 밖 에어컨 실외기 위에 화분 받침을 올려놓고 거기에 땅콩, 호두, 오트밀, 해바라기 씨, 쌀, 작게 자른 사과를 한 줌 담아 동네 새들을 먹였다. 옛말에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와 논밭에 물들어가는 소리가 세상에서 젤로 듣기 좋은 소리라더니, 작은 부리로 씨앗을 쪼아 목구멍으로 넘기는 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나는 끼니를 걸러도 배가 고픈질 몰랐다.

인간 세계에 식사예절이 있듯이 새들에게도 엄연히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녀석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참새들은 우리 집 건너편의 전깃줄에 일렬로 앉아 있다가 1조가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2조가 날아와 밥을 먹고, 뒤이어 3조, 4조... 이렇게 차례를 이었다. 겁이 많아서인지 협동심이 좋아서인지 참새들은 꼭 네다섯 마리씩, 많게는 여덟아홉 마리씩 무리를 지어 와 식사를 했다.


유운홍, <진달래와 참새>


직바구리는 의리가 있는 녀석이었다. 한 마리가 먼저 날아와 먹이가 남아 있는지 살핀 후 안전하다 싶으면 소리를 내어 제 짝을 불렀다. 그러면 금세 어디선가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것이었다. 한 마리가 밥을 먹을 동안 다른 한 마리는 몇 발짝 떨어져 앉아 지네들보다 덩치가 큰 새가 오는지 망을 봤다. 제 몫을 먹고 난 녀석이 남은 밥상을 짝에 넘기고는 제 짝이 그러했듯 저도 열심히 망을 봐주었다. 어쩌다 참새들이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얼른 쫓아내 버렸다.

박새는 참새나 직바구리처럼 매일같이 오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올 때 보면 늘 혼밥이었다. 많이 먹는 법이 없고 다른 녀석들처럼 배변을 흘리는 일도 없이 깔끔하고 새초롬했다.


조속, <고매서작>, 조선 17세기


이따금 몸집이 작은 새들의 평화로운 식사시간을 망치는 불청객이 등장하기도 했다. 바로 까치와 비둘기다. 이것들이 근처에 날아들면 작은 새들은 후다닥 나무 사이로 숨어버렸다. 까치는 내가 차린 밥상엔 별 관심이 없고 이 구역의 상위 포식자로서의 위엄만을 의기양양 뽐내다가 지루한 날갯짓 몇 번 하고 다시 홀연히 날아가기 일쑤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까치에게 밀려난 작은 새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게 역시 내 자리는 작은 자의 자리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무리 속에 있길 좋아하진 않으니 참새는 아니고 박새나 직바구리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전 김식, <꽃과 새 중 패랭이꽃과 제비>, 조선 17세기


나는 완연한 봄이 오면 혹 내 집에 제비가 날아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설레기도 했다. 먹이를 찾아 수만 리 장천을 날아온 제비가 내 집에서 잠시 여독을 풀고 내가 준비한 모이로 빈 위장을 채운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옛말에 박씨 물고온 제비란 말도 있는데 혹 내 집에 든 제비 한 마리가 변변찮은 삶에 어떤 좋은 일을 불러올지도 모른단 기대마저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내가 새들을 보살핀 게 아니라 새들이 나를 보살펴 왔는지도 모르겠다. 추운 겨울철 배고픈 새들을 내가 먹이듯, 나의 추운 시절에 나를 보살펴 줄 누군가의 손길이 있지 않을까 은연중에 기대했는지도.                              

은근슬쩍 이런 욕심이 끼어들어서일까, 내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위안은 고작 한 철도 못 넘기고 끝났다. 성경에 적혀있기로 하나님이 공중에 나는 새들과 들꽃에 핀 백합화를 다 먹이신다고 하니 새들의 주린 배를 걱정하는 일은 주제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찬 겨울 바람 마냥 시린 이 아쉬움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지... 참새 한 무리 날아들었다가 영영 이별하며 되돌아간다. 텅 빈 밥그릇에는 보내지 못한 마음이 덩그러니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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