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 Oct 27. 2024

소울메이트

#10. 알래스카

“시애틀 공항인데 어디세요?” “저 시계탑 앞인데요, 누구세요?” 

K는 시애틀에서 앵커리지로 가는 유나이티드 항공권을 내게 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제가 시계탑 앞으로 갈 테니 거기서 저를 기다리세요” 

멀리서 걸어오는 K는 170cm 정도로 보이는 왜소한 남자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내가 시애틀 갈 거면 김장재료 사 오라고 해서 좀 늦었어요” 


로켓을 발사해 위성궤도에 인공위성을 올리는 시대에 항공권을 손수 가져온 K에게 항공권을 받았다. 

“시애틀에서 배추도 사 올 겸 해서요” 

K의 말이 계속 거슬렸다. 아마도 알래스카에서의 삶 또한 녹녹치 않을 것 같은 시린 느낌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나를 스탑 오버시켜 K는 시애틀 H 마트에 데리고 갔다. 




"한국에 없는 재료가 있을까요?" K가 장바구니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여기서 다 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시애틀의 H 마트는 예상보다 넓었고, 화려하게 쌓인 채소와 깔끔하게 진열된 냉동 식품, 다채로운 색깔의 과자들이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K는 좁은 통로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오가며 이것저것 집어 올리며 나를 향해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미 비행으로 24시간이나 깨어있었고, 피곤에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기나긴 비행 끝에 낯선 곳에서의 장보기가 신선하기도 했지만,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따금씩 걷는 중에도 눈앞이 스르르 감겼다.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K는 줄기차게 이야기하며 각종 재료들을 장바구니에 담아가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K는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앵커리지로 가는 항공편 시간이 임박했다며, 계산을 끝내자마자 김장 재료가 가득 담긴 장바구니를 손에 쥐고는 주차장 쪽으로 뛰어 나갔다. 나도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휘청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한적한 시애틀 도로 위, K의 차는 빠르게 공항을 향해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황혼의 빛으로 붉게물들어갔다. 저녁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구름은 점점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점점 나른해져 갔고, 차 안의 따뜻한 분위기와 K의 신나고 수다스러운 말들이 귀찮게만 느껴졌다. 

공항에 도착해 보안 검사를 마친 후,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긴 여정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른한 눈꺼풀은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고, 세 시간 남짓의 비행이 금세 끝날 거라는 안내방송이 들렸지만, 그 소리는 나의 의식을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사라지며,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앵커리지의 차가운 공기와 화이트 아웃된 눈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하니 픽업 나온 선배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 짧은 순간, 직감적으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숙소에 문제가 생겼어,” 선배는 말했다. 내가 머물기로 했던 홈스테이 집주인으로부터 당일 취소 문자를 받았다는 소식은 예상치 못한 폭풍처럼 내 마음을 휘감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선배와 그 집주인 사이의 갈등이 내 거처를 무너뜨린 원인이었다.


급하게 옮겨진 숙소는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니어 아파트였는데 이 아파트는 외부인 출입 금지였다. 시니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노부부가 일주일간 휴가를 갔기에 빈방이 있으니 임시방편으로 내가 머무를 수 있게 숙소를 급하게 만든 것이었다. 알래스카의 태양은 내 몸에 다 닿지도 못한 채 밀물처럼 들어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짐을 풀지도 못한 채 잠을 청해야 했는데 외부인 출입 금지 공간에 내가 들어와 있는 상황이 너무도 불편했다. 


그 순간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아파트를 흔드는 사이렌 소리, 어디론가 달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방문 손잡이를 사납게 돌리고 두드리다가 점점 멀어져갔다. 외부인 출입 금지로 들키면 안 된다는 선배의 말에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체 제자리에서 걷기만을 반복했다. 불이 난 것 같은데, 알래스카에 도착한 첫날 나는 ‘불에 타 재가 되어 사라지려나?’ 라는 생각을 하니 내 전세 보증금을 빼서 도망간 S와 나를 폭행한 오빠 그리고 그 폭행을 방관한 아빠가 생각났다. 

죽음 앞에서 떠오르는 이들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들이었다.


빨간 카펫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진정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피투성이라도 살기를 바랐던 한때 나는 내 가족보다도, 아니 나 자신보다도 S의 존재를 더 귀하게 여겼던 날들을 생각했다. 그 소울메이트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되짚어보니,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알 수 없는 멜로디가 가슴에서 빠져나가 공기의 온도를 바꿨다. 그 멜로디는 연기처럼 하늘 위로 올라갔고 내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영적인 세계 어느 곳에 닿았는지 신비한 풍경이 보였다. 하늘로 연기처럼 올라간 멜로디는 내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면 하늘에서 내려왔고 다시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 멜로디는 연기처럼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소리가 들렸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하며 그 소리는 나를 안았다. 


창문 사이로 세찬 바람이 들어와 일어날 힘조차 없는 무릎을 일으켜 커튼을 열었더니 하늘과 땅이 초록빛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알래스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로라는 춤을 추며 나를 환영했다. 화재경보기의 요란한 소리에 어두운 밤이 거치고 푸릇한 새벽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파트 어디선가에서 “화재경보기 오작동으로 인한 사이렌입니다. 누군가 911로 신고해 구급대원들이 출동한 것이니 놀라지 마시고 집 밖에 계신 분들은 속히 집 안으로 들어가세요”라는 안내 방송이 아파트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난밤 나의 영혼에 울렸던 사이렌은 상처받았던 나와 미워했던 나를 깨우는 용서였다. 


알래스카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이들이 찾아온다고들 한다. 나 역시 내 안에 들리는 소리를 따라, 영혼의 이끌림으로 이곳에 온 걸까? 외부인으로 발각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관문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깊은 어둠 속에 숨듯, 노부부의 침실 한구석에 웅크리고 누웠다. 


시애틀 공항에서 앵커리지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누이트들은 화가 나면 감정이 풀릴 때까지 그저 걷는다 했다. 그리고 멈춰선 그 자리에서 지난 길을 되돌아보며 그것이 뉘우침과 용서의 길임을 깨닫는다고. 그 이야기는 내 안에 무언가를 일깨웠다.


알래스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치 이누이트들이 화가 풀릴 때까지 걷는 길처럼 느껴진다. 눈 덮인 대지 위를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며,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들이 서서히 떠오르기를 바랐다. 설원은 모든 색을 지워버린 듯하지만, 그 하얀 풍경 속에 찍히는 나의 발자국은 남아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렇게 걸어가며 내 발자국이 서서히 그려낸 길은 나에게로 향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듯한 이 동토의 땅에서, 혹독한 추위와 고요 속 비로소 혼자라는 사실과 마주한다. 불안과 공허,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잔잔한 안도감. 나는 여전히 낯설고도 익숙한 내 모습을 천천히 직면하며, 혼자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차갑지만 투명한 공기 속에서, 나는 나를 마주할 용기를 조금씩 쌓아갔다. 고독 속에서 발견한 것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독이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그렇게 이 땅 위에서, 잊고 있었던 나를 용서하며 혼자임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비로소 내 안에 고요한 평화가 자리 잡는 것 같았다. 내 발걸음이 만들어낸 이 길이, 나에게 돌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라며.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9화 소울메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