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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 Oct 27. 2024

소울메이트

#9

“너한테 돈을 돌려줘도 빚쟁이고 안 돌려줘도 빚쟁이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스치듯 기억나는 생각이 온라인 쇼핑몰을 하던 S의 전남편이 망했을 때 내가 급한 채무를 도와준 적이 있다. 나는 그 돈을 잊고 있었는데 S는 아마도 그 돈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어 그대로 S를 한참 쳐다봤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돈 욕심이 났어? 매일 죽고 싶다는 사람이? 그 돈으로 살아 보고 싶다면 잘 살아. 그렇지만 이후로는 내 인생에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곤 S의 방을 나왔다. S의 삶이 피투성이라도 살아가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던 나였다. S와 함께했던 나의 7년의 세월은 붕대로 감긴 S의 얼굴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듯 흩어져 사라졌다. 그해 10월, S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결혼해. 결혼식에 와 줄 거지?” S는 재혼이 아닌 결혼이란 단어를 쓰며 재혼 소식과 함께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고 발표회에 와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S는 나와 살던 전세금을 빼 일 년도 지나지 않는 시간, 사람들에게 무언가 증명해 보이려는 듯 불안했다. 이혼한 전남편에게 너와 헤어지고도 이렇게 바로 결혼할 수 있다는 걸 보이려는지? 아니면 나에게 너 없이도 혼자 앨범을 낼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S가 발매했다던 앨범을 찾아보니 “수치심”이라는 제목의 곡이 보였다. 다중인격과 성격장애가 보인다는 S의 주치의 말이 떠오르는 가사의 곡이었다. 내가 S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을 때 언젠가는 S와 건강하게 헤어지는 분리를 생각했지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삶이 어떻게 생각대로 살아지겠는가? 이렇게라도 S와 분리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S가 죽을까 걱정되어 내 삶까지 내팽개쳐두고 S의 반쪽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와 S의 상황을 모르는 지인들은 S와 항상 붙어 다니던 나에게 S의 이혼과 재혼 소식을 한꺼번에 물었다. 대답을 피하려는 나는 점점 대인기피증으로 사람에게서 멀어져 지냈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사람 만나는 게 이토록 힘든 걸까? S는 앨범도 내고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난 왜? 왜? 내가 왜?’ 내 안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의 감정은 S를 축하하는 마음이 느껴지니 내 안에서 두 감정의 충돌로 인해 미칠 노릇이었다. 7년 전, 차도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던 S를 살리겠다고 S의 인생에 뛰어들었던 나는 어디 갔을까? 그리고 ‘소울메이트’라며 인생에서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죽을 것만 같던 인생도 살 수 있는 인생이라 노래했던 나의 말과 노래는 길을 잃었다. 내가 노래했던 그리고 이야기했던 지난 시간이 세상에 노래가 되었으니 어디 가서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할 수도, 고소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억울하고 분노 섞인 밤을 삼키는 날이 많아졌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았다. 동네 약국에서 수면제를 사는 날이 늘었고 수면제로 잠들 수 없던 날, 예술복지재단에서 예술가들에게 무료 상담을 받아보라는 메일을 받아 심리 상담을 받게 되었다. 간단한 문진표 작성 후 나의 상태가 위험단계였는지 며칠 후 상담사를 매칭 해주었다. 매봉역 근처 상담소의 문을 내 손으로 열기까지 ‘내가 여길 꼭 가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상담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잘 수 없는 나흘의 밤이 지나고 비몽사몽으로 상담소를 찾았다. 처음 보는 상담 선생님께 두서없는 나의 7년 전 이야기를 쏟아냈다. 12번의 상담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오늘만 볼 사람처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숨차게 꺼내놓았다. “몸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호르몬이 없는 듯해요,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 들고요, 어젯밤은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어 동네 약국에서 구입한 수면제를 먹고 잤는데요, 지금도 말은 하는데 몸은 자고 있어요.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의 잘못이 아니겠어요? 다 내가 선택하고 허락한 만남이었잖아요!”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지루해하지도 불쌍하게도 보지 않았다. 예술복지재단에서 보내온 나의 정보가 있었는지 선생님은 이미 나의 앨범과 노래를 알고 계셨다. “고요 씨 노래 참 좋더라고요,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참 따뜻해져요, 대부분 사람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요, 그 부분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적다고 봐야 해요, 그런데 고요 씨는 그 상처를 단지 고요 씨 편해지자고 낫기를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 상처를 넘어서 또 누군가를 돕고 음악을 만들고 또 누구를 도울 생각을 하고 계신 고요 씨. 그게 대단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첫날이기도 하고 앞으로 천천히 풀어가 봐야겠지만 제가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어드릴 테니 기운 내세요”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크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대로 몇 분 더 앉아있다가는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아낼 듯하여 서둘러 상담소를 나왔다. 어쩌면 나는 내 존재의 소중함을 구걸하듯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을 찾고 헤맸는지도 모르겠다. S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나의 밤잠을 힘겹게 깨우지 않을 무렵,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십여 년 전 음반 기획사에서 만났던 선배였다. 선배와 연락이 끊어진 그 사이 선배는 알래스카 한인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고 교회에서 뮤직 디렉터를 구하고 있는데 숙식과 어학연수 그리고 레슨을 연결해 줄 테니 미국에 올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당시 알래스카가 러시아 땅으로 알고 있던 무식한 나는 한국을 떠나고 싶었던 터라 한국에 일정이 기한 내에 마무리되면 알래스카를 가겠노라 답신을 보냈다. 진행하던 녹음 일정과 강의하던 학교를 정리하고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래스카를 가라는 하늘의 뜻인지? 모든 일이 순적하게 진행되었고 심지어 마이크 하나까지 제자에게 선물하고는 다시는 한국에 돌아올 마음 없이 한국을 떠났다. 1년 계약으로 떠나는 알래스카행인데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속옷 몇 가지와 여분의 옷 몇 벌만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직항이면 8시간 안에 닿을 거리인데 받은 항공권은 하루를 꼬박 날아올라 일본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시애틀로 그리고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경유하는 항공권이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시애틀에 도착해 앵커리지로 경유하려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좀처럼 내가 가야 할 곳의 항공권이 전광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인포메이션에 가서 물어보니 “이 항공권은 유나이티드 직원에게 배포되는 항공권이라 취소한 사람이 있어야지만 탈 수 있는 항공권이에요”라고 안내를 받았다. 그 바람에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처럼 공항 터미널 안에 갇혀버린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공항 터미널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때 카톡으로 모르는 K의 문자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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