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분, 아니 45분?
내가 서 있을 동안,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바닥을 보고 서 있어도, 내 머릿속엔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커져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나타난 번호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전화였다. 나는 짧게 전화를 받고 다시 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그가 나타날 기미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때까지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가 올 때까지 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그를 향한 기다림이 점점 더 무겁고 짐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멀리서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걷는 속도는 평소보다도 느린 듯했고, 나를 마주하며 다가오는 그 얼굴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지만, 마음속에 피어나는 감정은 무겁기만 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가 내게 다가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그 어떤 변명도 내게 와닿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에 나는 더 이상 어떤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또 늦었네요." 내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미안함과 함께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걸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몇 걸음 걸어 연습실로 향하며, 그가 뒤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 몇 번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냥 집으로 가버릴까?'
길을 걷는 동안 그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변명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번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할 목적이 있기에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기타를 제대로 연습하기 위함이라고. 공연에서 제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그 목적 하나만을 생각하자'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감정을 뒤로 미루고, 이제는 그저 목적만 생각하며 연습실로 향하는 걸음이었다. 그가 늦든 말든,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든 말든, 그 모든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기타를 잡고 연습해야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며, 나의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연습실로 향했다.
그의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은 어둡고, 공기가 탁했다. 먼지가 쌓인 기타들이 곳곳에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방치된 낡고 먼지 쌓인 악기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방 안에는 아무런 질서가 없었고, 무언가가 뒤엉켜 있는 듯했다.
"여기 앉으세요."
그가 나를 향해 의자 하나를 겨우 찾더니 덜컹거리며 책상 옆에 옮겼다. 책상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아마 옆방이나 아래층에서 끌어온 듯했다. 그 책상은 오래된 나무로, 모서리들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어 어디서든 긁힌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앉으라는 그의 말이 꼭 그의 상태와 같아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벽에는 기타들이 걸려 있었다. 그가 이렇게 연습실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그저 ‘어떤 일을 하려는 의지’조차 없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의 자세가, 그의 생활이, 이 방 안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레슨 시작해도 될까요?"
그가 살짝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어쩐지 내 반응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한 대로 기타를 꺼냈다. 나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공연 준비, 그 공연에서 연주할 기타.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며, 내 감정은 다시 굳어졌다. 이곳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연습을 시작해야 했다.
그는 잠시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내가 무엇을 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짓고, 기타를 손에 쥐며 말했다.
“밤양갱 들어보셨어요?”
그가 기타를 꺼내고,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악보를 건넸다. 그 악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체계적이었다. "밤양갱"이라고 적힌 제목과 함께, 곡의 구조와 각 부분에 대한 세밀한 코드가 적혀 있었다. 악보 위에는 그의 손글씨로 정리된 코드, 리듬 패턴, 그리고 심지어 코드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이전까지 그가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매번 지각을 하고, 그저 시간을 끄는 듯한 태도였던 그였지만, 이 악보를 통해서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꼼꼼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철저히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여준 티칭의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연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곡의 맥락과 느낌까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전달하려고 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강하게, 이 부분은 섬세하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그가 설명을 시작하며 손끝으로 악보를 짚어가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이전의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달리, 확신에 차 있었고, 그가 이 곡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는지 느껴졌다. 그는 마치 그 곡이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보여주는 열정에 조금 놀랐다. 자주 늦고, 때로는 시간을 무심하게 흘려보내던 그였지만, 지금 그는 곡 하나에 집중하며,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의 티칭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서 그 무엇도 대충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그가 준비한 이 모든 것이 단지 나를 위한 연습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한 준비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그럴 때 코드가 더 살아납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목소리도 낮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 말을 고분고분 듣고, 기타를 다시 잡았다. 그가 이끌어 주는 대로, 하나하나 차근차근해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건, 그가 설명해 주는 대로 연주를 바꾸니 정말로 음색이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전에 치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한 번, 두 번, 그가 나를 이끌며 연습을 반복했다. 그가 설명하는 그 작은 차이들, 리듬의 변주, 코드의 깊이, 그런 것들이 나의 연주에 점점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전의 불만이나 피곤함이 서서히 사라지고, 나는 오히려 그가 보여주는 세심한 티칭에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레슨이 끝난 후, 마음속에 감정들이 조금씩 풀어지면서 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가 오늘 늦은 이유, 결국 왜 그렇게 늦게까지 연습실에 와서 내가 기다리도록 만든 건지.
"그런데, 오늘 왜 그렇게 늦었어요?"
내가 가볍게 물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갔다. 오늘 레슨에서 그가 보여준 진지함과 준비된 모습이 내 마음을 다소 가라앉혔기 때문일까, 그를 비난하거나 질책하는 마음은 없었다. 단지, 그가 그토록 늦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미안함이 엿보였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대답했다.
"악보를 만드느라 밤을 새웠어요. 악보가 완벽하게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시간을 잊었어요."
이전까지는 그저 지각의 연속과 준비 없이 대충 사는 사람으로만 보였던 그가, 이렇게 깊이 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럼 오늘 악보를 다 만들고 나서, 바로 레슨에 와서 저한테 가르친 거군요." 내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제가 이렇게 늦게 도착할 줄은 몰랐어요. 사실 처음엔 오늘까진 못 만들겠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너무 바빠져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 피로가 묻어났지만, 그 안에는 뭔가 의지를 가지고 이 일을 해내겠다는 강한 결단력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까지 완벽하게 하려고 했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단순히 악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타 교본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번 레슨이 저에게도 중요한 시간이 될 것 같아서 악보 하나라도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썼어요."
그의 대답이 끝난 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하는 '완벽'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담아내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준비한 악보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그동안 그의 행동에서 읽히지 않던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 레슨은 정말 좋았어요. 이 악보, 정말 잘 준비된 것 같아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가 준비한 것을 인정해 주었을 때, 그의 마음이 조금 더 놓였던 것 같다.
"고마워요."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엔 늦지 않게 준비할게요."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보다는 자신감을 품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의 대화가 그에게도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자신을 더 믿고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