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약국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부록
어느덧 아기가 60일이 됐다.
두달동안 아기는 먹고 싸고 자는 중차대한 임무를 해내느라 고군분투했고, 그런 아기와 함께하며 나는 심신이 너덜너덜해졌다.
아기가 생후 3주차에 접어들자마자 저녁 8시 정도 시작해서 밤 12시까지 잠깐씩 쉬어가며 내내 울기 시작했다. 영아산통, 또는 배앓이라고 했다.
생후 한달 아기는 눈물이 안 난다는데 우리 아기는 힘들게 힘들게 눈물까지 짜내며 정말 죽을 듯이 울었다.
그래, 우는 건 괜찮았다. "아기가 울지 뭐 하겠어" 생각하며, 아기 귀에 연신 '쉬이' 소리를 내며 애써 이겨냈다.
그런데 생후 5주차부터 폭풍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모유 수유를 하면 토를 안한다는데, 우리 아기는 거의 매끼니 먹자마자 토하니 정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아기가 배고픈 신호를 보내면 한숨부터 나왔다.
'제발 이번 수유텀에는 토하지 말아라' 빌면서, 때로는 '엄마가 자꾸 토하게 해서 미안해' 사과하면서.
'넋이라도 있고 없고' 상태로 열흘 정도를 겨우 겨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아기가 모유를 먹고 내리 5번을 토했다.
이건 틀림없이 위 출구가 좁아 먹은 것을 다 토한다는 신생아 질병 '유문협착증'이다 싶어서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아기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다.
소아과까지는 차로 30분 이상...
소아과 선택의 최우선순위는 거리라는데, 집 근처에 영어가 통하는 소아과가 없다보니 나에게는 '접근성'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병원에 가는 길, 아기는 토하고 나서 목이 따갑고 불편하지 내내 울어댔고,
그날따라 폭설이 내려 병원까지 소요 시간은 30분에서 시작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기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
기운없이 축 쳐져 카시트에 앉아있는 아기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두 시간 전에 먹고 먹은 걸 다 토했으니, 기운이 있는 게 이상했다.
1시간 가까이 걸려 병원에 도착.
당직 의사를 급히 만났고, 관장 후 초음파를 해보기로 했다.
아기가 관장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지...
고무 호스를 조그만 아기의 항문에 집어넣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아기도 처음 느껴보는 불편함에 숨이 넘어가라 울었다.
관장으로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낸 아기를 데리고 '본게임' 초음파를 하러 갔다.
차가운 겔이 배에 닿자 아기가 '꺄악, 으아아악, 갸라랑' 괴성을 내며 죽을 듯이 울었다.
이렇게 울어도 아기는 죽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의사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기계적인 표정으로 초음파 기계를 아기에게 들이댔다.
보다 못해 의사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안아 달랬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왠지 모르게 아기가 울때면 내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다.
임신 37주차에 정기 검진 갔다가 아기가 산소 공급을 제대로 못받고 있다는 의사 말에 응급 제왕절개로 출산하고 지금까지 아기를 키우며 내 머리속을 지배하는 감정은 '미안함'이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안고 '미안해, 미안해' 안절부절 못하는 나, 그런 나를 지루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의사.
남편이 보다못해 얼른 끝내고 가자며 아기를 다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이제는 아기가 졸도할 일만 남았다 싶은 순간, 검사가 끝났다.
다행히 유문협착증은 아니고, 배에 가스가 너무 많이 찼다고 했다.
아직 소화기가 미숙해서 유당 소화를 못시켜서 그렇단다.
보통 분유 먹는 아기가 이런 증세가 있는데, 모유 먹는 아기도 더러 이런 경우가 있다며, 내가 먹은 유제품 속 유당이 모유에 섞여 들어가면서 증상이 더 심해졌을 거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무지하게도 유제품이나 두유 같은 것을 많이 먹으면 모유 질이 더 좋아질거라고 굳건히 믿고 매일 아침 두유(두유는 유제품이 아니지만, 지나친 두유 섭취는 아기에게 대두 알러지를 유발한다고...), 시리얼과 우유, 틈틈히 요구르트,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며 생크림 케이크까지. 각양각색의 유제품류를 알뜰살뜰 챙겨먹고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 아기는 매끼니 최소 2종류, 많으면 3종류의 약을 먹어야 한다.
매끼 유당 소화를 도와주는 락토아제 효소, 배에 가스를 잘게 쪼개준다는 물약을 먹고, 하루에 한번씩 유산균까지.
러시아어 투성이지만, 사실 다 수입 약.
락타제 베베(유당 소화를 돕는 약)은 미국약이고, 에스뿌타민은 가스 제거약으로 독일제다.
이렇게 약을 먹어도 아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먹고 나면 토를 했고, 밤마다 배앓이를 하며 울었다.
시간이 약이다
이 또한 다 지나간다
이런 아기 상황을 이야기하면 열에 아홉은 시간 타령을 했다. '좀 크면 괜찮아진다'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어 다시 찾은 러시아 의사도 "어쩔 수 없다, 소화기관이 더 성숙할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서양의학 의사 입에서 '그냥 기다리세요' 라는 말을 듣고 나면 참 무기력해진다.
매끼 토를 하고, 밤마다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우는 아기의 모습을 언제까지 두 손 놓고 지켜보라는 건지.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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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0일이 가까워지자 며칠 전부터 아기의 구토 횟수가 갑자기 줄었다.
사기 당한 것 같았다.
몹시 지루하고 기분까지 나빠지는 영화도 어쨌든 두시간을 채워야 끝이 나는 것처럼,
아기는 마치 생후 2개월, 60일이 되기를 기다렸다는듯이 구토와 배앓이 사건의 제3막, 기승전결의 '결'의 문을 열어줬다.
정말 그런가보다.
시간만이 약인가보다.
내가 처방받은 그 어떤 약보다 확실한 약효가 있었던 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약보다 참기 힘든 약이었다.
그러고보면 만사에 시간만큼 잘드는 약이 없다.
회사 일에 적응하는 데, 남편과 다툰 후에도 결국 약효를 보이는 건 시간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의 약효가 돌기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없고, 그래서 매번 갖은 민간요법들을 자체 처방한다.
(특히 남편과 다툰 후, 앙금이 남은 상태에서 섣불리 화해를 시도했다가는 사과말에서 다시 말꼬리를 잡으며 싸우는 극한의 부작용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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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아기를 낳게 해줬다고 간증하고 있는 이 순간이 지나고 다시 오늘 밤, 아기가 또 토를 하고 자지러듯 울지도 모른다.
원래 육아는 '한시름 놨다' 싶으면 어김없이 뒤통수 맞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아기는 자라고, 모든 게 조금씩 나아질 거다.
그게 시간이라는 약이다.
[덧붙임]
아기 약을 사러 다니며 러시아 약국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앞서 글에서 썼듯 러시아 약국에서 원하는 약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일단 우리나라처럼 조제약 시스템이 아니라 의사가 기성약 구매 리스트를 처방해주는 구조라, 약국마다 의사가 처방한 브랜드의 약을 정확히 가지고 있기가 쉽지 않으며, 그 약이 있다고 해도 약사가 내가 원하는 약 대신 자꾸 비싼 약을 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약국을 헤매고 돌아다니고, 약사에게 바득바득 우겨서 내가 원하는 약을 구한다고 해도, 그 가격이 정찰제가 아니다.
약국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도 약국마다 약값이 조금씩 달랐던 것 같기는 하나, 러시아는 그 가격차가 좀 황당하다.
아기가 매끼 먹고 있는 '락타제 베베'의 경우, 처음 약을 산 약국에서는 한 병당 우리나라 돈으로 거의 3만원(1500 루블) 이었는데, 다른 약국에서는 1만원(600루블)이었다.
우습게도 약값이 비쌌던 곳은 쇼핑몰 안에 위치해있는 고급진? 약국이었고, 약값이 쌌던 곳은 동네 허름한 약국이었다.
약값에 임대료와 유지비를 포함시키는 모양;;;
그리고 얼마전에 알게 된 건데, 이런 약을 러시아의 쿠팡 '오존(OZON)'사이트에서도 그냥 구매할 수 있다.
락타제 베베의 경우, 오존에서 890루블. 14000원 정도다.
그러니, 약국 찾아다니느라 괜히 진빼지 말고, 의사한테 약을 처방받으면 일단 오존에서 검색해보는 게 낫다.
임신, 출산을 겪으며 나는 러시아 병원-약국 시스템을 그 어떤 한인보다도 빠르게 익히고 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