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TMI
"안물안궁"
오래된 유행어다.
아이를 낳기 전, 불과 작년만 해도 주변에 엄마가 된 친구들이 아기 사진을 보여주며 육아 이야기를 하면, 난 한물간 유행어 '안물안궁'을 떠올리곤 했다.
누가 사진 보여 달랬나, 누가 아기 감기 걸린 에피소드 듣고 싶다고 했나...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이야기하는 게 처음이 아닌 듯, 이야기의 디테일이 더해질 대로 더해진 아기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친구들을 나는 지루해하곤 했다.
엄마가 된 지 오늘로 +45일째.
그런데 적반하장. 나는 매일 아기 에피소드를 늘어놓을 대상을 찾아다닌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엉덩이에 털 날 짓이긴 하지만 내가 '지루하다'라고 볼멘소리 했던 친구들 집에 아기를 둘러업고 놀러라도 갈 텐데, 여기 모스크바에는 말 섞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브런치' 앱을 켤 수밖에 없는 거다.
TMI, 안물안궁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오늘의 아무도 안 물어본 육아 TMI는 바로 출산 이후 함께 하고 있는 러시아 '내니'와의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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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모스크바에 일을 하러 온 이른바 '탄' 사람들이 많다.
마트 캐셔나 내니, 가사 도우미 같은 직종에 많이들 종사한다.
우리 내니는 키르기스스탄 국적의 30대 초반의 아가씨다.
육아 보조부터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는 나의 천군만마 같은 존재다.
나이는 어린 편이지만 9살, 8살 두 아이의 엄마고, 여기서 한국 아기를 돌봐본 경험도 있다.
한국 전기밥솥을 쓸 줄 아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쿠쿠가 맛있는 백미밥을 완성했습니다. 쿠쿠' 소리를 들으면 주걱을 꺼내 밥을 휘저을 준비를 하는, 정말 준비된 도우미 언니다.
그런 내니랑 나는 요즘 어리석은 경쟁 중이다.
내가 질 수 밖에 없는 경쟁인데, 나는 계속 얻어터지면서 내니에게 덤비고 있다.
종목은 '아기 낮잠 재우기'
아기가 생후 한 달이 안 됐을 때는 젖만 먹이면 재우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딥슬립에 빠졌었는데,
한 달이 딱 넘어가자 아기에게 잠투정이란 게 생겼다.
낮에 모유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 나와 잠깐 놀아주고 나면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지며 잠투정이 시작된다.
(내가 놀아주는 게 아니라 아기가 나와 놀아주는 게 맞다. 아기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초첨책이니 모빌이니 동요니... 나만 신나서 생쑈를 하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 주는 양상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잠투정을 하면 다시 젖을 물려서 재웠는데, 그렇게 하면 아기 수면 교육, 식습관 다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즘엔 다독여서 재우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아기가 내가 재우면 죽어라 안 잔다.
"나를 재우고 싶거든 쭈쭈를 내놓으라"는 듯 계속 찡얼 대기만 한다.
그러다가 내니 품에 가서,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자장가를 몇 분 듣다 보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잠이 든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내니가 퇴근한 밤, 내가 아기를 볼 때에는 잠재우기 전쟁이 벌어진다.
스와들링도 하고, 써도 된다 안된다 의견이 분분한 공갈 젖꼭지를 물리고, 백색소음을 종류별로 바꿔가며 틀어주어야 겨우 아기를 재울 수 있다.
"얘가 나를 젖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나?"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니, 난 아기가 나에서 필요한 건 오직 '밥'일뿐, 내 품을 거부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기를 안는 포즈가 불편한 게 아닐까 싶어 유튜브 보며 시뮬레이션을 했다.
내 바디로션 냄새가 진해서 그런가 싶어, 아기가 쓰는 베이비로션을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기는 내 품이 아닌, 내니 품에서 낮잠 자기를 택한다.
이런 이야기를 각각 두 아이를 키워낸 언니들에게 하면,
오히려 잘 됐다며 낮에는 내니에게 좀 맡기고 쉬라고, 그러려고 내니를 들이는 거라며 어이없어한다.
하지만 변태스럽게도 나는 내니 품에서 잠드는 아기, 그런 아기를 웃으며 내려다보는 내니를 보면 내니에게 경쟁심이 불타오른다.
'이제부터 내가 안고 있을게'라며 잠이 들랑 말랑 하는 아기를 내니에게 뺐아 안았다가 아기 잠을 깨운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친구들이 육아 전쟁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아이가 자기만 찾는다고 할 때, 정말 피곤한 일이겠다 싶었는데, 지금 나는 아기가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찾았으면 싶다. 배고플 때, 졸릴 때, 기분이 좋을 때, 나쁠 때. '엄마'만 찾았으면 좋겠다.
집착. 소유욕.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나의 이런 감정은 바로 이거다.
육아 선배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
때 되면 아기는 엄마만 찾게 돼있고, 지금은 보조 양육자 품을 싫어하는 게 오히려 더 문제니, 벌써부터 아기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집착하는 엄마 말고, 쿨하고 여유로운 엄마가 되자고 임신한 직후부터 결심했는데,
아기가 태어나 내 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미저리가 돼가고 있나 보다.
더 이상 내니와 낮잠 재우기 경쟁, 그러니까 나만 자꾸 지는 '유혈 경쟁' 그만두고,
아기에게 여유로운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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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짐을 하는 순간,
아기가 낮잠에서 깰 모양인지 옹알옹알 대며 팔다리를 휘젓기 시작하고, 내니가 아기에게 다가간다.
마음이 급해진다.
얼른 글을 마무리하고 내가 가서 아기 안아야지. 내 품에 안아야지.
누구에게든 쿨해지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기에게는 정말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