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국에, 어쩌면 시의적절한
"러시아 모스크바 아니면 인도 델리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디가 낫겠어?"
"모스크바가 백번 낫지 않아?"
모스크바행은 이렇게 결정됐다.
올해 1월 일이었다. 서른 일곱이 되었고, 이제 연차 깨나 찼다는 과장 생활도 막바지였다. 나름 착실하게 회사 생활을 해온 나보다 대여섯살 많은 선배들이 실적 부진, 육아, 각자 다양한 이유로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직장인으로 산지 13년이 흘러 있었다. 머지 않은 곳에 막다른 길이 보였다. 나도 독하게 마음 먹고 업무에 매진해서 조직의 리더급으로 가는 윗길로 점프하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다른 길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던 찰나에 남편이 해외 주재원 기회를 얻게 됐다. 파견 국가의 선택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러시아 아니면 인도, 중동, 남미 정도였다. 연차가 높은 팀장급은 동남아시아나 영미권 주재원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보다 어린 삼사십대 직원들에게는 주로 한국인에게 낯설고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제3의 국가들이 배정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라니.
휴가지로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곳이었다. 불곰국, 푸틴,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리고 최근의 키워드로 스푸트니크V 백신 정도가 간신히 떠오르는 생경한 도시. 그런 곳에서 최소 4년을 살아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직장인 13년차, 나이 서른 일곱, 인생의 절반 지점에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막막함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모스크바는 분명 새로운 길이었고,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내 인생의 나머지 절반에 대한 계획을 세워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마침이란 말이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혼 7년만에 아이도 찾아와주었다. 남편도 나도 회사를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일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열심히 또 신나게 하다보니 자연스레 자녀 계획은 ‘조금 더, 일년만 더' 하고 미루고 있던차였다. 그런데 딱 이때, 아이가 생기게 되자 모스크바에 가는 게 운명인가 싶기까지 했다. 직장인 명찰을 떼고, 무명의 이방인, 한편으로는 새내기 부모로서 새롭게 살아보라는 우주의 계시 같은 거 말이다.
남편은 올 1월 말, 러시아 겨울의 한 복판에 먼저 모스크바로 갔고, 나는 회사에서 맡고 있던 업무를 마무리하고 임신 16주차에 접어들던 지난 6월 모스크바로 왔다.
2021년 7월 15일.
그렇다. 난 지금 모스크바다.
오자마자 코로나 바이러스 델타 변이’놈’이 활개를 쳐서 매일같이 러시아 전체로 보면 2만여명, 모스크바에만 5-6천명대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130여년만의 폭염 때문에 매일 섭씨 33도, 34도를 기록하고 있는, 여기는 모스크바다.
"33, 34도면 평이한 여름 날씨네 뭐" 할 수도 있지만, 작년만 해도 모스크바는 아주 더워봤자 한낮에 25도 안팎이었다고 한다. 여기 현지 사람들은 이 뜨거움에 의아해하면서도 워낙 겨울이 길고 햇볕이 없는 곳이다 보니 공원이나 호숫가 같은 데서 더러 일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참 낙천적인 사람들 같기도 하고…
아직은 우리에게 꽤 낯선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이제 임신 7개월을 바라보는 이방인 여성으로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에 대해 성실하게 고민해서 글로 옮겨볼 생각이다.
한 달 조금 넘는 모스크바 살이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사는 이야기가 주가 될 것 같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식자재가 흔치 않은 이곳에서 이미 40년 가까이 한국의 맛에 길들여진 나와 남편의 핵심 과제이자 난제가 바로 ‘먹는 것’ 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독특한 문화, 가치관에 대해서도 적어볼 생각이다. 임산부라 러시아의 자랑 ‘스푸트니크 V’ 백신도 못 맞고 집콕 하느라 당분간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하겠지만, 가까운 이웃과 러시아어 과외 선생님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지점들이 꽤 있다. (남편은 백신을 맞았는데, 항체 생성 결과가 나쁘지 않단다. 물론 변이 바이러스의 경우, 백신을 맞고도 감염되는 사례가 종종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임산부 > 산모 > 초보 엄마가 되는 이야기도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생각만 해도 벌써 한숨부터 나오는데, 덤벙대는 걸로는 어딜 가나 맨 앞 줄에 서는 나에게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엄마가 된다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좌충우돌이 될 것 같은데, 이리 깨지고 저리 터지며 엄마가 되는 과정을 이곳에 잘 기록해야겠다.
이 글을 쓰는 건 새벽 5시… 푹 자야 할 임산부가 왜 벌써 깼냐고 물으신다면. 러시아의 백야 때문이다. 밤 10시 무렵이 돼야 해가 완전히 지고, 새벽 3시가 좀 넘으면 어렴풋 해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암막 커튼을 꼭꼭 쳐두고, 화장실에 가느라 잠을 깰 때는 (임산부라 자다가 한 두번씩은 꼭 화장실을 가야 한다) 마치 메두사를 뒤로 하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을 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데, 오늘은 보고야 말았다. 그 빛을…
침대에 누워서 일부러 지루한 책을 골라 읽어보기도 하고, 숫자를 거꾸로 세보기도 했지만, 갈수록 정신이 또렸해져서 결국 포기하고 <당분간 여긴...> 의 첫 글을 썼다.
다시 한번 잠을 청해 봐야지.
그리고 또 새롭게 모스크바의 하루를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