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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Jul 24. 2021

러시아 마트에선 이것이 특권층

당분간 여긴, 러시아 모스크바

먹는 것에 이렇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먹는 것이 이렇게 새로웠던 적도 없었다.


"오늘 뭐 먹지"

한국의 직장인일 때도 매일같이 했던 고민이지만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리 타향에서 살아내려니 먹는 문제가 이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코로나가 무서워 외식도 못하겠고, 배달 음식은 맛이 없다. 이건 동서양 입맛 차 문제가 아니다. 여기 배달 음식은 정말이지 맛이 없다. 파스타, 초밥, 한식, 심지어 글로벌 프랜차이즈 도미노피자까지 다 시도해봤지만 하나같이 '대충 만든 맛'이다(이곳 식당 관계자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도미노피자한테도 배신당하고 나니, 여기에라도 솔직히 적어야지 못 참겠다)


안전과 맛을 차치하고서라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150원 = 1 루블로 낮아진 화폐단위에 콩깍지가 씌어 러시아 물가가 되게 싼 줄 알았다. 수포자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정신 차리고 계산해보니 카페라테 230 루블(약 3500원), 쌀국수 한 그릇에 700 루블(1만 원) 정도로 한국과 물가가 비슷하다. 잠정적 백수에게는 적지 않는 돈이다.


임산부가 귀찮다고 밥을 거를 수도 없으니, 결론적으로 직접 해 먹을 수밖에.


그래서 시작한 마트 투어!

오늘 소개할 곳은 모스크바 남쪽 외곡에 있는 "뜨보이 돔(ТВОЙ ДОМ)"이다.


코로나 백신 못 맞는 임산부라 집 근처 반경 1km 에서 서식 중이라, 뜨보이 돔에 가는 날은 그야말로 '화려한 외출'이다.


뜨보이 돔은 러시아어로 '당신의 집'이란 뜻이다.

이름은 아담하지만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스타필드몰 한 층이 다 슈퍼마켓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클 수도 있겠다)



네댓 번 이곳을 다녀왔지만 단 한 번도 다 둘러본 적이 없다. 기본적인 식재료를 사는 데도 몇 번을 매대에 걸터앉아 쉬어야 한다.


각종 식재료가 모여 있는 이곳에 오면 러시아에서 뭐가 귀하고 흔한지 알 수 있는데, 이걸 탐구하는 게 꽤 재밌다. 내가 알고 있는 식자재의 권장 소비자가 역전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비싼 식재료가 뭘까?

잎채소다. 상추 같은 것 말이다.  

딱 한 끼 먹을 양의 상추가 100 루블 (1500원 정도)인데, 다른 식자재와 비교하자면 정말 비싼 가격이다. 감자 2개 300원, 계란 한 판에 1000원 남짓이니 말이다.


비싼 이유는 단순하다. 러시아는 추운 나라니까.

비닐하우스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추운 나라라서 그렇다. 그래서 유럽과 중동의 경계에 있는 '레바논' 같은 곳에서 수입을 하는데, 차로 이틀 거리란다. 비쌀 수밖에 없다.

상추는 시들지 말라고 뿌리째 파는데, 처음엔 베란다 텃밭용 모종인 줄 알고 러시아에서는 상추를 키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상추뿐 아니라 시금치, 쪽파... 초록을 띄고 있는 애들은 종류도 한정적이고 다 비싸다.   

요즘 한국에서는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고수, 비타민... 이런 애들은 백화점 마트에 가야 구할 수 있고, 깻잎은 이름도 못 꺼낸다.  


반면, 고기 값은 참 싸다.

돼지 목살 1kg에 6000원 정도로 한국의 절반 수준. 소고기도 스테이크용 등심 한 근에 만원이 안 된다.

닭고기 값은 너무 싸서 닭에게 미안할 정도다. 14호 닭 (우리가 보통 먹는 치킨 사이즈의 거의 2배...)가 4000원 내외다.


춥고 땅덩이가 넓은 나라 러시아의 음식 가격은 사계절이 있지만 작은 우리나라와 반비례다. 이제는 과학기술로 날씨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류지만, 음식 앞에선 자연이 정한 가격의 룰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다.  



거창하게 적었지만, 긴 글 끝에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거다.

삼겹살에 상추, 깻잎, 풋고추를 원 없이 싸 먹고 싶다. 산채 비빔밥도 먹고 싶고, 레스토랑에서 눈치 보지 않고 그린 샐러드를 사이드 디쉬로 시키고 싶다.



고기와 채소의 계급역전 스토리 말고도, 러시아 마트에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그중 하나가 유제품인데, 종류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이 이야긴 다음 글에서...



덧붙임

모스크바 대부분의 쇼핑몰에는 코로나 백신 접종 센터가 있다.

러시아 국민이라면 무료로 다 맞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아직 접종률이 낮다. (15% 내외)

  

국민들이 자국 백신을 못 믿어서라고 한다.

델타 변이에 백신이 효과적이다 보니 얼마 전 모스크바 시장이 백신 접종률을 높이려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려면 '백신 접종 확인 QR 코드'를 제시하게 했었는데, 2주 만에 철회했다.

백신 센터에 갑자기 사람이 너무 몰려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QR코드 발급 프로세스는 자꾸 오류가 나고, 자영업자들도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신 접종 센터는 다시 한산해졌고, 레스토랑은 다시 붐비고 있다.


허무하고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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