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여긴, 러시아 모스크바
우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초등학교 때 초록 박스에 담겨오던 우유 급식이다. 2교시가 끝나면 당번이 가지고 왔던 것 같은데, 우유가 도착하면 마일로나 네스퀵 같은 아이템을 구비한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탄식을 내뱉곤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90년대 초반에는 우유가 정말 맛이 없었다. 우유와의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다 보니, 커서도 우유 함유 음료 말고 순전히 우유만을 사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산부인과 첫 진료를 갔던 날이었다. 나도 아기도 다 건강하다는 이야기 끝에, 의사 선생님이 아기에게 우유, 요구르트, 치즈 같은 유제품이 좋으니 많이 먹으라고 했다.
마침 집 앞 마트 냉장고에 빼곡히 차있는 다양한 유제품들을 보며 하나씩 시음해봐야겠다 생각했던 참이었다.
마트 규모는 10평 남짓인데 한쪽 벽면이 모두 하이얀 유제품이다.
그리고 알게 된 러시아 우유와 그 패밀리의 참 맛!
먼저 우유. 우리나라도 요즘에 무지방, 저지방, 락토프리 등등 다양한 종류의 유유가 나오지만 러시아 우유는 더 세분화돼있다.
지방 함유량에 따라 0%, 1%, 2.5%, 3.4%, 4.5%, 락토프리 우유 등으로 나뉘어 있고, 지방 함유량이 적어도 꼬-소하고 달달하다. 참, 유럽 소설에서만 보던 염소 우유도 있다.
우유는 러시아어로 말라꼬(молоко)인데, 발음마저 입 안에서 동글동글 맴도는 게 귀엽다. 우리말로 '우유'도 조금 더 귀여운 발음이었다면, 예를 들면... 우융? 음메유? 이런 거였다면 내가 우유를 좀 더 좋아하게 됐을까? (쓰다 보니 러시아 우유를 이렇게까지 예찬할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정말 맛있고 '말라꼬'란 발음도 귀엽긴 하니까...)
우유 자체가 맛있어서인지 다른 유제품들도 기대 이상이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케피르'라는 발효유!
가장 왼쪽 페트병이 케피르. 모스크바 온 지 두 달만에 이젠 저렇게 1리터 단위로 사다마시고 있다.
러시아 여행책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시는 건강 음료라는 소개글을 본 적이 있었기에 처음엔 '체험' 혹은 '관광'의 개념으로 사 마셔봤는데,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쩌면 오래된 막걸리 맛 같기도 한데, 단맛/쓴맛/신맛 같은 단어로는 설명하기 힘들고, 그냥 '발효 맛'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낯설고 당황스러운 맛이 중독성이 있어서 '어라? 한 모금 더 마셔볼까?' 하며 매일 사 먹게 됐고, 이젠 나도 여행책 설명처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케피르를 마시고 있다.
중독성 있는 맛도 맛이지만, 무엇보다 화장실 루틴에 즉효!
케피르가 러시아의 데일리 음료가 된 것이 케피르에 어마어마한 유산균이 있음을 발견한 러시아 의학협회가 케피르 발원지(?) 터키로부터 레시피를 전수받아서 라고 하니, 케피르는 음료이기 전에 장 건강식품이 맞다. 실제로 한국에는 케피르가 정제된 유산균 분말이나 알약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 밖에도, 유산균 음료로 우리나라 '불가리스' 같은 맛의 스네쇽(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터키 요구르트 '아이란'(왼쪽에서 네 번째)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유제품들이 있다.
케피르의 진면목을 맛 본 뒤, 하나씩 다 사 먹어 봤는데, '아이란'을 제외하고는 다 맛있었다.
아이란은... 짠맛이 나는 요구르트인데, 그 아이러니한 맛에 된통 당한 다음에 위키디피아를 찾아보니 요구르트+물+소금을 넣어 만드는 터키 전통 음료라고. 도대체 소금을 왜!!!
여기까지가 러시아 유제품 월드의 도입부. 조금 더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스메따나'라는 러시아식 사워크림, 5만 가지 종류의 버터와 치즈, 그리고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유제품의 절정 '아이스크림'의 장이 펼쳐진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덧붙임
모스크바 현재 날씨 소식.
7월 중순까지 34-35도를 웃돌며 러시아 역사상 가장 높은 여름 온도를 기록하더니, 지난주 후반부터 갑자기 가을 날씨가 돼버렸다. 낮 최고기온 27도, 최저 기온은 15도 정도.
러시아어 선생님한테 '이제 러시아는 가을인가 봐요'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야, 이게 원래 여기 여름이야' 란다.
갑자기 냉랭해진 공기도 놀랍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왔다 그쳤다, 번개가 쳤다, 바람이 불었다 하는데 당최 종잡을 수가 없는 날씨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 대신 '변덕이 러시아 날씨 같네'라고 해야 할 듯.
너무나도 가을 하늘 같은 7월 말 러시아의 '여름' 하늘, 러시아 미술작품의 집결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앞에서
공원에 앉아서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나는 러시아 날씨 같지 않은 꾸준한 긍정과 낙천으로, 이곳 생활을 잘 꾸려 나가야겠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