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오늘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2일차.
여기 모스크바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데 큰 문제는 없다.
물론 스타벅스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더 이상 마실 수 없는게 화나고,
영국 유아용품점 마더케어가 사라져서 질좋은 아기 옷과 장난감을 사는 게 어려워졌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기저귀 값이 30% 가까이 올랐다.
분명 불편하고 황당한 일이지만, 5개월 아기와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
어제 정오 무렵, 항상 단지 내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길 건너편에 있는 슈퍼마켓에 갔다.
단지 내에는 아주부카 데일리라는 우리나라 SSG마켓 같은 느낌의 수입물품 전문 슈퍼와 유기농 제품 마켓 부쿠스빌이 있는데,
원래도 가격이 비싼 편인데 최근 전쟁 여파로 가격이 더 올라서, 좀 더 저렴한 슈퍼에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찾아간 슈퍼마켓 이름은 딕시(Dixy)
내니가 러시아 서민들이 가장 자주가는 슈퍼라고 소개해 준 곳이었다.
슈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놀랐다.
일단 어두침침한 불빛에 놀랐고, 장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한번 더 놀랐다.
구부정한 허리로 손자로 보이는 아이 유모차를 끌고 있는 할머니,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아직 영하의 날씨에 얇은 점퍼만 달랑 입은 배달원, 이미 술에 한참 취해있는 것 같은데 독주 코너(실제로 간판에 '독주'라고 돼있다)에서 술을 고르는 아저씨.
아파트 단지 슈퍼의 풍경과 너무 달랐다.
잘은 모르지만 구소련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무리 서민들의 슈퍼마켓이라지만, 수도 모스크바에서 왜 이런 광경이 펼쳐지나 곰곰히 생각하다가 시계를 내려다봤다.
평일 낮 12시.
직장인들은 모두 출근을 하고, 학생들은 한참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 슈퍼마켓을 찾는 이들은 은퇴한 노인들이나 실업자가 대부분이었던 거다.
모두 얼굴에 그늘이 짙어 보였다.
아무리 정부에서 도끼눈을 뜨고 물가를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지만,
채소 과일 가격이 최소 10% 정도 올랐고 해외에서 수입되는 공산품 가격은 30% 넘게 올랐다.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휴지나 쌀같은 생필품은 잠깐 품귀현상이 있기도 했다.
약자들의 시간
전쟁 중인 러시아 낮 12시, 서민들이 많이 찾는다는 슈퍼마켓, 고정 소득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요즘 지인들에게서 무탈하냐는 연락을 자주 받는다.
전쟁의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리만치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오늘 우리 아파트 단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보고서야 알았다.
나의 무사함 또는 안일한 평온함은 내가 이방인이라서, 러시아의 실생활에서 한발자국 떨어진 삶을 살고 있어서라는 걸 말이다.
모든 폭력은 약자에게 파괴적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빠르게 몸을 피할 수 없는 어린아이, 노약자가 위험의 최전선에 있고
여기 러시아에서도 안그래도 삶이 팍팍한 약자가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의 여파를 가장 아프게 느끼고 있다.
힘센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다툼이 이제는 끝이 났으면...
장바구니에 먹거리를 담는 여기 사람들의 표정이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덧붙임1]
대사관 직원들이 많이 사는 우리 아파트 단지 건너편은 서민 아파트다. 딕시도 서민 아파트촌 사이에 있다.
전쟁 속에서 오늘따라 더 추워보이는 아파트 촌의 모습
[덧붙임2]
진지한 글 끝에 민망하지만... 딕시에서 러시아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사발면 '도시락'을 사왔다.
엄청 저렴하다. 하나에 50루블 내외니 한국 돈으로 7, 800원 정도인 셈.
라면은 아직 개시 전이고,
매쉬드 포테이토를 하나 해먹어 봤는데, 짜지 않고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