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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의 정수기

정수기에 대한 단상

by 현재 작가

오늘은 부모님 댁에 방문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부리나케 음식과 옷가지를 챙겨서 출발한다. 부모님이 모두 주간보호센터에 가시는 시간에 방문해야 마음 놓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릴 수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엄마는 2년 전부터, 아빠는 1년 전부터 치매로 인해 등급을 받아 센터에 다니시고 계신다.


집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곳곳에는 쓰레기가 있고, 화장실에는 빨래가 물에 담겨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물이 약간 탁하다. 얼른 애벌빨레를 하고, 나머지 빨래도 넣어 세탁기를 돌린다. 여러 번 부탁드렸는데도 같은 일이 반복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순간 우리집 정수기를 떠올려 본다. 내 마음속 정수기 냉수 버튼을 누른다. 차가운 물이 싱크대에서 콸콸 떨어지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진다.


늦은 결혼을 한 나는 20년 이상 혼자 지냈다. 좁은 집에 정수기까지 나눠줄 공간도 없었고, 혼자서 물을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하는 생각에 생수를 사다가 마셨다. 결혼을 하고도 그렇게 지내다가 올해 처음으로 정수기를 설치했다. 주방 공간은 부족해졌지만 그래도 잘한 선택이라고 믿고 싶다. 정수기를 어디에 설치하든 공간이 줄어드는 것은 맞다.


정수기를 설치하고 신기했던 점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순식간에 내가 원하는 온도의 물을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수기는 회사, 마트, 은행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막상 집에 설치하고 함께 생활하니 요물이다 싶었다. 마음까지 추운 날에는 온수 버튼 한 번이면 훈훈해진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날에는 냉수 버튼 한 번이면 문제가 없다. 이젠 냉장고에 보관하던 물병도, 전기물주전자도 장식품이 되어 간다.


결혼 생활을 해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싸운다. 똑같이 직장에 다녀왔는데 남편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본다든지, 쓰레기 분리수거하고 나서 그 주변을 치우지 않는다든지, 설거지하고 바닥에 흘린 물을 닦지 않는다든지 아주 사소한 것으로 다툰다. 치매 부모님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러 그러시지는 않으시지만 치워도 치워지지 않는 살림을 보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정수기를 떠올린다. 차갑게 마음을 식혀주는 냉수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아직도 무더위의 기세가 꺽이지 않는다. 더위와 위생 문제로 힘겨운 여름을 보내야 하는 돌봄이 필요한 수많은 가족이 떠오른다. 고단한 하루를 차가운 물로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면 조금은 개운해지지 않을까 한다. 누르기만 하면 바로 조절되는 마음의 정수기가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콸콸 쏟아지는 정수기의 차가운 물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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