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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방법

나에게 주어진 무게를 견디는 여행을 떠나며

by 현재 작가

늦은 결혼을 하고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 중 하나가 내 여행 가방이다. 나에게 여행은 휴양지 느낌이 풍기는 옷으로 온 몸을 휘감고, 커다란 트렁크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르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잘 굴러가는 트렁크에 신기하고 색다른 기념품을 가득 담은 그런 여행 말이다. 트렁크는 공항에서, 기차역에서, 숙소에서 어디든 나와 함께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트렁크는 창고에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남편 때문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은 여행과 일상에 큰 구분이 없었다. 간단한 짐만 배낭에 넣으면 바로 출발이 가능하다. 여행지에서 색다른 경험이나 물건보다는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를 찾았다. 늘 배낭은 가벼웠고 이동은 간편했다.


반대로 나는 짐과 기념품 무게로 트렁크가 터져 나갈 지경이다. 남편은 여행 중에 천천히 움직이는 내가 눈에 밟혔는지 자꾸만 내 트렁크를 밀거나 들어주려고 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배낭으로 바꾸었다. 내가 짊어진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면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트렁크가 아닌 배낭에 짐을 꾸리면 확실히 이동이 간편한 것은 맞다. 엘리베이터나 승강기가 없는 여행지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내릴 때, 골목길에 숨겨져 있는 숙소를 찾을 때 빛을 발한다. 심지어 트렁크에 비해서 무게도 덜 나간다. 문제는 내 기준으로 배낭이 별로 멋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트렁크에 비해 물건 파손이나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씩 남편의 배낭에도 내 물건이 침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당한 크기의 배낭이면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은 대부분 채워졌다. 갈아입을 옷, 세면도구, 화장품, 소소한 간식거리 정도면 큰 문제없이 일정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고심해서 챙겨간 물건조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여행 당시에는 멋지고 근사해 보였는데 막상 돌아와서 꺼내지도 않는 기념품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에 정리한 우리 부모님 옷장에서 여행지에서 힘들게 구입했던 효도 선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더 정이 떨어졌다. 어차피 내 배낭이 작아서 기념품이 들어갈 공간도 부족하니 잘 되었다 싶었다. 배낭 하나면 충분한 삶인데 왜 그렇게 많은 물건과 잡동사니 속에 파묻혀 지냈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은 간단하다. 필요한 물건만 짊어지고 뚜벅뚜벅 걷는 것 그리고 필요도 없는 물건은 말끔히 비워내는 것. 물건을 비울수록 집이 넓어지고, 창고를 비울수록 생활이 편리해지고, 옷장을 비울수록 입을 수 있는 옷이 많아지는 마법을 누구나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인생이란 긴 여행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물건과 잡동사니 속에 파묻혀서 살지 않아도 된다.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고민하며 두려움 속에 파묻혀서 살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이 열리기도 하고, 고민했던 일이 쉽게 지나가기도 한다. 위생 문제와 무더위로 힘겨운 여름을 보내야 하는 돌봄이 필요한 수많은 가족이 떠오른다. 그렇게 많은 물건과 두려움에 파묻혀서 살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수많은 가족들에게 나직히 말을 건내 본다.


오늘도 배낭을 챙기며 출발 준비를 한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다시 배낭에 짐을 짊어지고 사랑하는 부모님 댁으로 향한다. 가벼운 짐도, 무거운 짐도 내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들고 출발한다. 이렇게 인생이란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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